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진숙 작가 - ② 둥지 같던 '래화실'
이번 글에는 필자의 어린 시절과 인천을 떠나기 전까지(그러니까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기억과 추억, 그 동시대를 함께 상상할 수 있을 만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주안 아파트가 처음 지어질 때 입주 며칠 후 태어났던 나는, 가족과 함께 내가 네 살쯤 되었을 때 청천동으로 이사를 했다.
기억력이 좋아 그 네 살 이전의 기억도 꽤 갖고있는 나의 네 살 이전 주안 아파트에서의 기억은, 놀이터의 그네, 미끄럼틀, 연년생 남동생의 탄생, 놀이터에서 함께 놀던 언니가 잠깐 한눈을 팔은 때 아파트 단지에서 길을 잃어버린 날 저녁 내내 찾던 엄마 아빠가 경비실 아저씨 품에서 보호받으며 코 자고 있던 날 발견하고 감사의 인사를 했던 기억 등등이다.
우리 집이 청천동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을 때, 그곳은 흡사 우리 모두가 열광 하며 보았던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같은 동네 였다. 단독주택들의 골목, 비슷한 또래의 부모들과 아이들이 살았고 그 단독주택 뒷방이나 옆방엔 더 젊은 가족이나 지금 추정으론 공장에 다니는 언니들이 작은 방에 세를 살고 있는 구조였다.
요즘 시대엔 상상할 수 없겠지만, 또래 친구들은 골목에서 벽돌이나 나뭇가지들을 꺾어 부엌놀이, 엄마 아빠 놀이, 고무줄 놀이 등등을 했고 해가 지면 엄마들은 아이들을 부르고 우린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곤 했다. 어른들은 서로들 친했으며, 뒷방에 세를 사는 공장 언니들도 우릴 귀여워 해줬다.
아마도 그 남아있는 기억들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며 아련하고 찡한 설렘과 아쉬움을 공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며 문득, 그 청천동이라는 곳은 지금쯤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해본다. 아마도 이미 오래전에 그 곳 역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장면 처럼 재개발의 붐이 일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 선지 오래일 것이다.
1980년대 초중반, 인천에도 신도시 바람이 불었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쳤을 때, 우리 식구들은 그 당시의 신도시로 부상하던 가좌동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온통 아파트들이 빼곡한 신기한 동네. 처음 보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고층 아파트들, 모든 게 신기했다. 우리가 이사한 그즈음 어른들은 다시 그 가좌동이라는 곳에서 종종 우연히 마주치고 반가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엄청난 이주가 이루어 졌던 곳, 가좌동.
지금은 수많은 개발들이 곳곳에서 이뤄져 새 신도시들이 생겨나 그곳은 이젠 그저 빽빽한 변두리 서민 아파트촌 모습의 동네가 되었지만, 그 당시엔 더 나은 삶의 계획을 품은 당시 내 부모 또래 어른들의 꿈의 기회와 터전이었던가 보다.
처음 이사 갔을 때 우리 남매들은 엘리베이터 놀이에 빠져 1층에서 14층으로, 14층에서 8층으로, 8층에서 6층으로 그렇게 버튼을 눌러대며 까르르 웃고 즐겁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때 이사를 왔던 그 가좌동에서 난 열 아홉살까지 주욱 성장 했다.
아이들이 넘쳐나 내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옆에 새 초등학교가 두 개가 더 생겨났고, 한반에 60명이 넘는 아이들의 분산을 위해 새 교실과 반들도 더 생겨났었다.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그것은 80년대의 개발 붐과, 90년대에 이르는 여러 사회적 변화들도 함께 공존 하며, 나의 유년기와 지독한 사춘기의 성장통과도 맞물린다.
우리 식구가 인천을 떠나기까지 그 사이 우리 아빠는 내가 중학생때 갑자기 돌아가셨고, 난 지독한 사춘기를 맞이하고 성장통을 지나야 했으며 우리 언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릴때부터 어른의 동행없이 버스를 타고 애들끼리 어디 가는걸 위험하게 생각한 우리집의 분위기 때문에,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땐 다른 아이들처럼 콩나무 시루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 낭만이 소원이기도 했지만 중학교는 집에서 걸어서 갈수 있는 동네의 여학교에 배치되었다. 유일하게 친구들이나 언니, 사촌들과 버스를 타고 우리끼리 시내를 즐비할 수 있는 기회는 새 학기가 되기 전 참고서나 친구 선물, 포장지, 새 학용품 등을 구입한다는 명목으로 제물포역이나 동인천역 등에 가는 기회였다.
