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에게 홀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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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에게 홀리는 길
  • 양진채
  • 승인 2017.11.17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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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단편소설 <여우재로 1번길> / 김진초
<열우물경기장 주변 ⓒ김성환>

 

십정동, 열우물 동네에는 ‘여우재로’ 라는 지명이 있다. 여우재라니. 여우가 출몰하는 고개라는 건가? 아니면 그 옛날 ‘전설의 고향’처럼 고개를 넘다가 여우에게 홀리기라도 한다는 건가. 호기심이 발동한다. 짐작컨대 이 소설은 이 지명이 주는 영감에서 비롯된 창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전기사인 나는 ‘시커무죽죽한 돔형의 우주기지, 열우물경기장이 보인다. 저걸 끼고 핸들을 확 130도쯤 꺾어 우회전하고 얼마 안 가 다시 90도 좌회전을 한 다음 언덕을 오르’는 길에서 한 아이를 만난다. 아이 얘기에 앞서 먼저 이 길이 어떤 길인지 살펴보자.


 

산자락을 타고 넘는 으슥한 길이라 외지 사람들은 갑자기 들어선 시골 정취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길이었다. 그보다 먼저 이 길에 들어서면 바짝 긴장해 가좌동 진주아파트 가는 길 맞아요? 하며 확인하는 이도 많았다. 마치 내가 못된 짓을 하려 납치라도 하는 듯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여차하면 문을 열고 뛰어내릴 듯 문고리를 잡은 여자도 보았다. S자형 고개를 넘고 저만치 아파트숲이 보이면 비로소 문고리에서 손을 떼며 안도와 함께 말하곤 했다. 참 운치 있는 길이네요. 도심 속에 이런 오지를 숨겨두고 있다니 놀라워요.


 

으슥한, 오지의 느낌을 주는 길이다. 이뿐인가. 근처에는 도살장도 있다.

 

 

대로 건너편은 도살장 거리다. 길가에서 손을 흔들며 분주하게 호객하는 상인들과 달리 붉은 조명 아래 붉은 육덕으로 전시된 죄 없는 짐승들은 묵묵하다. 사지로 분해된 생존의 흔적이 나란히 갈고리에 매달려 이따금씩 흔들린다. 살아 코뚜레, 죽어 갈고리, 저들의 운명은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언젠가 도살장 상가 손님을 태워 저 안까지 들어간 적이 있다. 대로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면 얼굴전시회가 있다. 깔끔하게 면도하고 웃는 분홍 돼지머리야 재래시장에서 쉽게 보지만 육신에서 분리된 소머리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얼룩박이 젖소가 아니란 걸 증명하듯 면도도 않은 누런 털의 한우. 그들이 나란히 전시돼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 앞 고무다라에는 꿈틀대는 내장이 흘러넘쳤고. 비릿한 주검의 냄새 사이로 어느 식당에선가 끓이는 콩나물김칫국 냄새가 섞여 들었다. 도살장 사람들 비위를 달래기에 알맞은 그 냄새가 왠지 가혹하게 느껴져 콧등이 시큰했다.


 

여우재로 길에는 여우가 아니라 수많은 동물의 영혼이 묻힌 곳이라고 할까. 가보지는 않았지만 십정동에 도살장이 있다는 말은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죽은 수많은 동물의 영혼이 떠도는 곳, 인간의 육식을 위해 희생된 영혼과 오지 느낌의 으슥한 길, 그야말로 여우가 출몰할 만하지 않을까. 그 길에서 한 아이를 만난다. 주인공인 나는 아이에게 묻는다. 위험하게 왜 혼자 이 길을 다니냐고. 아이의 대답이 이상하다.


“홀리려구요.”


그러니까 소설 <여우재로 1번길>은 여우재로에서 만난 아이인 듯 아이 아닌 듯, 존재한 듯 존재하지 않은 아이에게 홀린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사인 나는 삶에 별 의욕도 없이 운전을 하며 살다가 아이를 만난다. 아이는 당돌하다. 사회적 통념으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아이이다. 이름도, 나이도 드러나지 않는다.


