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고 문광진 일주건설(주) 대표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흩어진 조각을 끼우고 퍼즐을 맞춰야 했다. 일주건설주식회사 고 문광진(1953∽2005) 대표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고인의 행적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 지난 신문을 들추었다. 온갖 검색 기능을 동원해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걸리는 게 별로 없다.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면서 지역에서 이런저런 단체에 참여해 활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론의 노출이 드물다. 의외였다. 결국 시간을 함께 보낸 이들의 입을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동생 문완진 씨와 아들 문호일 씨를 만났다.
“인터뷰한다는 말을 들어서 그랬는지 오랜만에 형님께서 어젯밤 꿈에 나타나셨어요.”
서구 가정동에 위치한 일주건설(주) 사무실에서 문완진 대표를 만났다. 그는 문광진 대표의 친동생이다. 문광진 대표의 아들로 일주건설의 ‘경영관리팀 PRO’라는 직함의 문호일 씨도 배석했다.
평양에서 월남한 가족들
문완진 대표는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조부는 평양 근처 순천에 살았다. 순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순안비행장이 있는 바로 그 지역이다. 작은 섬을 하나 소유할 만큼 큰 부자였다. 해방이 되고 북한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위협을 느낀 조부는 가족을 이끌고 개성으로 내려왔다. 당시 개성은 38선 이남에 있었다. 6.25 전쟁 후 휴전선이 그어지자 그 이남으로 더 내려왔다. 부친은 서울의 한전에 취업했다. 장남 문광진과 누이 두 명 그리고 막둥이 완진은 서울 우이동에서 태어났다. 후에 부친은 인천의 한전으로 전근했다. 그러면서 인천과의 인연을 맺었다. 거처를 마련한 곳은 지금의 중구 관동 인성여고 아래 동네였다.
광진은 축현국교에 입학해 1학년을 마치고 신흥국교로 전학 갔다.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재학생 재분배에 의해 홍예문을 기준으로 남쪽에 사는 아이들 모두 신흥국교로 옮겨야 했다.
광진은 신흥에서 밴드부로 활동했다. 당시 인천의 웬만한 국민학교에는 밴드부가 있었다. 그중 신흥의 밴드부는 남달랐다. 인천 중심지에 위치했던 터라 신흥국교는 이른바 ‘쫌 있는 집 얘들’이 다니는 학교로 통했다. 그러다 보니 그 학교의 밴드부는 다른 학교와는 달리 복장이나 악기가 유난히 삐까뻔쩍했다. 광진은 색소폰을 불었다. 국민학교 밴드부에 색소폰 주자가 있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당시 색소폰은 매우 귀하고 비싼 악기였다. 50여 명의 밴드부원 중에 단연 눈에 띄었다. 어쩌면 광진은 그 이유 때문에 색소폰을 불었으리라. 그는 평범한 것보다는 남다른 것을 좋아했다. 학창시절이나 사업을 할 때도 그 취향은 그대로였다.
그는 인천중학교(19회)와 제물포고(16회)에 진학했다. 여섯 살 손아래 동생 완진이 기억하는 형과의 아주 특이한 기억 한 조각. 형이 고2, 동생이 초5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형이 동생에게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짜장면 먹을 생각에 완진은 신났다. 둘은 신포동 쪽으로 내려갔다. 어, 그런데 중국집을 지나쳤다. “엉아, 어디 가는거야?” 형은 아무 말 없이 앞장서 걸어갔다. ‘아하, 신포시장에 가서 만두와 튀김을 사줄건가 보다’ 그런데 거기도 그냥 통과했다.
형은 동방극장 근처의 한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완진은 아직도 그 일식집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인천의 최고급 음식점이었던 향원일식. 식당에 들어선 형제를 맞이한 주인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얘들이 손님인가, 아니면 누굴 찾으러 왔나?’ 형은 주저 없이 자리를 잡았고 뭔가를 주문했다. 잠시 후 멀건 국물에 흰 생선이 둥둥 뜬 음식이 나왔다. 완진은 그것이 복지리라는 것을 먼 훗날에 알았다.
