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새우젓이 돼지갈비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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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새우젓이 돼지갈비를 만났을 때
  • 미추홀학산문화원
  • 승인 2024.08.30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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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味)추(追)홀 인천의 입맛을 찾다]
- 포구 어귀에서
(4) 이것은 젓국갈비인가? 갈비젓국인가?
인천in이 미추홀학산문화원과 함께 인천 음식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부에 이어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2부에서는 ‘인천의 입맛을 찾다’를 주제로 바다와 관련이 깊은 인천 음식의 인문지리적 정체성을 찾아나섭니다. '미추홀 살아지다' 시리즈로 출간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인천 음식이야기 기획은 미추홀학산문화원, 스토리 채집과 집필은 '학산미味담식회'(정형서 미추홀학산문화원 원장, 고재봉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강사, 김상태 (사)인천사연구소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정현숙 미추홀학산문화원 부원장, 조지형 전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임병구(사 인천교육연구소 이사장), 사진은 김상태 소장, 천영기 전 학산포럼 대표, 류제혁 '삼촌네 사진관' 대표)가 참여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젓갈을 즐기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문헌 기록을 보더라도 우리 조상들은 고대 시기부터 젓갈을 조미료로 사용하였으니, 한문으로 표현할 때 생선으로 만든 젓갈을 ()’라 하고 육고기로 만든 젓갈을 ()’라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면, 신문왕(神文王)이 왕비를 맞이할 때 납폐 품목에 ()’, 즉 젓갈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만큼,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다양한 어류를 이용한 젓갈이 발달하였는데 새우젓, 조개젓, 멸치젓, 황석어젓 등 그 종류도 실로 다양하다. 하지만 여러 젓갈 중에서도 가장 특화시켜 발달시킨 것은 단연 새우젓이다.

새우젓은 잡는 시기에 따라 오젓, 육젓, 추젓 등으로, 생새우의 품질이나 종류에 따라서도 다양한 명칭이 동원된다. 새우젓이라고 해도 다 똑같은 새우젓이 아니요, 명칭이 다른 만큼 맛도 다르고 음식에 활용하는 범위도 제각각이다. 새우젓은 그 자체로도 먹을 수 있지만, 김치나 깍두기를 담을 때, 찌개에 간을 맞출 때, 돼지고기 편육을 먹을 때도 쓰인다. 지역에 따라 평안도에서는 오이소박이를 새우젓에 찍어 먹기도 하고, 전라도에서는 상추쌈을 먹을 때 새우젓을 얹어 먹기도 한다.

새우젓을 담는 젓새우는 주로 서해안 전 지역에서 많이 잡히지만, 그중에서도 강화 앞바다에서 잡히는 젓새우는 예부터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 이유는 갯벌이 발달하여 새우의 서식 환경이 좋은 데다가 한강 물과 임진강 물이 섞여 바다로 흘러들기 때문에 젓새우가 덜 짜고 달짝지근하면서도 담백한 맛은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 새우젓은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매우 높으며, 새우젓 축제를 열 정도로 강화 특산품으로서의 위상도 지니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강화 지역의 음식에서 새우젓의 활용도가 매우 높은데, 이러한 강화 새우젓이 만들어 낸 특별한 음식이 바로 젓국갈비이다.

 

젓국갈비
젓국갈비
강화 새우젓 축제 홍보 포스터
강화 새우젓 축제 홍보 포스터

 

젓국갈비인가? 갈비젓국인가?

