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후가 더욱 빛나는 공직자, 윤대희 前 국무조정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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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가 더욱 빛나는 공직자, 윤대희 前 국무조정실장
  • 이용식
  • 승인 2024.07.01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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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44)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 - 이용식 / 전 인천연구원장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

 

 

“직접 대해보면 금방 알게 된다. 그가 얼마나 바르게 성심을 다해 ‘성의껏’ 살아왔는지를 - - -. 어린 시절을 거쳐 청소년기, 대학 생활, 그리고 이후의 사회인으로 지낸 삶의 긴 여정을 일관되게 그는 정말로 열심히 성의를 다해 허투루 보낸 시간 없이 ‘알뜰하게’ 살아왔다. 그것도 자신이 지키려 했던 가치와 원칙을 깨지 않고, 그리고 때로는 새로운 깨달음을 더해 더욱 바르게 성장해가면서.”

그와의 직간접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윤대희 前 국무조정실장(제고 12회, 前 신용보증기금이사장)에 대한 필자의 느낌이다. 우선 드러난 사실만을 바탕으로 그의 이력을 구성해보자.

그는 1949년 인천 남구(現 미추홀구) 숭의동 115번지에서 태어나 숭의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행정고시 17회에 합격해 공직에 들어섰다. 재정경제부 기획관리실장 등 요직을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국무조정실장을 마지막으로 정부에서 나와 가천대 석좌교수를 지내다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을 연임(2018~2022)했다. 미국 캔사스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경희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제고 졸업식(가운데)

 

대표적인 출향인사들을 기획 취재한 한 지역언론은 그를 기획연재의 취재 대상 1호로 올린 사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세상이 그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 됨됨이를 판단하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은 인천 출신 관료 중 장관까지 오른 첫 인물이다. 1949년 숭의동 출생으로 숭의초, 인천중, 제물포고를 졸업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은행(현 하나은행) 신용조사과 근무 중 뒤늦게 고시 공부를 시작, 1975년 행정고시(17회)로 입직해 30년이 넘는 기간 경제관료로 일했다. 경제 전반에 대한 지식과 다자간 통상 경험이 풍부해  '누가 정권을 잡았어도 중용됐을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청와대 경제정책수석 시절 한미 FTA 실무 협상을 주도했다. 2018년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임명됐을 때 '올드보이 귀환'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그는 신보 역할 확대, 코로나19 신속 대응 공로를 인정받아 3년 임기를 채우고 1년을 연임한 뒤 지난해 8월 퇴임했다. 4년 전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인 노조는 떠나는 이사장에게 "신보에 보여준 남다른 애정과 철학에 감사드린다"며 감사패를 전했다. 반대파를 포용하고 설득하는 유연함과 추진력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100% 자기 글'을 쓰는 몇 안 되는 공직자 중 한 명이다. 몸소 겪은 시간을 그저 흘려버리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들려줄 줄 아는 윤 전 장관은 인천을 "근본적으로 저를 키워준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I’m from 인천>, 출향인사 기획취재, 경인일보, 2023. 5. 11.)

 

IF 2018 스타트업 거리축제에 방문한 윤대희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왼쪽에서 두 번째, 2018.9.30)_출처 금융위원회 블로그
IF 2018 스타트업 거리축제에 방문한 윤대희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왼쪽에서 두 번째, 2018.9.30)_출처 금융위원회 블로그

 

학생운동 출신의 은행원, 공무원의 길로

그는 숭의동 115번지(1980년 구획정리사업으로 숭의동 83의 17로 지번이 바뀌었다)에서 태어나 자랐다. 4남매 중 막내로 그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 충북 괴산에서 올라온 부모님은 힘겹게 살면서도 아이들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더욱 힘겹게 자식들을 키웠다.

윤대희 전 장관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세상을 대하는 자세와 어머니의 그에 대한 기대 등이 특히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가 방앗간 비슷하게 떡 도매를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공꼬(공짜의 사투리)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요. 대학 시절 이를 'windfall profit'(횡재)이라는 표현으로 바꿔 지금껏 경계 대상 1호로 삼고 있어요. 그간 여러 인사 검증을 별 탈 없이 통과하고 제겐 과분한 자리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의 '조기 교육' 덕분이라고 할 수 있죠."(경인일보, 2023. 11. 2.)