상상해보자. 까까머리 고등학생과 앳된 초등학생이 어른들 틈에 끼어서 복요리를 먹고 있는 장면을. 희끗희끗, 졸지에 구경거리가 된 형제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광진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완진은 형이 엄청 혼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의외였다. “광진아, 아주 잘했다” 형은 그날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은 것이었다. 그 돈으로 동생에게 특별한 음식을 사준 것이다. 물론 본인도 처음 먹어본 음식이었다. 넥타이를 멘 사람들이 자주 그 일식집을 드나드는 것을 학교를 오가다 본 것이었다. 여하튼 뭔가 남달랐다. 형도 아버지도.
사업 성공의 발판이 된 옹벽
광진은 고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건축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또래 친구들보다 늦게 군에 입대했다. 보병으로 복무를 시작했는데 대학 전공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병 업무를 맡게 되었다. 휴가 나올 때마다 둘둘 만 설계도를 겨드랑이에 끼고 나왔다. 휴가 내내 집에 틀어박혀 설계도를 들여다보며 공부하고 간혹 선배의 설계사무소를 찾아다니며 궁금한 점을 물어보곤 했다. 그는 군복무 3년 동안 대학에서 배운 이론을 군대에서 마음껏 적용하며 실제 현장 경험을 쌓았다.
군 복무 후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83년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1990년 현대건설 과장으로 재직할 때 사우디로 파견되었다. 몇 달 후 이라크의 사단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걸프전이 터졌다. 사우디까지 여파가 미쳤다. 중동 현장은 폐쇄되었고 직원들은 긴급 탈출했다. 귀국하는 과정에서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그야말로 ‘쌩’고생을 했다. 중동 사태가 안정을 되찾자 회사는 다시 그에게 사우디로 나갈 것을 명했다. 고민 끝에 문광진 과장은 사직서를 던졌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사우디에서 가족 곁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세 살이었던 아들(문호일)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외할아버지 뒤로 숨었다. 검게 그을리고 지친 아빠의 모습이 매우 낯설었던 게다. 그때 그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다시는 식구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업을 하느라 늘 바빴지만 주말만큼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중한 추억을 쌓으려 애썼다.
걸프전은 그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다시 직장을 구하는 대신 1993년 일주건설(주)를 창업했다. 직원은 고작 3명. 듣도 보도 못한 신생 건설사에 일감이 떨어질 리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수주가 왔다. 첫 건축 발주는 고교 동기생이 운영하는 신기촌의 정형외과 5층 건물이었다. 이어서 당시 최고급 웨딩홀이었던 간석동 아로마 웨딩프라자, 연안부두 초입의 기아자동차 운전학원 등을 맡아 건축했다. 건축주들은 모두 고교 동기생들이었다. 그는 평생 그들의 도움을 잊지 않고 살았다.
1995년 일주건설이 한 단계 도약하는 일이 있었다. 연수구 적십자병원 옆에 있는 특수학교 연일학교의 공사를 맡게 되었다. 이 학교는 운동장이 옥상에 있는 등 다른 상업 건물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까다로운 공사였다. 공사 중 문제가 터졌다. 옹벽 공사를 거의 끝냈는데 교육청 감독관이 철근 배근 시공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회사 간부와 현장 감독은 일부만 철거하고 보강해서 마무리하자고 했다. 문광진 대표는 전면 철거하고 처음부터 다시 쌓으라고 지시했다. 엄청난 손실이 뒤따랐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게 이른바 ‘신의 한 수’였다.
소문이 돌았다. 일주의 대표는 고지식하고 깐깐하고… 그래서 공사 하나는 끝내주게 한다 등등. 연일학교에 이어 바로 인근의 인천생활과학고도 일주건설이 맡는 등 학교 공사 수주가 계속 이어졌다. 지금까지 학교 관련 공사가 수십 건에 달하는 시작점은 바로 그 ‘옹벽’이었다.
