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신포동 춘방양복점, 배다리 상가 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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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신포동 춘방양복점, 배다리 상가 풍물
  • 김광성
  • 승인 2024.12.1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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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 - 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22) 춘방양복점과 배다리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한다. 

 

춘방양복점. 신포동(1950년대) 인천(109x51cm)
춘방양복점. 신포동(1950년대) 인천(109x51cm)

 

인천의 향토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 이미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양복을 잘 짓는다는 유명세로 서울 손님까지 불러들였다는

신포동의 ‘춘방양복점’이다.

사회 환경적인 변화가 와서 흔한 듯 보기 힘든 업종이

바로 양복점이고 양장점이다.

그 시절에는 ‘테일러’라고 쓰여 진 간판이 많았다.

맞춤 양복을 위해서는 가봉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독특한 옷 구매 과정이었는데 마치 거지 옷 같아 쓴 웃음이 난 기억이 있다.

또 ‘기지’(천의 방언)라고 하여 다양한 옷감들이

포개져 걸려 있었는데 윤이 반들반들 해서 보기가 참 좋았다.

중앙에 미 해군 모를 쓴 아이와 달구지와 인물들을

더하여 그려 보았다.

 

1950년대, 배다리 일대(93x47cm)
1950년대, 배다리 일대(93x47cm)

 

‘배다리’ 하면 ‘헌책방 골목’이 명소로 떠오른다.

이 헌책방 골목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 리어카와 노점상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19세기 말까지 이곳은 바닷물이 밀려들어 온 커다란 갯골이었다.

경인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배를 댈 수 있는 널조각을 이어놓은

다리가 있었다고 해서 토속적인 지명 ‘배다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개항 이후 급증한 일본인들에 의해 밀려난 조선인들은

배다리 일대로 몰려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선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손으로 만들어 파는 갖가지

가내 수공품이 집산되었고 오랜 세월을 두고 배다리 상가의 풍물로

자리 잡으면서 호황을 누려왔다.

배다리는 차분하게 변화하고 있다.

배다리 관통 산업도로 추진에 맞서 그 계획을 무효화 하기 위해 결성된

각 단체와 상가와 인근 주민들의 자긍심과 애착은 강력했고

끈끈한 공동체 의식은 남달랐다.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속속들이 배어 있던 만큼

배다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은 각별하다.

이들에게 애정과 찬사를 보낸다.

이제 배다리는

삶이 꿈틀거리는 참 정겹고 아늑한 분위기의 골목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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