 

그가 공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어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기대를 알게 되면서다. 그는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이후 '한국사회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 재학 시절 내내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글을 쓰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대학 생활 내내 세상을 옳게 바라보기 위해 공부했고 이를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꿈 같은 바람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그의 ‘결단’이 그를 고위 공무원으로 나서게 했다.

“대학 다닐 때 학생운동 좀 하고 그랬죠. 그래서 그때는 공무원 되겠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아무 대책 없이 졸업하고 은행을 들어갔던 것인데,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의 바람을 확인하고는 공무원이 됐죠.”

 

은행을 열심히 다니고 있던 어느 날, 인천 큰형님 댁에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어머니와 솔직한 얘기를 나눈 기억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는 늘 바쁘고 홀로 자식들을 키워내느라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어머니는 내가 열 살이 되는 해에 아버지와 사별하셨다. 그 후론 홀로 세 아들과 딸 하나를 키워내며 온갖 고생을 다하셨다. (--중략--) 어머니는 충청도 괴산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당시 일본 고등문관 시험을 합격한 사람이 보은군수로 부임하는 것을 보고 참 부러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중략--) 군사독재 정부에 대항하며 학생운동에 관심이 컸던 나로서는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마치 권력에 굴복하며 정권에 부역하는 행위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는 고민이 깊어졌다. (윤대희, <한미 FTA의 숨은 주역, 플랫폼 금융의 전도사가 되다>, 125~126쪽)

 

야구는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좋아하고 또 잘해서가 아니라 매사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고 삶을 이끌어가는 데 일종의 견인차가 되었다. ‘팀워크’가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라는 점, ‘전력투구 전력질주’는 선수의 기본자세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팀워크’를 우선해야 하고 팀원으로서 전력을 다해 소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야구를 통해 체득했고, 그는 이러한 ‘야구 철학’을 삶의 기본자세로 평생 견지하려 했다.

 

'야구'를 빼놓고 윤대희라는 인물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구도(球都) 인천'에서 시작된 야구와의 인연은 단지 취미 활동에 그치지 않고 그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숭의초등학교 야구부에서 처음 글러브를 잡은 이후 어느 자리에 가서도 야구와 연결된 끈을 놓지 않았다. (--중략--) 윤 전 장관은 서울대 상대 야구부 활동을 거쳐 경제기획원 재직 시절 야구부 '돌핀스'에서 창단 멤버, 주장으로 뛰었고 감독까지 맡았다. 그는 야구에서 "개인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팀워크가 안 되면 결코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체화했다. 조화, 균형, 협력의 틀에서 적재적소의 자원 배치를 통해 성과를 내는 리더의 자질을 갖추는 데 그의 오랜 야구 사랑이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경인일보, 2023. 5. 11.)

 

경제기획원(EPB) 야구부 주장 윤대희(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1994.10.23)
경제기획원(EPB) 야구부 주장 윤대희(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1994.10.23)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공무원이 된 후 그는 공직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과 자세, 원칙들을 세우고 성실하게 이를 지켜가기로 했다. ‘공꺼를 바라지 않는다.’,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경구로 대표되는 그의 실용적인 모토는 그가 제일 먼저 체득해서 실천한 공직 수행 자세이자 원칙이었다.

앞서 얘기한 대로 ‘공꺼’는 어머니에게서, 그리고 ‘썩은 고기’는 존경하는 선배 공무원으로부터 진작부터 몸과 마음으로 전수받은 것이었다.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경구를 그는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으로 4년간 재직하는 동안 늘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청렴’을 강조하는 당부였고, 이는 신보 내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런 모토는 모교인 인중·제고의 학훈인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과 상통하는 것이죠. 어릴 때부터 그런 교육을 받은 것인데, 경제기획원에서 근무할 때 다시 그 생각을 굳히게 되었어요. 당시 우리 사회는 굉장히 부패한 사회였거든요. 그때는 부패 척결이 아니라 부조리 척결이라는 표어를 내걸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공무원들한테 정신교육하고 그랬는데, 그때 남덕우 장관이 교육 시간 말미에 한 말씀이 그거였어요.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때 그 말이 확 저한테 와서 앞으로의 공직생활 지침으로 삼기로 했어요.”

