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숙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눈을 감고 아득한 기억 속의 나를 떠올려본다. 귀 밑 1㎝ 단발머리 소녀. 풋내기 여고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인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을 하고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괴테는 ‘첫사랑’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날. 그 첫사랑의 날을.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시절의 그 사랑스러운 때를.
가을이면 교정의 벤치 위로 황금빛 은행잎이 마구마구 떨어졌고, 우리는 그 곳을 은행다방이라고 불렀다. 우리 학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사립학교라서 선생님들 대부분이 연세가 많으셨다.
어느 날 혜성처럼 젊은 총각 선생님이 나타나셨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택했는데 그 때 그분이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키가 훤칠하게 컸고 머리는 약간 곱슬했고,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흰 편이었다. 나이 든 선생님들 사이에서 핸섬하게 생긴 이유로 모든 여학생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나는 오로지 집과 학교와 도서관을 시계추처럼 반복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는 아래가 차가우면 안 된다고, 엄마는 손뜨개로 털바지를 떠서 교복치마 안에 입게 하셨다. 나는 감히 마음을 못 먹었는데 몇몇 용감한 아이들은 교복 윗도리를 줄여서 가슴을 강조하곤 했다.
우리들은 수업 시간에 교과서 밑에 최인호의 소설을 몰래 숨겨서 읽곤 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좋은 책을 읽으라고 권하셨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지성과 사랑」이나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같은.
내가 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이후로 나는 국문과 출신인 외삼촌의 서재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꺼내 탐독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내 수준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야한 소설도 보며 가슴 콩닥거리며 남몰래 읽곤 했다. 몇 명의 아이들은 방과 후에도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그저 사모하는 마음만 품은 못난 아이였다.
매정한 세월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나는 나이도 같고, 생일도 같은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 내세울 만한 어떤 것도 없는 남자였지만 다행이 같이 있으면 행복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겁도 없이 인생 2막을 시작했다. 남매를 낳았고 남이 겪을만한 세월을 보내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이 참 넓고도 좁다. 생각지도 못하게 선생님의 소식을 알게 되는 일이 생겼다. 낚시광인 남편이 바다낚시를 다니면서 만난 친구가 있다. 그 친구 부부도 우리와 동갑인데, 만나서 대화하던 중에 학교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알고보니 친구 처남이 바로 그 독일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잠시 우리 학교에 나오시다가 그 후에 공부를 더해서 대학교수가 되셨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 예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은 한 번 자리를 마련하자고 했으나 나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나만이 간직하고 싶은 기억 속의 선생님을 지우기 싫었다. 언제나 아름다운 청년으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