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광성보에는 신미양요 무명용사들의 처절한 함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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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광성보에는 신미양요 무명용사들의 처절한 함성이 있다
  • 전갑남 객원기자
  • 승인 2024.11.3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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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몸 바친 충혼에 절로 숙연해지다
광성보에 있는 성문 안해루.
 

강화도 광성보를 찾았다. 초겨울 광성보는 어떤 모습일까? 첫눈이 내린 뒤라 운치를 더할 것 같아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조는 강화도 해안 경계를 위해 각종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5개 진()7개 보() 그리고 50여 개의 돈대(墩臺)를 설치했다.
 
 
광성돈대, 대포 소포 불랑기가 전시되어 있다
원형 모양의 손돌목돈대. 돈대 돌틈에 자라는 단풍나무가 신기하다.
바닷가로 돌출되어 있는 용두돈대.
 

강화 광성보(廣城堡)1658(효종 9)에 만든 강화도 12개 진·보 가운데 하나다. 사적 227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를 비롯하여 광성포대가 있고, 1745년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 안해루(按海樓)를 만들었다. 안해루는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이다.

 

광성보와 신미양요
1871(고종 8) 광성보는 미국과 치열한 격전을 치른 신미양요의 아픈 역사가 있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항의와 조선의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다. 한미 양국이 역사상 유일하게 무력으로 충돌한 사례이기도 하다.
당시 초지진,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무기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조선군을 초토화시켰다. 어재연 장군이 이끈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맞섰으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패배했다.
당시 미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처절하게 저항하는 조선군의 용맹에 미군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조선 군사들은 총을 맞으면 기어가고, 다리를 쏘면 팔로 기어가고 마지막에는 칼을 입으로 물고 미군한테 대들었으니 말이다. 군영의 수자기(帥字旗) 아래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이를 본 미군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조선군은 군사적으로 약했지만, 정신적으로 얼마나 용맹스러운 존재인가를 느끼고, 미군은 하루 만에 퇴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고 자기들 보고서에 남겼다.
 
당시 참전했던 함장 슐레이(W.S.Schley) 대령은 이렇게 회고했다.
 
'창과 칼이 부러진 자는 돌을 던지거나 흙을 뿌려 저항한다. 이토록 처참하고 무섭도록 구슬픈 전투는 처음이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장렬하게 죽은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밝힌 것을 보면 신미양요의 진실이 나타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처절한 전투에서 240여명이 전사하고, 100여명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항복하여 포로 잡힌 수는 불과 2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하는 데 그쳤다.
 
 
신미양요 때 빼앗긴 수자기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안내문.
 

마지막까지 광성보를 지켰던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는 사라지고, 깃발 아래 모인 병사들도 흩어지고 사라진 것이다.

광성보에는 신미양요 때 순절한 지휘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있다. 그리고 언덕 아래 장렬히 순국한 조선군의 시신을 화장하여 7~8명씩 합장한 신미순의총이 자리하고 있다.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의 충혼을 기리는 쌍충비ㅅ각.
신미양요 때 순국한 이름없는 용사들이 묻혀있는 신미순의총.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치겠다는 결의로 싸워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간 용사들의 충혼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산책하기 좋은 역사의 현장, 광성보
초겨울이지만 광성보는 산책하기에 참 좋다. 아름드리 소나무를 비롯한 울창한 수목으로 잘 가꿔졌다.
 
 
손돌목돈대를 끼고 낙엽이 수북이 쌓여간다.
떨어진 낙엽도 아름답다.
 

잎을 다 떨어내지 않은 빨간 단풍나무는 눈 쌓인 유적지를 아름답게 하였다. 철을 잃은 듯 피어난 철쭉을 보면 지금 봄인가 착각이 들었다. 수북이 쌓여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낙엽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바다 쪽으로 길게 나 있는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해안풍경은 막힘이 없다. 손돌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대의 바다 물살은 유난히 세차게 흐른다.
어느 왕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던 중 뱃길을 안내하다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뱃사공 손돌! 그의 원혼이 부는 바람인가? 용머리 모양의 돈대를 휘감는 바람이 거세다.
 
광성보 용두돈대에 나부끼는 깃발.
 

치열한 전쟁을 치른 용두돈대 위에 깃발이 힘차게 펄럭인다. 그리고 수자기에 대한 설명 QR코드 안내문이 눈에 띈다.

수자기는 조선시대 각 군영에 걸었던 대장기다. 신미양요 때 어재연 장군도 가로, 세로 4m가 넘는 수자기를 앞세워 용감히 싸웠다.
당시 수자기는 전쟁이 끝나자, 미군은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그들은 미군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가 136년 지난 2007년에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올 3월 대여 기간이 끝나 다시 회수해 갔다고 한다. 수자기는 단순한 깃발을 넘어 우리의 자존심이기도 한데, 참으로 안타깝다. 영구 반환을 위한 다각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강화해협 손돌목에는 거센 물결이 흐르고 있다.
 

돈대 앞 염하는 오늘도 아픈 역사를 품은 채 유유히 흐르고 있다. 굽이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비껴갈 수 없었던 무명용사들의 소리 없는 함성도 바다 물소리에 섞여 들리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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