공직생활 내내 그는 엄청 바빴다. 본래의 성실함과 책임감이 더해져 제대로 일을 처리하고 정책을 세우자니 하루도 옳게 쉴 날이 없을 정도였다. 주요 업무가 있는 부서로 발령이 났고, 고위직이 되었을 때는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정책의 기획과 결정, 추진이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바꿔 얘기하면, 그의 탁월한 능력과 책임감이 인정받았고 그때마다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국무조정실장 임명장 수여 후(2007.8.9)_출처 노무현 사료관
국무조정실장 임명장 수여 후(2007.8.9)_출처 노무현 사료관

 

지난한 협상, 한미FTA을 체결하다

정부의 정책 결정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굵직한 몇몇 정책의 기획, 추진에 큰 역할을 했다. 그중에서도 그에게 제일 기억에 남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한미FTA 협정 체결 과정에서 그가 수행했던 막중한 역할이었다.

 

미중의 경제패권 갈등과 글로벌 경제 블록화로 무역·수출 환경이 급변하는 걸 지켜보는 그의 심정은 남다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기간 중 경제수석으로 대통령을 보좌하면서 협상 전 과정에 관여했다. 최근 발간된 ‘코리아 미러클’ 10권의 주제도 마침 ‘한미FTA’다. 그새 중국은 많은 분야에서 한국을 따라잡아 대중무역이 적자로 돌아섰다. 반면 올해 2월 이후 3개월째 한국의 대미수출은 대중수출을 넘어섰다. 한미FTA가 없었다면 우리 경제는 지금 훨씬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월요초대석/한국의 기적과 14년간 씨름해온 윤대희 전 경제수석, 동아일보, 2024. 5. 6.)

 

한미 FTA 협상은 지난한 과정이었고 그에겐 매우 고된 일이었지만 그 자신은 관료로서는 가장 보람 있고 또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 할 수 있었다는 게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그때 한미 FTA를 했기 때문에 현재 우리 경제가 개방되고 선진화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고, 힘들었지만 그런 결단의 과정에 자신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때 만일 못 했으면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당시 미국과 FTA를 하고 싶어 하는 나라가 25개 나라였어요. 근데 그중에 미국이 한국을 선택했죠. 지정학적 요인도 컸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에서 미국이 자신의 위상을 계속 가지려면 한국하고의 협력을 가장 우선시해야 했고, 우리 입장에서는 이제 미국 시장의 점유율이 많이 떨어지고 이런 시기였고 우리가 경제 제도를 글로벌한 수준으로 가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선진화가 쉽지 않다는 판단이었죠.”

그런데 미국과의 FTA는 굉장히 방대한 협정이었다. 한꺼번에 타결이 되어야 하는 즉 하나라도 합의가 안 되면 안 되는 협정이었다. 반대 여론이 비등했고, 찬반의 양태가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것이었다. 참여정부 지지층은 오히려 반대했고 반대층은 찬성하는 상황이었다. 정치적 고려를 했다면 협정 타결은 요원한 듯했지만, 대통령의 확고한 국정철학과 의지를 바탕으로 참모들의 노력이 합해져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

“당시 여론은 첨예하게 맞섰습니다. 너무 격렬해서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참모들의 의견도 있었죠. 그러나 대통령의 철학과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모든 개방이 성공할 수는 없지만, 성공하려면 개방으로 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중에는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서 이른바 음모론이 퍼지기도 했죠. '참여정부는 한미 FTA 타결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고, 차기 대선에 유리하게 활용할 것'이라는 주장이었죠. 제가 시중에 퍼진 얘기들을 가감 없이 보고하자 노 대통령은 "일국의 대통령이 중요한 통상 협상을 정파에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며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며 반문했습니다. 면구했던 기억이죠.”

