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한 島民의 삶... 연평도에 정착한 청년 전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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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한 島民의 삶... 연평도에 정착한 청년 전덕규
  • 김석훈
  • 승인 2025.01.0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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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 인물 열전]
(1) 연평도의 선구자, 전덕규
- 김석훈 /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문학박사
인천의 서해 섬 지역. 한반도 해역의 중간 지대로 인류사에서 생명의 탄생, 식량자원의 제공, 그리고 역사적으로 해상 교류의 출발점이자 한반도 수도와 직결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해양과 지형 그리고 정치적 상황이 맛물린 관계적 상황 속에서 섬 주민이 만들어낸 역사와 문화는 단절된 고리없이 찬연한 바다처럼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감소하는 인구, 변화하는 해양 환경이 오늘날 섬살이에 어디까지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오늘날 문화가 있기까지 도민(島民)으로서 도민과 함께 일구고, 지키고, 계발시킨 선구적 개척자는 누가 있을까? 2025년 을사년을 맞아 선구적 개척자를 찾아 인천 섬의 역사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인천 섬 인물 열전]을 연재한다.

 

연평도
연평도

 

흔히 많은 사람은 대부분의 섬이 비슷하다고 얘기한다.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비슷할지 모르지만 내부에서 섬 주민들의 해양과 지정학적 환경 요소가 반영된 주민의 생활과 문화를 보면 섬도 제각각 다르다. 즉 섬 주민이 남긴 지역성이 섬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연평도(延坪島), 이 섬은 해주만의 전진기지로 현재는 꽃게의 산지로 유명하지만 60년 전까지 조기의 황금 어장이자 우리나라 3대 어장, 6‧25전쟁 때는 수많은 피란민으로 섬 전체가 몸살을 앓았다. 2010년에는 북한의 공격으로 아픔의 상처가 남아 있다. 따라서 전쟁과 평화, NLL과 중국 어선 그리고 어업 환경, 해양환경과 어종의 변화, 민속 신앙과 기독교 등 상반된 문화가 병립하는 다양한 지역성이 병존해 있어 다른 섬 문화와 크게 비교된다. 서해5도의 특징이랄까?

이런 가운데 100년 전 교육과 민중 계몽을 통해 연평도 발전에 선구자 역할을 했던 전덕규(全德奎). 선종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 연평도 사람에겐 잊을 수 없는 분으로 남아 있다. 그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덕규. 칠순 때의 모습(아들 전동숙 제공)

 

▶ 천주교 가문 그리고 서울 유학

전덕규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전응택(全應澤) 바오르와 김 이사벨의 3형제 중 장남으로 1898년에 태어나 1970년 초반에 사망하였으며, 천주교 집안이다. 그의 일가에는 천주교 성직자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4촌 동생인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1920~1950)는 1946년 서울 명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황해도 사리원 성당에서 박우철 신부의 보좌신부를 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순교하였다.

또한 조카인 강의선 힐라리오 신부(93세)는 인천에서 배출한 첫 한국인 사제로 1963년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나길모 주교로부터 서품받았다. 손자인 전명철 안드레아 신부는 현재 안동교구 소속으로 사목활동 중에 있다. 그 외 수녀회 회원으로 수도자의 길을 걷는 분도 여러 명이다.

전응택은 황해도 신천 청계동 본당회장이어서 안중근 의사의 집안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그의 딸이었던 전말다(瑪多)는 안 의사에게 엎혀 다니며 글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당시 청계동 성당은 빌렘(Wilhelm, 洪) 신부가 주임신부였으며, 이때부터 10대의 어린 전덕규는 빌렘 신부와 인연이 닿았다. 그러나 빌렘 신부가 1910년 여순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성사를 준 것이 문제가 되어 뮈텔(閔) 주교로부터 2개월 성직 정지 사건이 발생했다. 빌렘 신부는 청계동 성당을 떠났지만 교황청은 성무 집행이 정당하다고 인정하여 1912년 해주성당로 옮겨 사목활동을 잇게 되었다.

