(69) 남수우 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 김용범 / 푸른아시아 전문위원
2024년 K-방산 수출액은 150억 달러로 추정되며, 2027년까지 세계 4대 방산 수출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K-방산의 성장 과정을 거슬러 가면 K200 장갑차를 만나게 된다. 1993년 한화 에어로스페이스가 말레이시아에 수출한 111대의 K200은 알루미늄 소재로 제작되었으며, 한국 방산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1980년 율곡사업의 일환으로 미국제 장갑차인 M113을 대체할 국산 장갑차 개발을 위한 K200 사업의 성공에는 남수우 교수의 결정적 역할이 있었다.
국내 최초 강도학자(强度學者), 알루미늄과 인연을 맺다.
1980년대 초, 국내에서 독자적인 장갑차 개발이 본격화되어, 1984년 K200 장갑차가 공식 무기체계로 채택되었다. 알루미늄 소재의 K200 장갑차는 가볍고 부력이 좋아 수상 운행을 위해 완전 방수 구조로 설계되었지만, 당시 국내에는 알루미늄 장갑 판재의 용접 기술이 부족하여 해외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1981년 대통령 앞에서 시운전을 앞두고 시제품 장갑차 3대 중 2대에서 7cm의 균열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겼다. 시운전 날짜는 다가오는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다 보니 국방연구원에서 급하게 전문가인 남수우 박사를 찾았다.
당시 남수우 박사는 국내 최초의 강도학(强度學) 박사였으나, 알루미늄을 연구는 하지 않았던 터였지만, 너무 급박한 상황에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균열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철저하고 신속한 분석을 시행했다. 균열의 원인이 알루미늄 판재 용접 부위 부식임을 파악한 후 용접 시 유입되는 열을 최소화하고, 용접 부위에 순수 알루미늄으로 덧대는 방식으로 부식을 방지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덕분에 시운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K200 장갑차는 국내 방산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하며 해외 수출로 이어지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를 통해 남수우 교수는 국내 방산 기술에 크게 기여하며 알루미늄과 인연을 맺게 된다.
국내 최초 국제합금 번호를 획득하다.
알루미늄은 가볍고 부드러운 은백색의 금속원소로 열과 전기가 잘 흐르면서도 연성과 전성이 있어 얇은 박이나 선을 만드는 것이 쉬워 일상에서 사용하는 가장 흔한 금속 중 하나다. 그러나, 무르고 부드러운 성질 때문에 장갑차 같은 자동차나 다양한 장비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강도를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합금을 만들어 사용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비행기 동체를 만드는 두랄루민도 알루미늄과 구리, 마그네슘 등을 혼합한 합금이다.
알루미늄 합금은 원소의 종류나 양에 따라 1000에서 7000번까지 번호를 매겨 구분한다. 각 번호마다 합금의 종류가 다른데 남수우 교수가 처음에 개발한 알루미늄은 7000번 계열로 용접성이 좋고, 강도가 높았다. 이를 국내 및 영국의 특허를 받았는데 방탄 실험에서 기존 제품보다 더 우수한 성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 개발한 합금은 판재로 가공해야 하는데, 그 당시 한국에는 고강도 후판 알루미늄 압연시설이 없어서 국내생산이 불가능하였다.
국내 알루미늄 관련 현실을 경험한 후 방향을 바꾸어 생산이 가능한 합금 개발을 추진했다. G7과제를 통해서 기업들이 함께 참여하는 압출용 6000번 계열의 합금을 개발했다. 연구를 시작핼 때 강도가 높고, 동시에 연성이 우수하여 압출이 잘 되고 피로 수명이 긴 금속을 개발하고자 했다. 그런데 강도가 높아지면 연성이 떨어지는 금속의 특성으로 개발 자체가 어려웠으나 이러한 금속을 개발하면서 모르던 것을 알게 되어 그 과정이 너무도 신이 났다고 한다.
연구에 열심히 매진한 결과 알루미늄에 망간을 추구하면 강도가 높고 연성이 우수한 합금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게 되어 강도를 높이면 연성이 낮아진다는 종래의 강도학 이론을 바꾸었다. 강도와 연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는 획기적이고 새로운 강도학 이론을 정립하였다.