 

대통령 특사로 과태말라 대통령을 예방한 윤대희 국무조정실장(2008.1.13)_출처 외교부 홈페이지
대통령 특사로 과태말라 대통령을 예방한 윤대희 국무조정실장(2008.1.13)_출처 외교부 홈페이지

 

요즘 우리 정부의 핵심 아젠다인 ‘저출산 고령화 대책’을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론화한 게 그였다.

“2000년대 초반쯤에 국민생활국장을 맡고는 복지분야 업무 보고를 받는데, 보고자료에 출산율이 1.3이라고 적혀있는 거예요. 그래서 당연히 미스타이핑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번 파악해 달라고 했더니 담당 사무관이 확인하는데 맞는 숫자라는 거에요. 진짜 깜짝 놀라서 그러면 70년대부터 출산율을 뽑아달라 해서 보았더니 우리나라 대체 출산율이 붕괴된 게 1983년도였죠. 공직자로서 이럴 때까지 무심했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정부 고위공직자로서 크게 충격받은 그는 KDI(한국개발연구원) 박사들과 함께 논의하면서 공청회를 통해 이슈화하였다. 그 결과를 들고 장관 보고에 이어 청와대 보고도 하면서 정부의 주요 의제로 만들어갔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올렸고, 거기서 고령화 문제도 함께 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저출산 고령화’가 주요 의제로 채택되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 도입도 그가 청와대 경제수석 시절부터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논의하면서 국무조정실장 때 마무리한 정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신이 추진했던 정책을 잘 마무리하고 싶은 열망이 크셨고 그래서 저를 정부의 정책 조정 책임장관인 국무조정실장에 임명하셨던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때 노무현 대통령께서 가장 역점으로 추진하던 사업 중의 하나가 노인 장기요양보험제 도입이었어요.”

이 제도의 도입을 두고 정부 내 의견이 갈렸다. 복지부서가 도입을 추진했는데, 경제부서 중심으로는 국가재정 부담을 근거로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청와대 참모들도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주류였다. “저도 그런 입장이었는데, 막바지에 노무현 대통령께서 저를 보시면서 ‘이번 만큼은 경제 쪽에서 조금 양보를 해주시죠. 나 같은 대통령일 때 이걸 도입을 안 하면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였어요. 참 쉽지 않은 결정을 대통령께서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노무현 대통령 때 국회 입법 과정을 거치고 시행은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했죠. 저는 지금도 그때 안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해요.”

 

공직에서 물러나 더욱 빛났던 소명의식

공직에서 물러나 정부를 떠난 이후 그의 활동은 더욱 빛난다. 공직자로서의 책임감이 퇴임 후 민간인 신분으로도 계속 이어졌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그의 노력이 계속된 것이다.

 

'성공한 공직자 윤대희'를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몇 차례 만나고 그를 알아갈수록 장관에 오르기 전까지의 공직 이력보다 그 후 민간 경력이 그를 온전히 더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인일보, 2023. 5. 11.)

 

그가 정부의 KSP(Knowledge Sharing Program) 사업에 참여하게 된 건 공직 후배의 요청이 발단이 되었다. 기획재정부 국장의 간청(?)에 의해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데, 예의 그 책임감과 소명 의식이 발휘되면서 오랜 기간 그 활동을 이어갔다. 우리의 경제성장 경험과 축적된 지식을 저개발국가와 공유하는 사업에 수석 고문으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전 세계 개발도상국을 돌며 한국의 정책과 때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눴다. 그는 지금도 이러한 일을 통해 공직자로서의 과거 역할보다 더 큰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2009년 창립부터 ‘대교단(대한민국 교육봉사단)’의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초창기부터 오랜 후원자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가 사회로부터 모든 걸 받기만 했는데 이제 뭔가 되돌려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데서 큰 보람을 느끼죠.” 소개 팜플렛에서 ‘대교단은 우수한 대학생을 선발하여 빈민 지역 공립학교 교사로 2년간 봉사하도록 하는 미국 사회교육운동 TFA(Teach For America)에서 착안한 한국형 청소년 교육 봉사 운동’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가나 아크라에서 개최된 2010 가나 LSP 연구결과 최종보고회에 참석한 경제개발경험 지식 공유사업(KSP) 윤대희 단장(앞줄 왼쪽)
가나 아크라에서 개최된 2010 가나 LSP 연구결과 최종보고회에 참석한 경제개발경험 지식 공유사업(KSP) 윤대희 단장(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출처 한국개발전략연구소(KDS) 홈페이지