외진 곳에서 이룬 일주의 도약
학교 공사는 또 다른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2000년 검암중학교 신축 공사 때의 일이다. 문 대표는 점검차 건물 3층에 올라갔다. 그 위에서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올라와서 보니 학교 바로 옆에 의외로 넓은 부지가 있었다. ‘저 빈 땅은 뭐지?’ 바로 알아보니 우성건설이 소유한 22만㎡(약 7천 평) 규모의 땅이었다. IMF로 인해 주택은행에 압류된 상태였다. 시가로 80억 원 정도였다. 회사가 보유한 자금은 30억. IMF로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휘청거릴 때 일주건설은 그동안 주로 관급공사를 해서 은행 빚이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 정도의 실탄을 갖고 있을 수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15일 안에 매매가 이뤄져야 했다. 적극적인 매도 의사를 가진 주택은행이 2주 후 곧바로 국민은행과 합병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합병되고 나면 땅값이 오를지도 모르고 매도 의사도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백방으로 뛰었다. 농협을 통해 대출 자금을 겨우 마련했고 마침내 그 땅을 매입했다.
그 부지에 창업한 후 처음으로 아파트 짓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만 해도 서구 검암동은 인천에서 이른바 한데, 즉 외진 곳이었다. 인기가 없어서 메이저급 건설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공사로 풍림산업이 정해졌다. 검암2차 풍림아이원APT의 718세대는 예상외로 ‘완판’되었다. 검암 아파트는 일주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검암을 발판삼아 일주건설은 송도 상공을 힘차게 날았다. 2002년 5월 23일자 매일경제신문에 ‘송도신도시 아파트 첫 분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인천 송도 정보화신도시에서 9월께 첫 아파트 분양이 시작된다. 인천도시개발본부는 송도 신도시 주거단지인 '송도테크빌' 내 공동주택용지 분양을 마무리했다고 22일 밝혔다. 송도테크빌은 연수구 동춘동 991 일대에 들어서며 전체가 53만8000평 규모다. 공동주택용 택지 9곳과 4곳의 주상복합용 땅, 근린시설, 녹지 등으로 구성됐다. 9곳의 공동주택용지에 모두 7000가구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번에 분양을 끝낸 곳은 공동주택용 택지 5곳. 전체 150여 건설업체가 참여해 평균 72대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매립을 맡은 업체가 시행권을 가진 4곳과 합쳐 9곳 모두 시행사로 선정됐다. 이번 입찰을 통해 시행권을 얻은 업체는 다원주택(1블록), 일주건설(2, 3, 6블록), 금화건설(4블록) 등 3곳. 모두 인천지역 업체다. (중략) 문광진 일주건설 사장은 “사업계획을 발표한 지 오래됐고, 분양 전부터 인기가 높은 지역이어서 대형 건설업체들도 관심이 높다”며 “이 가운데 한 곳을 선정해 9월에는 일반에 공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주건설은 7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송도의 공동주택용지 분양을 받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2002년 12월부터 2005년 7월까지 송도 2, 3, 6블럭에 풍림아이원 APT 1,806세대를 성공적으로 분양했다. 송도국제도시 역사상 첫 번째의 아파트였다. 이로 인해 일주건설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문광진 대표는 아파트단지에 자신의 가족은 물론 동생들 가족 그리고 어머니까지 입주시켰다. 그들 모두 송도국제도시의 원주민이 되었다.
이제 시작인데, 안타까운 이별
기억의 퍼즐을 더 맞추기 위해 문광진 대표의 친구 장광덕 원장을 만났다. 장 원장은 수학교사 출신으로 예전에 인천에서 알아주던 입시학원 ‘영재학원’을 운영했다. 그는 문 대표와 초, 중, 고 그리고 대학(연세대 건축공학)까지 함께 다닌 ‘절친’이었다. 둘은 자그만치 16년이란 세월을 동문수학한 베프(베스트 프렌드)였다.
