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법리, 소신 있는 판결 - 임규운 법원장
상태바
명확한 법리, 소신 있는 판결 - 임규운 법원장
  • 김윤식
  • 승인 2024.05.23 13: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중제고 사람들]
(38) 임규운 법원장 - 김윤식 / 시인 ·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
임규운 법원장. 1991년 2월 서울고등법원장 취임식.<br>
임규운 법원장. 1991년 2월 서울고등법원장 취임식.

 

- 기록이 말하는 소신 있는 판결

과거 6년제 인천중학교 출신으로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낸 임규운(林圭雲, 1933~ ) 법원장은 재조(在曹) 시절, 전향적(前向的)이고 소신 있는 판결 기록을 남긴 판사로 유명하다. 그가 판사로서 지내온 시대가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더욱 그 판결의 의미가 크다고 할 것이다.

먼저 1969년 9월 19일에 있었던 ‘동국대학교 학생 데모 선동, 무죄 판결’부터 살펴보자. 임 법원장은 당시 이 데모 선동 사건 선고 공판에서, “3선 개헌을 반대한 동국대학교 학생들의 데모가 비록 격렬한 것이었다고 하나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시, 동국대생들의 데모를 선동하고, 유발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규찬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실제 조규찬이라는 인물은 “동국대학교 데모 학생 1명이 경찰에 맞아 죽었다더라”는 허위 사실을 발설, 이에 자극받은 동국대학교 학생 1천여 명이 ’살인 경찰 색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조 피고인의 선동이나 그로 인한 동대생들의 데모가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점을 임규운 법원장은 명확히 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시절이 어떤 시절이었나. 이렇게 임규운 법원장은 늘 철두철미 명확한 법리와 당당한 소신으로 정의롭고 뚝심 있는 판결을 내려온 것이었다.

또 한 가지, 1972년, 임 법원장이 서울고등법원 민사4부 배석판사로 재임하던 시절의 재판 사례도 보자. 임규운 법원장은 이해 9월 7일, 경상남도 울산시 야음동 68번지 박이준이란 사람이 한국전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 재판에서 ‘공해 소송에서 피해자 측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는 판결에 배석판사로 참여했던 것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해 거대 기관이나 기업을 상대로 ‘약자’라고 할 수 있는 민간인 원고(原告) 개인의 답답한 입장을 현실에 적합하게 대변한 판시였다는 말이다. 당시 판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해 사건에 있어서는 피해자가 인과관계 조사를 위한 막대한 비용을 감당해 낼수 없고 가해자인 기업 측은 기업 기술의 비공개 등을 이유로 조사를 거부하기 일쑤며 공해 원인에 대한 명확한 탐지 기술이 아직 개발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일반손해배상청구소송처럼 원고 측에서 인과관계의 엄정한 자연 과학적인 입증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 소송의 내용은 2천 평 과수원의 배, 사과나무 등 304그루의 과수가 한전 울산발전소에서 배출되는 아황산가스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원고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1심에서 승소했고, 2심인 서울고법에서도 원고에게 7백71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물론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남아 있었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이 판결에 대해 ‘공해 소송에서 피해자 측의 입증책임(立證責任)을 완화한 서울민사지법의 이론(理論)을 지지한 것으로, 이것이 대법원에서 채택된다면 피해를 보상받을 길이 쉽게 트이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철저한 증거 채택 원칙에 따른 판결로는 1978년 11월 4일 서울 남대문시장 실화(失火) 사건 항소심 재판이 있다. 이것은 임 법원장이 서울형사지법 항소7부 부장판사로 재직할 때의 판결이었다.

결론부터 말해, 남대문 중앙시장 상가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2천7백24평 건물 1동을 전소시켜 당시 18억 원의 피해를 낸 화재사건의 실화범(失火犯)으로 구속 기소된 김학동 피고인에 대해 1심의 금고(禁錮) 1년 선고를 깨고 무죄 판결을 내린 사실이다.

여기서 임규운 법원장은 ‘피고인이 당시 어두운 자기 점포에 들어가 책상 서랍에 두었던 돈을 꺼내려고 성냥불을 켰다가 엉겁결에 불을 떨어뜨려 화재를 냈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법정에서의 임규운 법원장
법정에서의 임규운 법원장
임규운 법원장 휘호(공직에 있는 아들에게 주는 글)
임규운 법원장 휘호(공직에 있는 아들에게 주는 글)

 

임규운 법원장이 내린 우리나라 사법사상 효시가 될 가장 전향적인 판결은 다름 아닌 출판물 저작권 관련 판결이었다.

 

원작자의 허락을 받지 않거나 판권계약을 하지 않은 외국 서적의 번역물이라도 제2의 창작행위로 인정해 이를 표절하여 출판해서는 안 된다.

