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상 /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해마다 이맘때 세계의 이목은 노벨상 수상에 집중된다. 수상자의 소감에 귀를 기울이는데, 인공지능(AI)을 연구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올해의 두 학자는 기쁜 마음보다 우려의 목소리를 강조했다. 세계에 막대하게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뇌 신경망 같은 논리 전개로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인공지능은 만능이 아니다.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어져 안정된 사회에 파문이 일 가능성을 걱정하는 경륜 깊은 학자가 걱정한 것이다.
우리는 요즘, 싫든 좋든, 자신도 모르게 알고리즘 세계에서 허우적거린다. 흥미로워 보이는 동영상에 남달리 관심을 보이면 비슷한 장면이 이어진다. 유튜브가 특히 그렇다. 삶은 달걀 껍데기를 시원하게 벗겨내고 싶어 검색했더니, 온갖 방법을 알려주는 영상이 앞다투며 클릭을 유혹하는 걸 본 적 있는데, 그런 건 애교다. 어떤 정치인의 발언에 관심을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이어지는 편견에 휩싸이게 되는 모습에 놀란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터미네이터로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한창 인기를 누릴 때, 변조한 목소리로 꼬마에게 터미네이터가 전화하는 모습에 전율한 적 있다. 장래 전사가 될 꼬마를 미리 제거하려고 그의 어머니 목소리로 위치를 물었던 장면인 듯하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걷잡을 수 없는 범죄가 발생할 거 같았는데, 이미 현실이 되었다. 유명 연예인의 목소리로 소비자 취향에 맞는 상품을 알려주는 전화 서비스가 새롭지 않은 세상이다. 앞으로 맞춤 동영상으로 특정 소비자를 유혹할 수 있다. 감언이설로 투자와 도박의 세계로 끌어들이거나, 종교와 정치사상을 얼마든지 교란할 수 있겠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때가 8년 전이다. 바둑을 조금 이해할 뿐이지만, 이제 별 관심이 없다. 수많은 대국의 기록을 기억하는 컴퓨터가 스스로 공부해 가장 합리적인 순서로 바둑알을 놓는 인공지능 앞에서 이세돌 9단은 기상천외한 수로 1승을 건졌지만, 이후 어떤 기사도 인공지능 바둑에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실수 없는 바둑은 매력이 없다. 인공지능에 도전하는 기사는 요즘 없어 보이는데, 바둑 프로그램은 더욱 정교해졌다고 한다. 바둑뿐이랴. 화가와 작곡가도 무력해질 듯하다.
챗GPT가 출현하기 전에 시간강의 마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연구실에 앉아 임박해 제출한 학생 리포트의 진위를 파악할 여유가 있더라도, 눈이 침침하면 귀찮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챗GPT 의존 여부를 가리는 앱이 이미 등장했겠지. 젊고 유능한 교수들은 걱정하지 않을 텐데, 의무적인 강의에서 벗어난 요즘, 근사한 풍경 사진이나 그림뿐 아니라 유려한 몸매를 과시하는 젊은이의 현란한 춤사위에 섣불리 경탄하지 못한다. 인공지능 개입을 지레 의심하게 되었으니, 슬프다.
우리 정부는 인공지능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겠다고 나선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 센터가 필요하고 그를 위해 원활히 공급될 전력과 물이 필수로 등장할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정부는 얼토당토않게 “기후 대응”을 앞세우며 14군데의 댐과 여기저기 핵발전소를 추가하겠다고 공언한다. 7살 어린이에게 요령을 알려주면 한 시간 이내에 큐브 6면의 색을 맞춘다는데, 인공지능은 순식간일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웬만한 화력발전소에서 반나절 생산해야 하는 전력을 요구한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한 번 클릭하는 순간, 7대 컴퓨터의 가동이 필요하다는데, 챗GPT는 어떨까? 그를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화석연료를 사용해야 하고 미래세대는 기후위기와 핵폐기물 위기에 몰려야 하나?
운전을 하지 않으니 뉴스 볼 때 속이 편안하다. 급발진 사고를 일으킬 일이 없기 때문인데, 운전자가 없는 스마트 자동차가 보편화되면 어찌 되려나? 괜한 걱정일까? 99% 사람 이상은 선하지만 일부는 생각 밖이다. 딥페이크로 아드레날린을 몰래 발산하는 사람도 있듯,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도전을 감행하는 극히 사람이 세상을 어지럽힐 수 있다. 해킹으로 도로의 온갖 감시, 저장, 분류장치를 교란한다면 무심히 보행자도로를 걸을 나는 무사할까? 기후와 에너지 위기, 식량과 인구 갈등으로 계급과 국가 간 긴장이 치솟을 때, 일부 세력에 이끌릴 인공지능은 어떤 구상에 내설까? 손에 쥔 전화기가 나도 모르게 폭발하는 세상이다. 징후가 이미 흉흉하다.
나와 내 자식, 그리고 미래세대의 희로애락을 중앙의 어떤 가부장적 세력에 맡기고 싶지 않다. 세계를 선도하든 아니든, 인공지능이 미래세대의 행복을 중앙의 의지로 편 갈라 좌지우지하는 세상은 상상하기 싫다. 막대한 에너지와 물과 권력으로 유지되는 인공지능 세계에서 소외되는 사람은 소수일까? 생각보다 다수일 수 있겠는데, 생각과 행동을 디지털에 의존하며 생존을 구걸하는 세상은 끔찍하다. 물론 그런 세상 이전에 기후위기가 도래해 미래세대는 파국에 휩싸이겠지만.
만고의 진리! 식구와 이웃이 모여 밥을 같이 먹을 때 행복하다. 평화(平和)라는 글자는 그런 세상을 의미한다. 발이 땅에 닿아 있는 세상인데, 인공지능은 그런 세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누구의 주머니를 먼저 불릴지 짐작은 하지만, 마뜩하지 않다. 기후위기는 점점 심각하게 다가오는데, 신기루 같은 인공지능에 기대하라니, 어처구니없다. 올여름에 실감했듯, 더욱 강력해질 폭염과 가뭄은 식량 위기를 초대할 텐데, 인공지능? 징후가 더욱 흉흉해지기 전에 신기루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서고금을 망라하고 모든 조상의 생존 기반인,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1957년 할리우드의 명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비비안 리가 열연한 스칼렛 오하라는 흙을 어루만지며 좌절하지 않은 자신을 다독인다. “나에게 타라가 있다”라고. ‘타라’는 흙을 의미한다. 방사능이 흥건하게 남은 핵실험 현장에서 서부활극을 촬영한 이후 비비안 리는 많은 스태프처럼 폐암으로 사망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을 이야기했다. 생명이 깃드는 흙이다. 신기루가 아니다. 생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