남수우 교수는 공학은 무릇 인간 생활에 도움을 주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대로 남 교수가 개발한 고강도 알루미늄 합금은 국내 2건의 특허등록으로 제조 기술을 산업화하여 가로수 기둥, 남구미 대교의 다리 난간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었으며, 글로벌 알루미늄 협회(The Aluminum Association)로부터 AA6024라는 국내 최초의 국제공인 합금 번호를 획득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개발한 알루미늄 합금 중에서는 최초로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남수우 교수는 공학은 무릇 인간 생활에 도움을 주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대로 남 교수가 개발한 고강도 알루미늄 합금은 국내 2건의 특허등록으로 제조 기술을 산업화하여 가로수 기둥, 남구미 대교의 다리 난간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었으며, 글로벌 알루미늄 협회(The Aluminum Association)로부터 AA6024라는 국내 최초의 국제공인 합금 번호를 획득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개발한 알루미늄 합금 중에서는 최초로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한국전쟁 후 인중에서 제고를 짓다.
남수우 교수는 인천중학교(6회)와 제물포고등학교(3회)를 졸업했다. 그가 인천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인천중학교 시절 미군이 주둔했다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운동장에 설치되어 있던 군대 막사용 바닥 콘크리트 깔개 제거를 위해 망치나 야전삽 같은 공구를 가방에 가지고 다녔다. 그중 하나는 제거하지 않고 농구장으로 활용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제물포고등학교를 짓기 시작했는데, 터를 닦기 위해서 언덕 위 나무를 베어내는 작업 도중 쓰러뜨릴 수 없던 나무를 미군의 불도저로 단번에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놀라운 사건도 있었는데 학교 부지를 정리하던 중에 인민군의 두개골이 다수 발견된 것이다. 소문으로 인민군이 벙커에서 나오지 않고 저항하다 몰살당했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3학년 때에는 운동장에서 벽돌을 만들어 건물을 학생들이 직접 지었다. 현재 그 건물은 헐려 없어졌지만, 위치상으로 학교 국기 게양대를 바라보며 왼쪽 언덕 위, 지금 고등학교 3학년 건물 옆에 있었다고, 벽돌을 옮기려면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했지만 힘든 줄 모르고 건물을 지었고, 이렇게 자신의 땀으로 세워진 학교이다 보니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무감독 고사임에도 낙제생이 있었다.
남수우 교수는 지금도 길영희 교장 선생님의 무감독 고사 경험을 잊지 못한다. 답안지를 만족스럽게 작성하지 못하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감독 고사를 시행하고, 낙제생 7명이 나왔을 때 교장 선생님은 조회 시간에 낙제한 학생들을 칭찬했고, 자유공원 울타리에서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고 회상했다. 당시에는 공원에 올라가던 시민들이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기 위해 울타리에 기대어 있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고 말한다.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돌고, 한 달에 한 번 소풍을 가고, 어떤 때는 토끼몰이를 하고, 각 반마다 공을 나눠주며 체력을 기르는 일의 중요성도 강조했다고 남 교수는 기억한다.
나이 차를 극복한 대학 생활
남수우 교수는 대학 진학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1958년 9월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 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되면서 육사를 준비하던 친구와 함께 국사 공부를 하던 중, 친구의 강력한 권유로 육사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이후 급히 서울대 입시를 준비했지만 낙방하고, 마음이 혼란하여 공군에 지원 입대했다. 제대 후 취직하였지만, 부모님의 강권으로 다시 대학 입시를 치르게 되었고, 결국 다른 학생들보다 5년 늦게 인하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후 제물포고 후배였던 학생회장이 남 교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 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동기생들이 거리를 두어 외로웠던 그는 일부러 농구, 배구 등 체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동기생들과의 관계를 좁히는 노력을 했다. 늦은 나이에 대학 생활을 하게 되어 부모님께 죄송했던 남 교수는 화신백화점에서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과외를 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학업 성적 또한 뛰어나 4학기는 전교 수석, 4학기는 학년 수석을 하며 수석 졸업의 영광을 안았다.