내가 인천을 오래 떠나 살다 몇 해 전 다시 인천에 돌아온 뒤 제물포역 지하상가를 다시 가본적은 없지만 그 당시 어마어마하게 흥미로운 꺼리들로 가득했던 긴 지하상가 길은 실제 아마도 아주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동인천역은 그에 비해 더 근사하고 화려한 상권이었다.
대한서림 입구와 안에 가득했던 사람들, 이것저것 예쁜 옷들과 신발, 악세사리들로 시선을 끌었던 긴 지하상가 거리, 신포동의 네온 불빛들, 즉석 떡볶이와 쫄면들, 중학생인 나에겐 신나는 볼거리와 쇼핑의 풍요를 채워주는 곳이었다.
조금 더 어릴때의 기억으로 더 들어가자면, 초등학교때 선생님의 결혼 선물을 친구들과 돈을 모아 사기 위해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고 우리끼리 희망백화점 이라는 곳에 가게 된적이 있었다.
선물을 고르는 본래 임무는 잊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락 내리락, 거꾸로도 바로도 타고 오가며 뛰어다니고 깔깔 웃으며 노는데에 정신이 팔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그 에스컬레이터가 그 시절엔 그게 뭐라고 그 자동으로 움직이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노는 것 만으로도 그렇게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몰라 신나 했던지,
그 시절 그 시대만의 순수함과 촌스러움은 어른이 된 지금도 빙긋 하는 미소와 함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뭉클한 아련함의 상징처럼 기억이 되곤 한다.
시간이 더 흘러 열아홉살을 채우고 나와 우리 가족들은 인천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즈음 나의 십대 후반은 무척 암울했다.
천성이 말괄량이였던 나는 사춘기를 지나며 감수성이 과하게 풍부해지더니 말이 없고 혼자만의 세계에 깊숙이 갖힌 몽상가로 성장했고, 그 시절의 내 유일한 추억은 화실에서의 동료들, 선생님들이다.
당시엔 입시학원이나 화실들이 조밀조밀 모여 있었는데, 제물포역이 그랬고 동인천엔 후소 미술학원이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이 되어있는 나는 당시 학원에 적응을 못해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하며 며칠만에 관두고 바꾸기를 반복했었다. 그 중, 내 마음에 쏙 들었던 곳이 바로 '래화실' 이라는 곳이다. 박문여고(동구 송림동) 옆 대로변에 있던 허름한 화실이 대형 학원들보다 왜 그렇게 내 맘에 들었던지, 잘 적응한 편이었다.
쾌쾌한 종이와 연필 냄새, 썩 청결하지 않은 이젤들과 석고상과 환경들은 대형 학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곳엔 낭만이 있었다.
요즘 시대엔 늦은 나이도 아니지만 당시엔 혼기를 훌쩍 넘겨 노총각으로 불렸던 친구같던 원장 선생님, 5수째 화실에 살다시피 하는 오빠와 화실을 거쳐 대학생이 되어 시간제 강의를 나오던 언니 오빠들, 썩 부유하지 않은 또래 친구들, 그 가족같은 분위기가 날 안심케 해주었던 것 같다.
마로니에의 노래와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노래가 거리의 좌판 테이프에서 울려 퍼지던 그 시절, 어서 대학생이 되고 싶던 시절, 내게 자유와 낭만의 추억을 주었던 그 시절 그곳이 엊그제 같은데도 새삼 그리워진다.
오랜 세월이 지나 훗날 몇해전 내가 다시 인천에 돌아왔을 때에는 그때의 명성 있던 학원들도, 내 둥지 같던 래화실도 사라져 있었지만 래화실의 원장님도 내가 거쳐갔던 학원의 선생님도 다시 만나 뵐 수 있게 되었다.
패기 가득했던 그 젊은 선생님들은 흰머리의 모습으로, 10대였던 나 역시도 40대 끝을 달리는 그러나 이젠 동료 유진숙 작가로 말이다. 얼마나 반갑던지, 그 세월과 변화들이 야속하지 않을 만큼 소중한 인연이고 재회다.
겹친 개인전 두 개와 아트페어를 연달아 치루며 원고가 늦어졌다.
그냥 담담히 내 기억들을 써내려 갔는데, 써내려가다보니 역시 기억이란 늘 스스로에겐 애틋하게 재조명 되는 것 같다.
두서없이 많은 부분 못 담은 이야기, 건너 뛴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쯤해서 글을 마무리 지려 한다.
글을 마치며,소중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시공간을 넘나든 사람처럼 내가 다시 자리 잡게 된 이곳에서, 난 바라본다.
교차하는 많은 부분들의 정서는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님의 두 번째 글 잘 읽었습니다.
기억력이 대단하시네요.
고향 인천에서 왕성한 활동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