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하늘의 일꾼이면서 땅의 일꾼" - 일꾼교회 김도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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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하늘의 일꾼이면서 땅의 일꾼" - 일꾼교회 김도진 목사
  • 유사랑
  • 승인 2024.12.1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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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66) 김도진 '미문의 일꾼교회' 목사 - 유사랑 / 시사만평가, 자유기고가
미문의 일꾼교회 김도진 목사
미문의 일꾼교회 김도진 목사

 

가장 작은 자를 환대하는 것

목사는 하늘 일꾼이면서 동시에 땅의 일꾼이다. 흙바람 세상 구석에 신의 씨앗을 심고, 희망이 뿌리 뽑힌 이들의 마음에 천국의 소망과 위로를 길쌈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신의 메신저다. 신을 섬기고 신의 뜻을 몸으로 실행한다는 건, 결국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위해 ‘품’과 ‘수고’를 내어주는 일이다.

‘가장 작은 자를 환대하는 것’이 곧 ‘신을 섬기는 거의 유일하고도 직접적인 일’이기에 그렇다. 으리으리한 대형교회 숫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다는 이 나라가 갈수록 혼탁해지는 것은, 진짜 일꾼 대신 삯꾼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으로 비즈니스를 하고, 성전을 기업으로 일구려는 물질만능의 삯꾼 천지가 되어버린 탓이다.

그런 세상의 응달진 곳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40년간 묵묵히 신의 씨앗을 심어온 하늘 일꾼이 있다. 바로 미문의 일꾼교회 김도진 목사다. 사람들에겐 ‘인천도시산업선교회’(現 감리교사회복지선교회) 총무로 더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군부독재 정권 시절 노동자 편에 서서 투쟁을 이어 가는 바람에 ‘도산(인천도시산업선교회 약칭)’이 들어오면 회사가 ‘도산’한다는 오해와 편견, 그리고 정권의 무자비한 핍박을 묵묵히 견뎌온 것으로 유명한 바로 그 선교단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70년 전인 1954년 미국 연합감리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조지 오글’ 목사의 주도로 1962년에 만들어져,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알리고 노동법교육을 담당해온 단체다. 조지 오글 목사는 1974년 12월 군부독재에 의해 강제추방을 당했지만, 계속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원한 공로로 202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을 서훈한 바 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1997년 IMF사태를 기점으로 ‘감리교사회복지선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 방향과 내용도 도시빈곤문제를 주요 현안으로 다루고 있다. 필자가 김도진 목사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21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건물존치를 촉구하는 단식투쟁 현장에서다. 다행히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은 현 위치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현 건물을 그대로 이축해 보존하는 것으로 인천시, 조합, 교회, 그리고 인천시민사회와의 원만한 합의가 이뤄진 상태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하잖아요. 저는 목사로도 그렇고, 세상 기준으로도 그렇고 내세울 게 하나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제 깜냥껏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조그맣고 당연한 일들을 꼼지락꼼지락 해왔을 뿐이죠. 게다가 그 일이란 것도 정작 제가 한 건 거의 없다시피 해요. 야학은 야학 선생님들의 눈물겨운 희생봉사로 꾸려져왔고, 푸드뱅크 같은 사업도 빵집이나 음식점 사장님들의 기탁과 후원으로 가능한 일이니까요. 저는 그저 그걸 모으고, 나르고,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는, 심부름꾼 역할을 했을 뿐이죠. 미문의 일꾼교회나, 인천도시산업선교회(現 감리교사회복지선교회) 총무일도 마찬가지고요. 그마저도 요즘은 허리를 삐끗해 심부름꾼 노릇조차 제대로 못해 봉사해주시는 동역자분들께 폐나 끼치는 존재예요. 그래도 이렇게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되는 날, ‘도진아, 너 참 잘했어!’ 이 한마디 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장애인 이동차량을 기부한 로빈슨 미국선교사와 미문의 일꾼교회(1989년)
1989년 장애인 이동차량을 기부한 로빈슨 미국선교사와 미문의 일꾼교회에서.

