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지좋은 제물포항, 일본 군사기지, 외국 군함정박지로 사용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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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좋은 제물포항, 일본 군사기지, 외국 군함정박지로 사용될 것"
  • 박유진 객원기자
  • 승인 2025.01.05 1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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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개항박물관 특별기획전 '경계와 경계' 6월 29일까지 열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 개항기 조선, 인천을 만나다.

인천개항박물관이 특별기획전 '경계와 경계' 를 열고 있다. 지난해 11월 27일 개막한 특별전은 오는 6월 29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인천항 개항과 함께 제물포를 찾았던 외국인의 방문 목적에 따른 모습을 직업군으로 나누어 알아보며, 자료를 통해 그들의 시선으로 변화되고 있는 당시 제물포의 모습을 살펴보는 기획이다. 

 

개항박물관 특별기획전시장 외부ⓒ박유진

 

개항박물관 특별기획전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바로 옆 조선은행 박물관에서 입장료 5백원을 내고 입장권을 발부받으면 된다. 어린이는 무료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유물들은 당시 개항시대 제물포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개항박물관 특별기획전시장 내부ⓒ박유진

 

당시 인천은 열강의 개항요구에 시달리다가 결국 1883년에 제물포항이 개항을 하게 되었다. 앵거스 해밀턴은 당시의 제물포에 대해 "작은 어촌마을에서 2만 명의 큰 도시로 성장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일본과 중국인이 많이 들어와서 살았고 다른 외국인들도 거주했다."고 기록했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입체사진'이나 '제물포항각국조계도' , '조일약장합편' 등의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일본풍과 서양식 건물이 많이 지어지던 당시의 제물포 풍경을 짐작하게 한다.   

 

박물관 안내소책자 속 인천전환국압인기ⓒ박유진

 

외국인 행정가들과 관련된 유물들도 많다. 
준비 없이 강요된 개항이었던 탓에 조선은 외국에 사찰단을 파견, 이들의 보고로 세계의 실정을 확인했다. 이에 정부는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외국인 고문을 초빙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국제질서에 맞춰 나가고자 했다.

이들 정부에 고용된 외국인들은 근대화 업무를 담당했고 국교를 맺은 국가들은 조계 내 영사관을 설치, 본격적인 통상교류를 준비했다. 

당시 제물포항의 모습을 본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기자는 "제물포항은 바깥쪽 항구에 정박한 영국, 러시아, 미국, 일본, 중국 군함으로 매우 활기를 띠고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경인철도 건설현장 사진 ⓒ박유진

 

외국인 건축가들의 기록물과 사진도 전시되오 있다. 서구식 건물인 존스턴 별장, 대불호텔, 제물포구락부가 지어졌고 철도와 도로망이 연결되며, 접안시설과 등대 같은 항만 시설이 확충되는 등 제물포의 모습이 크게 변화되었다. 

경인철도 건설현장 사진을 보면 일제가 수탈을 목적으로 조선인들에게 철도를 건설하게 하는 장면이 담겼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월섬의 광고지와 전화기, 망원경ⓒ박유진

 

외국인들 중에서는 무역상도 있었는데 이들에 의해 성냥, 서양식 의류, 축음기, 전화기, 사진, 시계 등 신문물들이 무역상사를 통해 유입되었다. 1900년대 월섬 회사의 광고지에는 조선인이 등장하며 '미국의 월섬 시계야 말로 그 정답'이라고 적혀 있다. 

 

천주교 관련 유물들ⓒ박유진

 

가장 인상 깊었던 외국인의 유형은 바로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근대 교육과 의료 기술을 들여와 조선의 교육과 의료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한국 감리교의 효시인 인천내리교회 제2대 존스 목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설립하였고, 인천 천주교 기틀을 마련한 4대 주임 드뇌 신부는 1909년 인천항사립박문학교를 인수, 가난한 학생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눈에 띄는 업적을 보여주는 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랜디스 박사와 관련된 유물도 볼 수 있었다.

인천시민愛집에서도 그 이름을 볼 수 있었던 랜디스 박사는 영국 성공회 소속 미국인 의사였다. 그는 아픈 조선인들을 인천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성 누가 병원을 설립하여 치료했다. 또한 야간영어학교를 개설하고 고아들을 보살폈다.  33살의 젊은 나이에 과로사로 숨질 때까지 선교 활동을 하는 틈틈이 한국 민속에 대한 서책과 자료를 수집하고 원고를 집필, 300여 권의 연구자료를 남겼다.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조선 관련 기사들ⓒ박유진

 

여행가, 학자, 기자들이 방문하여 남긴 기록물과 유물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조선인들을 미개인이나 야만인으로 봤다.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을 향한 유럽과 미국의 기자들의 관심이 많아졌고 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세력은 강화됐다. 일제는 무력으로 조선의 외교권, 행정권을 강탈했고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다. 

미 해군 경리감 유스터스가 쓴 기사가 의미심장하다. "제물포항은 입지가 상당히 좋아서 일본국 군사 작전기지와 외국 군함 정박지로 사용될 것이다. (생략) 이전에도 그랬듯이 다시금 조선의 이해관계와는 아무 상관없는 무력 충돌로 영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은 고통에 신음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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