 

이 판결은 임 법원장이 서울민사지방법원 합의1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85년 5월 4일에 이루어졌다. 실제 두 출판사의 번역문의 문구나 각주까지 동일해 표절을 인정하며 저작권 침해로 판결한 것이었다. 이 판결은 번역물에 대해서 처음으로 저작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사건 요지는, 도서출판 석탑이 인도의 수상이었던 네루가 1930년부터 3년간 옥중에서 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낸 편지 196통을 번역해 1982년 7월 10일 『세계사 편력』이라는 책으로 출간했으나, 1984년 딸 인디라 간디가 피살된 후 다른 출판사인 세경서원이 같은 내용을 『혁명의 세계사』라는 책으로 번역해 발간하자 도서출판 석탑이 표절을 이유로 발매, 반포 등 일체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며 가처분 신청을 냈던 내용이었다.

정당(政黨) 행위와 관련한 판결 역시도 전진적이면서 ‘불공정에 대한 법치’의 정당성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임 법원장은 1986년 2월 8일에 열린 ‘신민당 사고지구당 확인 결정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에서 “사고지구당의 판정은 원래 정당 내부의 자율권에 속한다고 할 것이나 자율권의 행사가 당헌 당규상의 절차 규정에 위배돼 이루어지거나 또는 그 요건이 흠결되었음에도 요건이 구비된 양 현저히 불공정한 처분을 했을 때는 자율권의 남용으로 그 판정의 당부(當否)를 사법적 심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서울민사지방법원장 시절(앞줄 가운데)
서울민사지방법원장 시절(앞줄 가운데)

 

- 서민의 손을 들어준 획기적 판결

이 같은 세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여러 판결 가운데는 또 한 가지 재산권 침해를 당한 답답한 서민들의 손을 들어준 판결도 있다. 이 역시 임규운 법원장이 서울민사지방법원 합의16부 재판장 시절의 일이다. 이 재판 결과는 당시 동아일보 1986년 3월 20일 자에 보도되어 있다.

이해 3월 20일 서울 강서구 신정동 거주 신순복이라는 사람 외에 서울 목동 신시가지 개발지 토지주 16명이 서울시를 상대로 낸 공사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서울시는 중앙토지수용위원회가 정한 보상금 지급 시한인 오는 4월 13일까지 공사를 중지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서울시가 보상 합의가 안 된 상태에서 토지수용 절차도 거치지 않고 지난 1983년 11월부터 일방적으로 아파트 공사를 강행한 것은 불법적인 재산권 침해’라는 토지주들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판결도 당시로서는 크게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외에도 그 자세한 내용을 일일이 여기에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임 법원장은 당시 떠들썩했던 명성그룹 토지 사건 등 여러 사건들을 처결함으로써 법조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인천 출신 법조인(뒷줄 맨 왼쪽이 임규운)
인천 출신 법조인(뒷줄 맨 왼쪽이 임규운)

 

임규운 법원장이 법조(法曹)에 몸을 담은 것은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 2년 뒤인 1959년 제1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면서였다. 실제 1차 필기 고사 합격은 1958년이었으나 이듬해 1959년에 최종 합격했다.

여담이지만 1958년 합격자 중에는 윤관(尹錧) 전 대법원장, 정해창(丁海昌) 전 법무부장관, 장덕진(張德鎭) 전 농수산부장 및 대한축구협회 회장, 정치인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한동(李漢東) 전 국무총리 등의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임 법원장은 1961년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63년 8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판사로 임용되어 법조인의 길을 걷는다. 그 후 서울지방법원 수원지원,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부장판사에 승진한 후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민사지방법원 등에서 재판장으로 근무한다. 1981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에 임명되어서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겸직했으며, 이후 법원행정처 차장, 서울민사지방법원 원장, 서울고등법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임규운 서울고등법원장 임명(1991년 1월 30일 경향신문)
임규운 서울고등법원장 임명(1991년 1월 30일 경향신문)

 

- 집중심리제의 도입

임 법원장이 남긴 재판 운영상 큰 공적이라면 집중심리제(集中審理制)의 도입이라고 할 것이다. 집중심리제는 공판의 심리를 집중적으로 실시해 재판 일정을 단축해서 최대한 빨리 결론을 내는 제도이다. 하나의 사건이 끝날 때까지 공판의 심리(審理)를 가능한 한 연이어 계속적, 집중적으로 함으로써 신속하게 재판을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1988년 7월 20일, 임 법원장이 서울민사지방원장에 취임한 후 이 제도를 도입, 시행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전진적이고 합리적인 자세로 임 법원장은 사법행정, 제도개선 등에 법원 내 최고 브레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특히 법원 운용 효율화와 늘어나는 사법 수요에 대비해 서초동 법원 청사 이전 계획을 입안한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다.