 

“아저씨! 나, 입이 마늘마늘해 죽겠는데 쿨피스 없어요?”

마늘마늘해는 무엇이고 다짜고짜 쿨피스는 또 뭔가? 맹랑한 계집애였다.

“너, 나 아냐?”

“아! 짱나! 이제부터 알면 되잖아요? 있어요 없어요?”

맡겨놓은 것처럼 다그치는 아이가 어이없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유! 아님 물이라도.”

계집아이는 혀를 U자로 접어 꽃잎처럼 내민 채 훅훅 숨을 내뿜으며 다그쳤다. 먹다 남은 생수병을 내밀자 총알같이 채가 입을 헹군 뒤 선심 쓰듯 말했다.

“이제 돌아서서 볼일 보세요. 나도 다 알아요. 아저씨가 왜 여기서 내렸는지.”

일수 찍듯 하루 한 번은 여길 다녀가기에 이 길에서 일어나는 일은 훤하다는 아이였다.


 

아이의 말 같기도 하고, 사춘기 청소년 말 같기도 하고, 또 노회한 어른의 말 같기도 한 말이 아이 입을 통해 나온다. 게다가 아이는 어쩐 일인지 매일 여기를 하루에 한 번씩 다녀간다고 한다. 아무런 시설도 없는 곳, 으슥하기까지 한 길을 아이는 왜 매일 오는 것일까. 이렇게 만난 아이에게 나는 홀리듯 찾아간다. 나는 생마늘을 먹는 아이를 위해 쿨피스를 들고, 아이는 생마늘을 들고 그렇게 만난다. 생마늘을 먹고, 쓰린 혀와 위를 달래기 위해 쿨피스를 먹는 아이. 그러니 아이는 허깨비가 아니다. 그런데 작가는 쓰고 있다.


 

그 아이를 증거할 길은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있을 뿐 아무런 흔적도 없다. 정말 그 아이가 여기 있었을까? 여기서 나와 함께 차에 올라타 생마늘을 까먹고 쿨피스를 나눠마셨을까? 가끔 나는 나의 기억을 의심한다. 바꿀 수 없는 건 과거뿐이라는데 부동의 과거가 나를 시험한다. 살다보면 귀신이 곡할 일을 가끔 겪는다. 이것도 그중 하나일지 모른다.

 


작가는 안 기사라는, 성씨로서의 ‘안’과 아니라는 부정의 뜻으로 ‘안’을 중의적으로 쓰고 있고, 언젠가 흔적도 없이 잃어버린 포메라니언을 등장시킨다. 여우재 근처의 열우물 경기장은 오랫동안 있던 식당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헐! 아저씨 안 기사 맞네. 아주 딱 맞는 성이야.”

그 아이가 차 안에 붙은 기사 신상표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어려서부터 안가인 내 성이 마음에 안 들었다. 뭘 해도 아닌 성, 안 선생, 안 사장, 안 기자, 안 검사……, 안 기사는 그래도 낫다. 적어도 내 꿈이 기사는 아니었으니까.

 

경비실에 강아지 실종신고를 했다. 답이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눈처럼 하얀 포메라니언은 눈처럼 가뭇없이 증발하고 말았다. 그럴 줄 알고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 걸까?

 

새로 뚫린 불편한 길에 익숙해지면서 사람들은 먼저 길을 잊고 이학식당도 잊어버릴 것이다. 가축의 골을 빼먹던 엽기적인 식당의 존재 자체가 부인될 것이다. 보이는 것만 믿는 세상, 그 아이가 보이지 않으면서 나도 때때로 그 아이의 존재를 의심한다. 의심이 몸피를 불릴 때마다 여길 찾아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안 기사인 나는 아이를 만나면서 위안을 얻는다. 차안에서 같이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도 한다. 그것이 삶에 활력을 주어 나는 오후만 되면 일부러 그길, 여우재를 찾는다. 그러나 존재하듯 존재하지 않는 아이와의 만남이 끝까지 계속 될 수는 없는 것. 아이가 사라진다.