해주에서도 전덕규와 인연은 이어졌다. 증언에 의하면 전덕규는 “매우 머리가 좋고, 사리 판단이 정확한 우수한 인재였다. 특히 해주 성당을 다니던 10대 시절인 1910년대 빌렘 신부의 복사(服事)로 활동하던 중 신앙심과 영민함이 홍 신부의 눈에 띄어 그의 권유로 서울로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고 하며, 그 사이 남은 가족은 연평도로 입도하게 됐다.

 

▶부친 전응택의 연평도 입도로 맺어진 인연

연평도와 인연은 1917년 아버지인 전응택이 해주에서 입도하면서 맺어지는데, 그 이유는 해주 본당의 유력한 지역 유지이자 교우였던 김영석(金永錫) 아우구스투스 회장 소유의 연평도 임야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김영석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면, 그는 천주교 신자이자 해주 공소 시절 자기 집 한 채를 공소 강당으로 제공하는 한편 공소회장을 맡았고, 본당 승격 이후에도 본당 회장을 역임했던 지방의 재력가였다. 또한 해주 성당에서 유치학교(유치원)를 설립할 때 기금 헌금자로서 천주교 발전에 기여했다.

김영석은 독실한 신자였던 전응택에게 연평도 임야 감독을 대신 요청했고, 전응택은 자신의 부인, 가족(2남)과 함께 입도하여 연평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울 숭공학교 시절과 연평도 입도

한편, 전덕규가 해주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유학했던 곳은 서울 백동(栢洞, 현재 혜화동)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독일 베네딕도회 부설 실업학교인 숭공학교(崇工學校)다. 입학할 때는 1915년 이후로 추정되며, 이 당시 전덕규는 10대 후반이었다. 숭공학교는 왜 세웠고, 무엇을 가르치는 학교일까?

이 학교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도하고(崇), 일하라(工)’는 베네딕도회의 수련 모토를 실천하는 곳으로 1910년 설립하여 1921년 폐교되었다. 숭공학교의 건립 목적은 다음과 같다. ① 실업교육을 통해 가톨릭교회가 사회적 문제점을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정부(일제)와 한국 국민에게 보여준다. ② 자립적 가톨릭 수공업자 계층을 탄생시킴으로써 지금까지 가난했던 교인들을 중산층으로 발돋움하도록 만드는데 필요한 받침목이 되겠다. ③ 가톨릭 신앙의 전파에 큰 역할을 기대한다. 졸업생은 장인(匠人)으로서 서너 명의 견습공을 키우고 그중 둘셋은 틀림없이 이교도일 것이다. 이들 견습공이 종교적 환경 때문에 신자가 되면 결국 주위의 친인척도 교화시킬 수 있어 선교의 파급 효과가 클 것이다. ④ 유능한 한국인 수사(修士)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숭공학교의 학과는 크게 목공부(木工部), 철공부(鐵工部), 제차부(製車部), (옷)재단부(裁斷部), 원예부 등이 있었는데, 목공부가 특히 뛰어났다. 이 작업장에서 만드는 제대, 촛대, 세례반(洗禮盤) 등 교회용품을 제작하고 판매도 했는데, 독일 신부들은 한국인의 손재주가 뛰어나다고 감탄하였다. 교육과정은 3년이었고, 이후 이론과 실습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졸업장)을 받게 된다. 이들은 대다수가 기숙사 생활을 했다.

전덕규 역시 목공부를 졸업했으며, 아직도 그가 만든 사진 액자(틀)는 가보로 이어져 지금도 아들 댁의 한 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1920년 숭공학교를 졸업(23세)하면서 친구인 장면(張勉, 전 국무총리)과 함께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으로 자금 지원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서울에서 숭공학교의 폐교와 함께 수도회를 함경도 원산(덕원)으로 옮겼다. 전덕규는 수도회 입회를 포기하고, 미국 유학을 위해 동경으로 갔다.

그때 그의 모친이 병환 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급거 연평도로 오게 됐다. 여기서 그는 피폐한 연평도민의 삶과 너무 현대 문명과 동떨어진 상태에 있는 것에 자극받아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연평도에 정착하여 주민을 깨우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한편, 장면은 미국 유학을 마친 후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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