 

- 부친의 반대를 무릎쓰고 목회의 길로

김 목사는 서울 정릉에서 출생했다. 북한산 골짜기 동네 정릉은 당시만 해도 시골 읍 분위기였다. 한겨울 정릉천이 얼면 동네 꼬마들은 중량천을 거쳐 한강 어귀까지 썰매를 지치곤 했다. 숭덕초등학교 4학년 때는 마포에서 미아리까지 운행하던 전차를 타고 창경궁으로 소풍을 갔다가, 돌아올 차비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바람에, 그 먼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전차 뒤를 따라 걸어서 되돌아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단다. 아이스크림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대가로 치러야 했던 그날의 고생을, 김 목사는 두고두고 되새김질해야 할 인생의 소중한 교훈으로 지금껏 간직하고 있는 까닭이다.

 

“부친은 한국동란 때 평안도에서 단신으로 월남하다 붙잡혀,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돼 총알받이로 전쟁터에 끌려가셨대요. 그 뒤 국군에 투항해 거제포로수용소를 거쳐 남한에 정착하신 분이죠. 그런 부친에게 남한에서의 삶은 항상 임시적인 것이었어요. 평안도에 버젓이 돌아갈 집이며 그리운 가족들이 시퍼렇게 존재했기에, 이곳은 그저 잠시 머무르는 객지쯤으로 여기셨던 거죠. 그러다 보니 한곳에 뿌리내려 정착하기보다는,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을 떠돌며 직장생활과 노동을 병행하셨어요. ‘평안남도 양덕군 문흥리’, 저희 3남 1녀 형제들에게 장차 돌아갈 부친의 고향 집 주소를 늘 외우게 하셨죠. 북에서는 꽤 공부도 하신 분이라 인격적이고 자상하셨지만,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부친의 ‘임시적 생활 태도’는 제 인생관 형성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던 거 같아요. 공부도, 세상살이도 악착같이 적극적으로 살아내려 애쓰기보다는 그냥 하루하루 적당히 견디는 방식에 익숙해진 거죠. 나중에 머리 굵은 뒤 그런 제 자신을 다잡아보려 애도 써봤지만, 제 의식의 밑바닥에는 아직도 여전히 그런 성향이 남아있나 봐요.”

 

미문교회 성탄절 행사 후
미문교회 성탄절 행사 후

 

김 목사가 인천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건 인천축현초등학교로 6학년 2학기 때 전학을 오게 되면서다. 부친이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의 한 조선소 용접기술자로 가게 되자, 김 목사의 교육을 위해 인천의 큰집으로 혼자 보내지게 된 것이다. 한 학기 만에 축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하사대부속중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는 서울 소재 학교로 가고 싶었는데, 부친이 ‘제물포고등학교’를 권했다. 동아일보 4단 만화에 ‘제고’가 명문 학교라고 소개된 걸 읽으신 모양이었다. 당시 서울과 부산은 고등학교 평준화로 소위 ‘뺑뺑이’였던데 반해, 인천은 아직 ‘시험제도’가 시행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한 권유였다.

 

“제물포고등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마 도서관일 거예요. 평소 보기 힘들던 책들을 무한정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부모형제와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 사춘기 외로움을 책 읽는 재미로 버텨냈던 거 같아요. 주로 철학책과 소설책에 빠져들었죠. 영국 작가 A.J.크로닌의 성채와 천국의 열쇠 등 그때 읽었던 책 내용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해요. 처음 제가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축농증 수술로 좀 늦게 학교에 출석해 저와 짝꿍이 된 전영석이라는 친구 때문이었어요. 신앙인이던 그 친구와 수업 시작종이 울린 것도 잊은 채, 종교논쟁에 열을 올리다가 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했죠. 당시 무신론자였던 저는 주로 내가 책에서 읽었던 불교철학을 들먹이며 그 친구를 공박하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나더러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뭔데? 코웃음 치며 돌아온 그날 밤, 이상하게 그 친구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그러다 갑자기 울컥해졌죠.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전혀 뜻밖의 그 말이 어느 순간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친구에게 선물로 건네받은 조그만 성경책을 펼쳐보기 시작했는데, 로마서와 바울서신을 읽어나갈 때쯤, 앎과 깨달음이 전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고 3때 뜨거운 신앙 체험까지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학대학 진학을 결심하게 된 거예요.”