돼지고기와 새우젓이 좋은 음식 궁합을 자랑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바, 새우젓에는 지방과 단백질 분해효소가 포함되어 있어 돼지고기에 새우젓을 곁들여 먹으면 맛의 조화는 물론 소화력을 증진시키는 매우 합리적인 음식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 젓국갈비는 돼지갈비에 새우젓을 넣고 두부, 호박 등을 곁들여 끓여낸 맑은 탕국이다. 한 번 푹 삶은 돼지갈비에 쌀뜨물을 붓고 다른 양념 없이 새우젓으로만 간을 한다. 그렇다 보니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새우젓이 맛있어야 한다. 젓국갈비의 맛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는 단연코 새우젓인 셈이다. 젓국갈비는 돼지갈비가 자아내는 구수함에다가 새우젓이 빚어낸 시원 하고 깔끔한 맛이 어우러진 음식으로서, 강화 새우젓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오로지 강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우리나라에서 젓국갈비와 유사한 음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음식의 이름은 왜 젓국갈비인 것인가? 일반적으로 새우젓을 넣고 끓이는 음식의 경우, 특정 재료가 중심이 되고 새우젓은 간을 맞추는 보조적인 조미료의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두부를 넣고 끓이면 두부새우젓국, 애호박을 넣고 끓이면 애호박새우젓국이 된다. 말린 생선을 넣고 끓이는 경우도 이와 같아서 우럭을 넣고 끓이면 우럭젓국, 민어를 넣고 끓이면 민어젓국이 된다. 그렇다면 돼지갈비를 넣고 끓이다가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었으니 이는 응당 갈비젓국이라 해야 옳지 않은가? 왜 유독 이 경우에만 젓국갈비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음식들과는 달리, 젓국갈비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새우젓이 차지하는 중요도가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우럭이나 민어의 경우에는 손질하여 말리는 과정에서 소금을 치게 된다. 이것이 껍질이나 살과 맞닿아 아스탐산나트륨성분으로 변화를 하게 되는데, 아스탐산나트륨은 바로 조미료의 대명사 미원의 주성분이다. 소금을 친 자반고등어나 굴비가 감칠맛이 나는 것과 같은 사례다. 즉 이러한 재료들은 그 자체로 이미 감칠맛을 지니고 있는데, 우럭젓국이나 민어젓국은 여기에 새우젓을 추가하여 그 맛을 더욱 끌어올리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젓국갈비는 돼지갈비에 특별한 양념을 하지 않으므로 새우젓이 그 제맛을 내는 데 핵심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돼지갈비 이상으로 새우젓이 더 중요한 재료가 되기에, 그 음식의 명칭에서도 새우젓을 앞세워 젓 국갈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조리 방법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갈비젓국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젓국갈비의 유래는?

강화에는 제법 여러 곳의 젓국갈비 식당들이 있다. 어떤 곳은 자신들이 원조라고 홍보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젓국갈비 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음식인가? 몇몇 식당에 들어가면 젓국갈비의 유래를 설명해 놓은 곳이 있다. 그 핵심을 간추려 보면, “고려 왕실이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천도하였을 당시, 왕에게 올릴 변변한 음식이 없어 강화의 특산물을 모아 젓국갈비라는 음식을 만들었고, 이것을 왕에게 진상하였다.”는 내용이다.

 

oo 식당에 걸린 젓국갈비의 유래
oo 식당에 걸린 젓국갈비의 유래

 

이러한 설명은 해당 음식이 꽤 그럴싸한 역사적 맥락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이게 함과 동시에, 그러한 역사성을 지녔기에 그 음식이 더더욱 특별한 것처럼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기실 문헌상으로 고증하기 어려울뿐더러, 역사적인 정황과 도 거리감이 있다. 또한 설명하는 내용 중에 허점도 발견된다. 예컨대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것은 수전(水戰)에 약한 몽고군에 대항하기 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 못지않게 중요하게 고려되었던 점은 강화도가 섬이지만 농토가 비교적 넓게 발달되어 있었고 산과 바다에서 다양한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려는 물자가 풍부한 강화도를 근거로 장기전도 불사하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수도 개경에 비해서야 분명 차이가 있었겠지만, 물산이 풍부하지 못해서 젓국갈비를 올렸다는 설명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젓국갈비의 유래를 고려 왕실의 강화 천도에 기댄 설명은, 강화가 먼 옛날 고려국의 수도였다는 일종의 강화 부심에 근거한 주민들의 상상력에 의해 가공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젓국갈비의 또 다른 핵심 재료인 돼지고기가 우리의 음식 문화사에서 매우 일상적이지 않은 식재료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매우 낯설었던 식재료, ‘돼지고기

지금은 돼지고기가 보편화되고 흔한 식재료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돼지의 특성과 한반도의 기후 조건 때문이었다. 돼지는 포유류이지만 특이하게도 땀샘이 없다. 그래서 따뜻하고 습도가 높으며 수분이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름 한 철 동안에는 고온다습하지만, 겨울이 춥고 길며 1년 내내 대체로 건조한 날씨가 이어진다. 즉 돼지의 생장에 그다지 유리한 환경이 아니다. 더욱이 돼지는 잡식성이라 사람과 먹는 음식이 겹친다. 사람도 먹을 것이 부족한 마당에 돼지를 뒤룩뒤룩 살찌울 만큼의 넉넉한 먹이를 제공하기는 쉽지 않았다. 돼지고기는 소고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상하고, 상한 돼지고기에서는 독성이 나오기 때문에 상한 돼지고기를 먹으면 자칫 목숨도 잃을 수도 있다. 과거 냉장고 같은 보관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돼지고기는 유통도 보관도 쉽지 않았다. 한편 또 다른 가축인 소는 논밭에서 일을 하고 개는 집이라도 지키지만, 돼지는 오로지 먹기만 한다. 이에 역사적으로 우리는 돼지를 키우는 것도, 돼지고기를 먹는 것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도축을 통제하여 식육 문화가 위축되어 있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가면서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는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며, 돼지를 잡는 도축 기술도 매우 서툴다.’고 하였다. 조선 초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조선 사신에게 소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음식조리서인 음식디미방(안동장씨,17세기)에도 개고기 요리는 10여 가지가 나오지만 돼지고기 요리는 두 가지뿐이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조선시대 양반네들은 소고기를 즐기고 백성들은 개고기를 먹었지만, 돼지고기는 식육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도 돼지를 잡아먹는 경우는 집에서 기른 것이 아니라, 주로 산에서 사냥을 해온 멧돼지였다. 상황이 이와 같은데, 고려시대에 돼지를 잡아 갈비를 발라내고, 여기에 새우젓을 넣고 끓여 지금의 젓국갈비와 유사한 음식을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겨울에 사냥한 멧돼지를 판매하는 상인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19세기)
겨울에 사냥한 멧돼지를 판매하는 상인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19세기)