 

구체적 프로그램명은 '씨드스쿨(SeedSchool)'이라 하는데, ‘씨드스쿨은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 환경의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재능을 발견하여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꽃피워 나가도록 돕는 진료교육 프로그램’이라 설명하고 있다.

씨드스쿨은 자체 연구개발한 커리큘럼과 교재로 취약지역의 중학교에서 방과후 학교 형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1:1 멘토링 시스템을 통해 교육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씨드스쿨은 지금까지 총 26개 중학교에서 2천7백여 명의 씨드를 배출하였고, 현재 서울, 경기, 강원, 경상도 지역 내 10개 중학교 및 지역센터에서 씨드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경제부처 출신 관료들의 모임인 ‘재경회’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함께 추진한 코리안 미러클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각별하다. 2011년부터 편찬위원으로 참여하여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코리안 미러클> 1편을 시작으로 최근 10편까지 이 사업의 기획 및 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코리안 미러클’이란 제목도 그가 제안해서 채택되었다. 경제 관료와 언론인, 전문가 증언을 남긴 기록물로 이들의 성공과 실패, 갈등과 고뇌의 경험이 흥미진진하다.

 

코리안 미러클 8 발간보고회(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2024.4.25)_출처 한국개발연구원(KDI) 홈페이지

 

“2009년도쯤에 남덕우 총리가 작고하셨어요. 그때 진념 총리하고 대화하는 중에 이 어른이 우리나라 경제 발전 과정에서 참 역할을 많이 하신 분인데 기록을 안 남겨놓고 가셔서 안타깝다는 얘길 나눴어요. 이제 우리나라 경제개발 과정에 있었던 주역들의 그런 거를 좀 보존해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그때 육성으로 듣는 경제개발계획 등을 기록으로 남겨 교훈과 자료로 삼자는 의견들이 오가면서 시작이 됐어요. 처음부터 제가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그게 계속되어 이번에 10권까지 나왔죠. 편찬위원들이 참여했다가 보통 한번 하고는 다음엔 안 하겠다고 했는데, 근데 어떻게 저는 못 빠져나가서(웃음) 지금까지 14년째 이걸 맡아 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니까 참 의미 있는 작업에 함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신껏 책임을 다하려 했고 명분 있게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그의 ‘성공스토리’는 그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꾸며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제가 좋은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경제기획원과 같이 혁신적인 분위기의 좋은 직장에 몸담을 수 있었다는 게 행운이었죠.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웃음). 제가 나름 성공적인 삶을 일궜다면 이는 성장기에 좋은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정말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게 결정적이었다고 봐요.”

 

(--중략--)인천은 늘 마음의 고향이고 저를 키워준 곳이죠. 오늘의 저를 있게 한게 인천이 갖고 있는 포용성이라 봐요. 또 저는 모교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저희 모교의 교훈이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입니다. 굉장히 큰 영향을 저한테 줬다고 생각해요. 실제 제물포고 출신 공직자 중 '유감스러운 일'로 물러난 이들은 거의 없어요. 제가 공직자 생활하면서 큰 문제없이 그 어려운 검증 과정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덕분이죠. (윤대희 전 장관_인생도 '전력투구와 전력질주'해야죠! https://www.youtube.com/watch?v=0hsC23fmQe4)

 

신용보증기금 야구동아리인 신보엔젤스 방문(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2022.5.6)_출처 신용보증기금 홈페이지
신용보증기금 야구동아리인 신보엔젤스 방문(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2022.5.6)_출처 신용보증기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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