 

그러나 김 목사의 신학대학 진학 결심은 부친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집안의 기둥인 장남이 갑자기 기독교 목사가 되겠다는 말에 부친은 펄쩍 뛰며 아예 절연을 선언했다. 제물포고등학교를 21회로 졸업한 후, 77학번으로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했지만, 부친은 당장 학비며 생활비지원을 끊어버렸다. 과외 알바로 학비와 생활비를 어렵사리 충당하며 겨우겨우 학업을 이어 가던 김 목사가 신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모교회인 중부감리교회 송성준 장로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당신이 운영하던 보육원 ‘향진원’의 교사 자리를 제공한 것이다. 그렇게 낮에는 학교엘 다니고 밤에는 향진원의 학생들을 가르치며 4년의 시간을 보냈다.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송성준 장로에 대한 고마움으로 1년을 더 향진원 교사로 근무했던 것이다.

 

- '작은자들의 모임' 결성, 장애복지와 취업, 사회통합에 나서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인 1983년, 지체장애인 신앙공동체 ‘미문교회’를 맡게 됐어요. ‘미문교회’가 지체장애인 신앙공동체다 보니, 장애복지와 취업, 사회통합문제 등 장애 문제 해결을 자연스럽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작은 자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작은 사람들의 공연’을 기획하게 됐죠. 처음에는 연극과 합창을 레퍼토리로 미문교회 내에서만 열던 공연을, 나중에는 돌체소극장 무대에 정식 유료 공연으로 올린 거예요.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정통극, 최규호 연출 김지하 극본의 ‘금관의 예수’ 같은 공연은 인천시민사회에 엄청난 호응과 함께 커다란 화제를 몰고 왔죠. 이후에도 1년 1회 공연으로 정례화해, 서울 대학로 소극장과 연세대 학생회관무대 등을 돌며 10회 이상 공연을 성황리에 이어갔어요. 티켓 판매대금과 후원금은 모두 장애인 자활기금으로 활용했고요. 그렇게 신나게 사례비도 없이 교회를 섬겼는데, ‘미문교회’가 성린재활원에 소속된 재활원생 중심 교회라 자립이 어렵고, 정식 파송된 교회도 아니라는 이유로, 교단에서 경력인정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제 목사안수도 덩달아 5년이나 늦어졌어요. 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죠. 교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곳이 바로 교회고, 하나님도 그곳에 함께 하실 거라 굳게 믿었으니까요.

미문교회에서 또 하나 정성을 기울였던 사업은, 장애인들의 ‘학력 취득’을 위해 이미 운영되고 있던 야학을 활성화시키는 일이었어요. 택시기사들조차 재수 없다며 장애인들을 태우려 하지 않던 사회 분위기에서, 장애인들의 자기 계발과 취업을 돕기 위해 ‘학력인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신학교 시절 2급 정교사자격증을 따게 되면 부친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질까 해서,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영화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숙대 국문과 다니던 교생실습 동기 중 한 분이 율목수영장 근처에서 구두닦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교사 중 한 팀의 도움으로 미문교회 교육실에서 지체장애인을 위한 ‘작은 자 야학’을 열게 된 거죠. ‘작은 자 야학’은 원래 미문교회 선임이던 허종 전도사님이 먼저 시작한 ‘미문야학’의 이름을 바꿔 활성화시킨 거예요. 1982년 문을 연 ‘작은 자 야학’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간석오거리, 예전 그 자리에서 42년 동안 계속 이어져 오고 있어요. 다만 요즘은 지체장애인 대상 교육은 줄고, 한글을 못 읽는 어르신들의 문해교육 쪽에 치중하고 있죠. ‘작은 자 야학’은 전국 최초 장애인 야학으로 인정받아 전국 여러 지역에서 다투어 벤치마킹을 해가기도 했어요.”

