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무의도는 8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마다 대표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다.
1경 소무의 인도교(414m이며 대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연결하는 걸어서 다니는 길), 2경 떼무리항(떼무리 선착장으로 연결되며 낚시를 많이 하는 곳), 3경 부처깨미(풍어제를 지냈던 곳이며 조망이 빼어난 길), 4경 몽여 해수욕장(작은 돌과 모래사장이 있는 해수욕장), 5경 명사의 해변(이승만대통령,박정희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휴양을 즐겼던 해변), 6경 장군바위(장군의 모습으로 왜구들이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음.), 7경 하도정(남쪽의 작은 섬 해녀도를 조망할 수 있는 안산 능선길), 8경 모예재 (해풍을 맞으며 재생하고 있는 키 작은 소나무 숲 길).
지난 2015년 6월에 개관하여 운영하다 지난해에 시설물을 재단장하여 3월 중 정식 개관할 예정인 ‘소무의도 이야기 박물관’을 찾았다. 이야기 박물관은 재개관하며 이름을 바꾸어 ‘소무의도 스토리움’으로 간판을 달았다.
이곳은 어구전시관과 어촌생활전시실, 체험학습관, 영상실 등을 갖춰 2015년 6월 개관헀다. 480㎥ 규모의 건물로 지상 3층의 소라 형태의 외관을 하고 있다. 섬의 한가운데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개관 후 관광객들에게 소무의도를 소개하고 섬의 역사를 소개하는 쉼터의 개념이었다. 인천 중구문화재단 과 소무의도 마을협의회에서 운영한다.
스토리움답게 시대별로 이야기거리가 있다.
1400년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나온 기록으로는 나라의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 무의도가 사용되었다는 기록부터 나온다.
1700년대에는 소무의도에 박동기씨가 정착을 한다.
1911년 11월에는 블라디보스톡 성명회장 오주혁은 1911년 한일합병 무효 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여 1년간 소무의도로 거주 제한 조치를 당한 바 있다. 애국자이다.
1919년 3월 28일 을왕리, 남북리, 덕교리, 무의도 등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단행하다.
1946년 11월 소무의도는 일제 강점기 때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제공하고 항일 운동에 앞장선 부유한 섬으로 백범 김구선생이 귀국 후 방문하여 시국 강연회를 진행하였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 시 병참기지로 사용한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단행.
1960년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일가의 휴가지.
1970년대 새우가 많이 잡히는 부자 섬으로 유명세.
2009년 4월 소무의도 인도교 착공
2011년 4월 소무의도 인도교 준공
2015년 6월 ‘소무의도 섬 이야기 박물관’ 개관
무의도 주변은 수산 자원이 풍부하여 부유한 섬이었다. 또한 이에따른 스토리도 풍부한 섬이다. 수산 자원이 풍부한 것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조선시대 1642년의 이야기이다. 명나라와 청나라가 전쟁 분위기로 심각할 때 임경업 장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청나라에 갈 때였다. 한강에서 출발하여 소무의도를 지나 연평도에 이르러 임 장군은 조기가 많은 것을 발견하고 주민들에게 조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런 사실이 1960-70년대에 연평도의 유명한 조기 파시의 효시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도 연평도에는 그를 모시는 사당이 있고 매년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소무의도를 거쳐 연평도까지 임경업 장군은 물고기가 많고 수산 자원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았고, 이러한 사실은 일제 강점기에 풍부한 수산 자원의 섬인 영종, 용유, 무의도 일대에 애국심이 투철한 섬 주민들이 어렵게 모은 독립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 정부에 전달하는 역사로 이어진다.
해방 후 감사 인사 차 김구 선생께서 1949년 11월에 용유초등학교 무의도 분교에서 강연을 하게 되는 기록이 있다. 또 3.1 운동 당시 조용원씨는 인천시 중구 남북동 868 조병수 가옥(현재 인천시 문화재 16호)에서 항일투쟁 단체 혈성단을 결성하고, 당시 용유도 서기 이기복씨가 을왕리 유웅렬씨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인구가 1천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주민 150명이 3월 28일 용유도 관청리 광장에서 만세 운동을 했다. 인구 대비 한 집에서 한 사람 정도가 참여한 이 일은 이 곳 섬주민들의 애국심을 짐작하게 한다. 이 사건으로 혈성단원은 모두 1년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평생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을 했다. 이외에도 주민 11명이 처벌을 받았고 면서기도 파직을 당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2개나 있다.
스토리움 1층은 카페이면서 역사적인 이야기를 벽에 그려 놓았다. 2층은 카페이면서 수직으로 세운 나무 기둥 뒤로 역사적인 이야기를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3층은 예전에 만든 그대로 이며 아직 재 단장을 하지 않은 상태이며 개방하지 않고 있다.
현재 소무의도 스토리움은 중구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홍인성 중구청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중구문호재단과 협업하여 소무의도 사람들의 삶 이야기와 다채로운 콘텐츠를 접목하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릴 수 있는 관광명소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홍 청장은 이어 "아울러 지역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문화관광시설로 해양도시 인천을 대표하는 모범적인 모델로 말들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는 개관식 전 시범 운영 기간이다. 취재를 하며 다음과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스토리움(storium)이라는 간판 낱말이 낯설다. 명확한 영어단어가 아니라 관계자에 알아보니, 스토리 + 움(우리말로 ‘나무에 움(싹)이 트다’ 할 때의 싹의 뜻)이라는 신조어라는것이다. 예전 이름인 ‘이야기 박물관’이 전체적인 건물의 의미에 비추어 다소 어색하다. 순수하게 우리말로 소무의도 이야기 사랑방, 소무의도 이야기 쉼터 등의 알기 쉬운 우리말을 쓰는 것은 어떨까.
둘째, 3층은 재단장 하지 않아 개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간단한 변화 만으로 인기를 끌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한다면 좋을 것 같다. 예를 들면 3층에 있는 조형물 앞에 사진 찍을 수 있는 액자 같은 설치대를 만들면 관광객들이 기념할 수 있는 훌륭한 포토 존 사진 방으로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재단장하기 전에도 한동안 3층을 개방하지 않았는데 다시 개방하여 사용하자.
세째, 읽을 책거리 - 잡지, 간단한 역사책, 어린이용 도서를 비치하자. 바다가 보고 싶어 떠난 사람들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있는 지식에 대한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읽을 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네째, 퀴즈 문제를 풀 수 있는 퀴즈 문제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 맞추는 사람에게 간단한 선물 (작은 비용 내고 하기)을 준다. 여행은 추억 만들기이다. 작은 게임이 즐거운 기억으로 마음에 남는다며 그것보다 좋은 여행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