임 법원장이 1988년, 대법관 물망에 올랐던 사실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고등고시 11회 기수 중 선두 주자였던 임규운 법원장은 ‘1980년대 이후 법원행정처 차장을 지내고도 대법관에 임명되지 않은 유일한 법관’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마지막 근무지였던 서울고등법원. 1990년에 서울고등법원장에 임명되어 1992년 8월, 퇴임할 때 소속 법관들로부터 "법관의 귀감으로 오랜 기간 봉직하시다 물러나시는 임규운 원장님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액자를 후배들로부터 헌정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의 법관 생활과 그의 인품, 자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액자는 그가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할 때 벽에 걸어놓았었다고 한다.

 

임규운 언론중재위원장 (1985년 4월 8일 경향신문)
임규운 언론중재위원장 (1985년 4월 8일 경향신문)

 

임 법원장은 30년 판사로서 법원에 근무 동안 재판관 이외에 1985년 언론중재위원장을 비롯해 헌정제도연구위원,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9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의 직책도 맡아 수행했다. 그리고 법복을 벗은 1992년에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소재 한양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생활을 했다. 2000년에는 서울고등법원 민사조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 소탈한 김포 출신, 집념과 노력으로 법관의 꿈을 성취하다

임 법원장은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가 고향이다. 고촌초등학교를 나와 당시 6년제이던 인천중학교에 진학했는데, 김포에서 가까운 서울 쪽 학교로 가려다가 누나가 사는 인천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임 법원장은 중학 입학 때부터 우수한 학업성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중학교 입학 후 치른 1학기 첫 중간고사에서 반(班) 석차 2등을 차지했던 것이다.

시골 출신으로 도시 출신 동급생들을 제치고 이처럼 우수 학생의 자질을 보이면서 당시 길영희(吉瑛羲) 교장 선생의 눈에 띄어, 오며 가며 교장 선생과 마주칠 때마다 길(吉) 교장 선생께서 한결같이 임 법원장 집안과 홀어머니의 평안을 물으시며 격려해주셨다는 일화가 있다.

 

고촌초등학교 5학년 때 부친이 간경화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다가 퇴원하여 돌아가신 것을 보았던 임규운은 의사가 될 꿈을 꾸었으나 인천중학교 재학 중에 인천재판소 밑에 살던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동리 사람들이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등의 위반으로 인천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것을 보고 억울한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졌으며 은사였던 이인수(李仁洙) 선생님이 알려준 논어(論語)에 나오는 기소불욕(己所不慾)이면 물시어인(勿施於人)이란 글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인중 시절_01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인중 때의 임규운

 

김포신문 2005년 6월 15일 자에 게재된 임규운 원장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이다. 이 기사에서 임 법원장이 법관의 길을 가게 된, 실로 우연스러우면서도 결정적이었던 계기를 읽을 수 있다. 곧 인천중학교 입학과 중구 내동 인천법원 인근에 살던 동급생의 집 방문,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재판 현장을 보게 되면서 급기야 법관의 꿈을 가지게 되었고, 끝내 그 꿈을 성취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글은 사람의 일생은 어떤 계기에 당(當)해 그것을 얼마만큼의 집념과 노력으로 밀고 나가는가 하는 데 달렸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교훈이랄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본인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 외에도, 필경에는 길영희 교장 선생, 이인수 선생 같은 일생의 은인, 은사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연마하는 조건도 있어야 한다.

평생 온화한 성품으로 기소불욕(己所不慾) 물시어인(勿施於人)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온 90대 노 법조인. 임 법원장은 고향을 떠올리면 김포시 고촌면 수로(水路)를 말한다. 당시 물이 많아 여름이면 수영하고, 고기 잡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고…. 그리고 중학교 시절에는 주말이면 김포 집으로 달려가 홀어머니를 도와 소에게 꼴을 먹이고…. 스스로 낚시광으로 밤낚시가 특기라고 말하는 임 법원장의 소탈함은 물 많은 농지, 인심 풍요로운 김포 출신이어서였을 것이다.

작은 체구이나 온화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러면서도 빈틈없는 외유내강형의 임 법원장은 어느 한순간에도, 또 그 무엇에도 구애(拘碍)됨이 없었고, 더불어 편벽(偏僻)함이 없었다. 그것은 항상 필묵(筆墨)을 곁에 두어 벗하면서 스스로 심성을 갈고 닦은 까닭일 것이다. 1977년~78년 법원서도회(法院書道會) 일원으로 법관들 서도 전시회에 참여해 활동했던 기록이 그 한 증표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