 

간석동 '작은자야학' 입구와 내부
작은자들의 '금관의 예수' 공연 포스터
작은자들의 '금관의 예수' 공연 포스터

 

-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무로

1998년 김 목사가 감리교단의 요청으로 인천도시산업선교회(現 감리교사회복지선교회) 총무를 맡게 되고, 2004년에는 일꾼교회 담임목사까지 겸하게 되면서, 기존에 섬기던 ‘미문교회’를 일꾼교회와 통합해, ‘미문의 일꾼교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김 목사가 푸드뱅크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IMF로 인한 실직자 상담 과정에서 쌀이 떨어져 굶는 가정들의 존재를 직접 목격하고부터다. 처음에는 ‘푸드뱅크’라는 개념조차 없이 단순히 ‘먹거리 나눔 운동’으로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끊임없이 해당 지자체와 유관기관에 제도화를 건의하고 요청한 끝에, 지금은 전국적인 식품 나눔 기관으로 ‘푸드뱅크사업’이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김 목사가 대표로 있는 ‘인천동구 푸드뱅크’는 직원 1명과 차량 2대(트럭과 승용차), 자원봉사자와 사회복무요원, 노인 일자리 인력 등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인천기독병원 무료 진료 지원
인천기독병원 의료진과 수년간 진행해온 무료진료 

 

 

“푸드뱅크를 운영하다 보면, 아직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다는 감동을 수시로 경험하곤 해요. 한번은 2007년인가 8년쯤에 연말 예산 500만 원이 급히 필요했던 적이 있었어요. 도와줘야 할 곳은 너무 많은데 예산이 바닥나 저녁 내내 고민하고 있는데, 12월 25일 성탄예배 행사 때 누군가 찾아와서는, ‘나 21회 제고 동창이야,’ 말하고는 불쑥 신문지 뭉치를 하나 놓고 가는 거예요. 도무지 그 동창 얼굴이 기억나질 않아서 예배 내내 어리둥절하다가 신문지를 펴보니, 글쎄 500만 원 돈뭉치가 들어 있더라고요. 꼭 한번 만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지금까지도 그 동창이 누군지 알 수가 없어요. 여기서 실명을 밝혀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역시 21회 동창인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도 잊지 못할 사람 중 하나예요. 얼굴에 검댕이 묻혀 가며 직접 만석동 골목골목 연탄배달도 하고, 지금까지 남모르게 독거노인 김장이며 월동준비 경비를 계속 기부해주고 있죠. 그 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제가 이일을 여기까지 지속해올 수 있었어요. 절대 겸손이 아니라, 정말 제가 한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해요. 그저 심부름한 거 밖에는 요. 목사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고, 그 선행을 내내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전부예요. 때론 이런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기력하고 민망한 순간도 많아요. 그래도 제가, 아니 우리가 함께 뿌린 착한 씨앗들이 잘 싹틔울 수 있도록 부지런히 물을 주고 김도 매고 해야죠. 그게 세상의 일꾼으로써 목사의 일일 테니까요.”

 

김도진 목사는 2003년 인천시사회복지대상을 수상했다.
김도진 목사는 2023년 인천시사회복지대상을 수상했다.

 

- "노동의 도시 인천에 노동역사박물관을"

김도진 목사는 그 어느 지자체보다 깊은 노동산업 역사의 뿌리를 지니고 있는, ‘노동의 도시’ 인천에 아직 ‘노동박물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아쉬움을 토로한다. 다만 ‘인천노동역사문화관’이 재개발조합의 기부체납 형식으로 화도진공원 인근에 건립될 예정이라는 사실은 그나마 고무적이라며 반긴다. 또 70년 인천노동운동사의 상징성을 품고 있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그 주변 공장지대, 그리고 산업시설들이 영국의 사례처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기를 꿈꾼다.

이를 위한 분위기 조성작업의 일환으로 김도진 목사와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는, 동일방직과 도시산업선교회를 잇는 700여 m의 길을 ‘어느 여성노동자의 길’로 이름 붙이고, 70년대 노동자들이 지나던 길을 현재의 2,000년대 노동자들이 더불어 순례하는 행사를 진행해오고 있다. 화도진문화원이 개발한 ‘노동자의 길’과 인천시민사회가 함께 연계해 인천노동 역사의 유산이 소실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2(도시산업선교회 앞에서 전도진목사)
현재의 일꾼교회 앞에서 김도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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