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숙이
문 성 해
나를 거쳐간 이름 중에는 유독 영숙이가 많다
중학교때 간질을 앓던
내 의자를 붙들고 안 넘어가려 애를 쓰던 내 짝 영숙이와
고등학교 때 담을 같이 쓰던 이웃집 영숙이와
그 애 집에 놀러갔다 영숙이 몰래 내 머리를 빗겨주던 그 영숙이 오빠와
결혼해서는 죽어라 일만 하다 어느 날 불쑥 절에 들어간 영숙이와
이즈음은 김포에서 내게로 두 시간이나 차를 타고 와서는 시를 배우고 가는
혈색이 안 좋은 나더러 사슴피를 마셔보라는 사슴 목장 주인인 영숙이도 있다
영숙이들은
서늘한 눈매와 다부진 입꼬리가 어딘가 닮아 있고
어느 땐가는 이들이 한 인물들 같아
내 과거를 다 안다며 불쑥불쑥 증거를 들이밀 것 같고
나는 앞으로 그 이름 앞에서는 정직해져야만 할 것 같고
한결같아야만 할 것 같고
앞으로 두어 명의 영숙이면 이번 생도 끝물이란 절망에
낯선 이들을 알기조차 꺼려진다
이 밤 영숙이는 또 어떤 이름과 밤을 나누는가
성도 얼굴도 다른 그이들이
몸에 영숙이를 담고 와서
내게 웃음과 주름을 주고 갔음을 생각하는 밤
나는 살아 영숙이와 나눈 끼니 수와
같이 보낸 밤의 수를 헤아려본다
그리고 먼 은하수 물결처럼 흘러갔을 영숙이들과
이 땅에서 내가 끝내는 못 만나고 갈 수많은 영숙이들도 생각한다
문성해 시집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에서
<시 감상>
영숙이는 참 흔한 우리나라 이름이다. 옛날에는 여자이름에 유독 ‘숙’자와 ‘순’자 그리고 ‘자’자로 끝나는 이름이 많았다. 정숙이, 경숙이, 남숙이, 진숙이... ‘영숙’이란 이름은 더 흔한 것 같았다. 남자인 내가 기억하는 이름 중에도 영숙이는 있다. 유년시절 양지바른 흙 담장 아래서 사금파리를 모아놓고 같이 놀던 어릴 적 동무 이름이 영숙이였다.
언제 이사 갔는지 유년의 소꿉장난과 흙 담장 아래 따뜻하게 비추던 햇살과 사금파리의 기억만 남겨놓고 영숙이는 떠났다. 지금도 영숙이 이름과 그 단발머리와 얼굴 윤곽은 또렷하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영숙이는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영숙이와 연애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내게 없었지만 한 반에 영숙이가 있었고 한 모임에 영숙이가 있었다.
시인 문성해는 여자로서 얼마나 많은 영숙이를 친구로, 선후배로 혹은 동료로 만났을까. 영숙이와 시인과의 관계는 곧 시인과 세상과의 관계요 인연이다. 영숙이와 함께한 삶은 곧 시인의 역사가 되고 삶의 내용이 되어 있다. 이 시에 등장한 영숙이들은 삶의 요소요소에서 시인에게 깨달음을 주고 의미를 주는 ‘환유’로서의 영숙이다.
시인이 만났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영숙이로 대변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경작하고 추억을 쌓고 영감을 얻으며 살아간다. 이 나라를 건설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며 살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이름 영숙이. 우리는 그 수많은 이름 영숙이, 정숙이, 경숙이, 철수, 정훈이, 영수들과 함께 앞으로도 이 땅의 어진 백성으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이다.
* 문성해: 1965년 경북 문경 출생. 1998년 매일신문,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자라』,『아주 친근한 소용돌이』,『입술을 건너간 이름』,『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대구시협상. 김달진문학상부문 젊은시인상, 시산맥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