“그 친구의 사전에는 ‘대강’ ‘대충’이란 단어는 없었습니다. 승부욕이 남달랐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어요. 제가 바둑 2급이었는데 자신의 실력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데도 한 번이라도 ‘백돌’을 잡고 싶어 끈질지게, 정말 지겨울 정도로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그의 그러한 성격은 사업체를 운영하는데서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직원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대신 그만큼 보상을 확실히 했다. 고되게 일했지만 이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장 원장은 기억한다.
동생 문완진은 일주건설이 창업되었을 때 바로 합류했다. 형은 경영에 있어 동생을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이를 견디지 못한 동생이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났었다고 ‘베프’가 귀뜸한다. 나중에 사업체의 몸집이 더 커지자 다시 동생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철두철미함이 지나쳤던 것일까. 문광진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2005년 6월 고교 동문들(재경춘추회)과 인천 앞바다에 있는 장봉도로 1박 2일 여행을 가기로 했다. 배를 타기 직전 다른 날과 달리 컨디션이 몹시 나쁘다고 느낀 문 대표는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길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간암 판정을 받았다. 대학생 때 B형 간염을 앓았지만 그래도 설마…. 그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다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8월 퇴원 후 그의 가족과 장 원장의 가족이 함께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장 원장을 포함해 친한 친구들과 함께 다시 골프 라운딩을 했다. 그는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을 준비한 것이었다. 곧바로 다시 입원했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2005년 9월 13일, 막 쉰을 넘긴 나이에 세상과 하직했다.
얻은 것을 되돌려준 ‘통 큰’ 기부
“아버지는 저에게 항상 다양한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라고 말씀하셨죠. 지나고 보니 세상을 넓게 보고 다른 사람들의 삶과 가치를 이해하라는 깊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창의력에 대해 강조하시곤 했는데, 예를 들어 ‘사람 얼굴은 반드시 살색이어야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일 필요없다’며 얼굴을 빨간색으로, 머리를 파란색으로 그려보라고 하셨어요. 덕분에 색다른 시각을 가지려고 애썼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부친을 여윈 문호일이 마음속 깊이 간직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문광진 대표는 아들에게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누누이 강조했다. “부를 과시하지 말고 상황에 맞게 겸손하게 행동하라. 부는 사회를 통해 얻은 것이니 반드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
생전에 문 대표는 이를 몸소 실천했다. 성공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말을 자주했던 그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통 크게 기부했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이다. 국가유공자를 위한 주거개선사업, 불우한 청소년들의 선도와 건전한 생활을 위한 지원에 앞장섰으며 특히 어르신을 위해 양로원이나 노인정 등을 정기적으로 지원했다.
그는 모교 후배들을 위하여 제물포고 장학회에 기금 2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20년 전의 2억은 송도의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 액수였다. 그밖에 제물포고 초대 길영희 교장 동상 건립, 교내 춘추관 진입 계단 공사나 정문 공사를 무료로 시공하는 등 모교의 일에 발벗고 나섰다.
이러한 기부 문화는 동생 문완진 대표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2020년 일주건설은 ‘나눔명문기업 6호’에 가입했다. 나눔명문기업은 중소·중견기업이 3년 이내 1억 원 이상을 기부하거나 약정하는 ‘사랑의 열매’ 기부프로그램으로 당시 인천에서는 인천항만공사를 시작으로 5개의 기업이 가입했다. 문완진 대표는 인천공동모금회 개인 고액 기부자 모임인 ‘인천 아너소사이어티’ 21호 회원이기도 하다.
‘작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 큰일도 잘한다’는 불변의 진리대로 작은 일에도 늘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도전해 온 우리 일주의 긍정적 사고와 열정은 우리의 가장 고귀한 자산입니다. 꽃이 필요한 시기에 꽃씨를 뿌리면 늦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도 핵심역량을 발굴하고, 집중하여 초우량 기업으로 거듭나고자, ‘미래의 꿈의 씨앗’인 창의적인 IDEA를 창출하는데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일주건설주식회사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내용이다. (고)문광진 대표가 생전에 강조했던 긍정적 사고와 열정은 그대로 일주건설의 귀한 자산이 되었다. 그가 뿌린 꿈의 씨앗은 지역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오늘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