국내 최초의 강도학자(强度學者)가 되다
그는 대학을 다니면서 유학을 위한 자격시험에 통과했지만, 유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실제로 유학의 기회가 생겼다. 대학을 졸업한 후 금성사에 입사하여 근무 중의 일이다. 당시 인하공대 학장의 딸이 미국 신시내티 대학에 유학 중이었는데, 같은 대학의 재료과에 있던 한국 사람이 유학생 추천을 요청해 온 것이다. 학장은 학과에 요청했고, 학과장은 그의 뛰어난 실력을 기억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남수우 교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렇게, 미국에 도착하여 공부를 시작했지만, 자신이 학부에서 공부했던 금속 분야가 아닌 세라믹 분야여서 처음엔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학업에 매진했다. 그렇게 배우던 과목 중에 확산과목을 매우 잘했다 한다. 담당 교수의 눈에 들었고 확산 전공의 미국 교수가 그를 불러서 자기 연구실에서 같이 연구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이미 자신의 지도교수가 정해져 있어서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의 속 마음을 들었던 확산과목 교수는 Colorado school of mines를 추천해 주었고, 그곳으로 옮겨 즐겁게 공부하면서 석사학위 지도교수가 대학원장이 되기 위한 조치로 다른 대학에 인턴으로 1년간 출타하여 연구수행보다는 학과목 이수에 집중하였다. 지도교수가 돌아와서 석사학위 논문을 3년 만에 끝내게 되었다. 대학원장은 지도교수가 될 수 없다는 학교 규정 때문에 박사학위 지도교수를 정하였고 박사학위 이수에 필요한 교과목은 이미 다 수료한 바 있어서 새로운 연구과제를 수행하여 2년 후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래 사진은 그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 사용했던 장비의 모습이다. 사진 중앙부는 남수우 교수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고온 실험 장치다. 어떤 물체에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면 그 힘에 대응하는 내부의 힘이 발생하는데(이것을 응력이라 한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반복 응력하에서 작용되는 응력인 유효 응력을 세계 최초로 측정했다. 그리고 측정된 유효 응력을 이용하여 정량적으로 반복응력 하에 소재의 변형으로 인한 수명을 예측하는 새로운 이론식을 최초로 제안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강도학(强度學) 분야의 최초 박사학위 취득자였다.
한국 과학기술연구원 교수로 활동하다.
1974년, 남수우 교수는 학위를 받고 1974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대학 입학은 동료들보다 늦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동기들과 비슷하게 연구자와 교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박사학위 과정에서 연구한 내용을 확장한 연구성과를 국제학회에서도 높게 평가받아 다수의 국제학술대회에서 초청 강연을 하는 등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1988년 KAIST 학생처장 재임 시절, 석사 장교 제도에 대한 특혜논란으로 석사 장교 제도 검토 움직임이 생기며, KAIST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적용되던 병역 특례제도도 존폐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남 교수는 KAIST 박사과정 학생들의 병역면제 특례제도가 석사 장교와는 달리, 박사 취득 후 국내 기업에서 3년간 의무 복무를 수행하는 제도임을 사회에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병역 특례기간 중 KAIST 박사 졸업생들이 국내 주요 기업에서 거둔 중요한 업적을 정리하고 분석하여 병무청, 국방부 인사국장, 국방부장관 및 청와대를 방문하여 실제 성과를 보여주면서 설득한 결과 이 제도가 현재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남수우 교수는 앞서 언급했던 K200 장갑차 연구 개발을 비롯해 강도학 분야의 새로운 이론을 제안하는 등의 연구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공로로 1992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 2011년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등 국가훈장과 2001년 대한민국 공학계 최고 권위의 상인 ‘한국공학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에는 인천광역시 과학상 대상을 1호로 수상했다. 남 교수는 수상 상금 1천만 원을 모두 인천시교육위원회에 기부했고, 이는 모교인 제물포고와 인천과학고에 장학금으로 지원됐다. 몇 년 후 그때 장학금을 받은 인천과학고 출신 학생이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남 교수로서는 매우 뿌듯한 순간이었다.
남수우 교수는 대학에서의 연구 활동 외에도 한림원 등 다양한 학술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한국의 과학발전에 기여했다. 2021년 KAIST는 이런 그에게 개교 50주년을 맞아 공로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남수우 교수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상은 청소년 시절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 양심을 가르쳐준 모교의 ‘자랑스런 제고인상’이다. 그는 평생 배운 것과 이룬 성과 모두 모교 덕분이라고 말하며 제물포고 동문임이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