 

강화와 돼지의 새로운 만남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일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가축 사육이 장려되었지만, 그 중심에는 역시 농업에 보탬이 되는 소가 위치하고 있었다. 요즘과 같은 돼지고기 소비의 풍조는 1970년 대부터 본격화되었다는 것이 전문가 다수의 견해이다. 그 기저에는 고도 경제 성장의 시기를 맞아 국민 일반의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생긴 것이 큰 동인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돼지와 닭의 소비가 늘면서, 양돈 및 양계를 전업으로 하는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축산을 통한 수익을 위해 외국에서 단기간에 잘 성장하는 새로운 품종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와 궤를 같이하여 큰 역할을 한 것은 종교 교단들이었다.

 

강화농장에서 양돈하는 모습(1975년)
강화농장에서 양돈하는 모습(1975년)

 

일제 시대를 거쳐 한국 전쟁 이후 강화 지역에서는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 등의 교단들이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교단들은 선교 과정에서 빵 문제는 신앙 문제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지역민들의 후생(厚生)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기에, 생필품 지원이나 생활 환경 개선에 적극적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출신 선교사였던 브랜스필드(Bransfield) 신부였다. 브랜스필드 신부는 1965년 강화로 부임하여 농가 소득 증대에 앞장서서 강화읍 남산리에 그리스도 왕 농장을 세우고 미국에서 새끼를 많이 낳고 성장이 빠른 랜드 레이스(Landrace)’ 돼지 품종을 수입하여 농민들에게 분양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양돈을 통해서도 새로운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지금도 수도권에서 강화 지역은 양돈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1960~1970년대의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야 평범한 일반인들에게까지도 돼지고기의 섭취가 비로소 보편화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강화 지역에서는 비록 오래전에 존재했을지라도 꽤 긴 시간 동안 잊힐 수밖에 없었던, 돼지갈비와 새우젓의 만남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지역 축제로 인해 재탄생한 젓국갈비

현재 강화읍내에 자리 잡은 A식당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젓국갈비로 이름난 곳이다. 이 식당은 올해로 34년째 한자리에서만 운영해 왔다. 식당 입구 팻말에는 ‘30년 전통의 젓국갈비 원조임을 자랑하고 있다. 젓국갈비에 대한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젓국갈비는 오랫동안 그 명맥이 끊겼다가 2008년 강화 고려산 진달래 축제를 계기로 강화의 대표 메뉴로 부상했다는 것. 즉 강화군에서 지역 특성에 맞는 향토 음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자 하였고, 2~3곳의 식당에서 젓국갈비를 다시금 만들어 팔기 시작했지만, 당시에 손님들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강화군에서 식당 주인들을 모아 표준 레시피로 강의 및 교육을 하였는데, 옛날 자신의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일러준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고 한다. 이에 시행착오를 거쳐 가며 자신만의 맛있는 젓국 갈비를 완성하였는데, 그 관건은 역시 질 좋은 강화 새우젓과 손두부라고 한다.

젓국갈비, 갈비젓국이 언제 처음 등장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과거 어느 때 등장하였다 할지라도 지역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일반인들도 두루 즐길 수 있는 보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왕이나 돈 많은 부자가 한두 번 향유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일반적인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혔던 음식이 특별한 상황 조건과 맞물리면서 재탄생하였고, 이것이 이제는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더욱이 젓국갈비, 갈비젓국은 그 조리 방식이 유사한 사례가 없는 인천 강화만의 독특한 음식이기에 이를 즐기는 우리에게도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젓국갈비
젓국갈비
젓국갈비
젓국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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