 

“근데 너는 학원도 안 다니냐? 허구한 날 혼자 길거리나 쏘다니니 친구가 없지.”

아이가 샐쭉하더니 눈을 하얗게 뜨고 따발총처럼 쏘았다.

“그래요. 이제 알았어요? 난 학원도 안 다니고, 학교도 안 다니고, 아무데도 안 다녀요. 안 학생이고 안 사람이에요. 어쩔래요?”

짐작은 했지만 당황스러웠다. 심한 말도 아니었고 아이의 상황이 내 탓도 아니었다.

“이제 아저씨도 안 기다릴 거예요. 나한테 하나도 안 미안해도 되니까 여기 오지 마세요. 완전 쫑났으니까!”

여린 마음이 다쳐 홧김에 그런 줄 알았다. 아이가 정말 발길을 끊을 줄은 몰랐다.


 

아이는 왜 사라졌을까. 내가 이 사회의 통념을 잣대로 들이댈 때 아이는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 나는 아이와 비슷한 어떤 아이와 할머니를 태운다. 그리고 운전을 한다. 그러나 어쩐지 이상하다.

 


난데없는 풍경소리가 들린다.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풍경소리가 지이잉 지이잉 나선형 울림소리로 바뀐다. 자장가처럼 안온하다. 그런데 이 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핸들을 놓쳤는데 왜 부딪치지도 서지도 않는 걸까. 깜깜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있는 곳이 여기인지 저기인지도 모르겠다. 저 손님들을 안전하고 신속하게 배달해야 되는데 차는 움직이고 나는 정지했다. 어둠과 진행이 함께 하는 완벽한 정지다. 한없는 진행이고 한없는 정지다. 진행과 정지의 틈으로 몽정 같은 죄책감과 후련함이 등뼈를 훑고 지나간다. 이어 무섭도록 고요한 평화가 온다. 아득하다. 다만 아득할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한 이 환상적인 장면은, 내가 여기 있는지, 저기 있는지, 정지해 있는지, 진행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소설은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하는 ‘아이(여우)’를 등장시켜 사람들이 때때로 꿈꾸는 이탈, 혹은 유토피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아주 소박하게.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조금의 여유, 땀을 식혀줄 바람 같은 존재,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님을 알려주는 그 무엇.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여우재를 등장시켰다.

 

‘여우재로’는 부평구 십정동 쪽 지명이 아니라, 서구에 속한 지명이다. 열우물 경기장 역시 행정구역 상은 서구이다. 그런데 인접한 십정동의 열우물 이름을 따와 경기장을 ‘열우물 경기장’이라고 지었다. 그러니까 경기장도 서구에는 존재하지 않는 ‘열우물’ 이름을 따온 것이다. 소설을 읽다보니 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근의 열우물은 인천의 마지막 달동네이다.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열우물도 언젠가는 거기, 열우물 동네에 수많은 판자촌이 서로 어깨를 기대며 삶을 위로했다는 걸 아는 이가 드물 어 질 것이다. 동네 집들을 쓸어버리듯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아파트가 들어서면 그 어느 곳에도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소설은 ‘여우재’ 라는 장소를 빌려와 운전기사와 한 알 수 없는 아이의 만남을 통해 여우에게 홀린 것과 같은, ‘만났으나 흔적이 없는 아이’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고, 그런 일이 이 세상에 살다보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더불어 장소성에 대해 조금 더 주목하게 된다. 있었으나 없어진, 완전히 변해버려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동네.

환지통이란 말이 있다. 손이나 발이 잘리게 된 환자가 이미 없는 손과 발에서 통증을 느끼는 현상이다. 이 아이러니가 이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또 다른 맥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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