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인천을 바꾸고 싶었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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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인천을 바꾸고 싶었던 치과의사
  • 유동현
  • 승인 2024.09.0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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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53) 해반문화사랑회 명예 이사장 이흥우 치과 원장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의제21 상임회장 시절의 이흥우

 

잠시 타임슬립을 해보자. 1990년대 초 인천으로 미끄러져 가본다. 드넓은 동막 갯벌에서 어촌계 사람들이 물 좋은 상합을 캐고 있다. 그 바다 앞에는 송도국제도시라는 신기루가 아직 없다. 땅 밑을 다니는 지하철도 없었고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라곤 가끔 군용기만 보일 뿐 인천국제공항의 청사진조차 그려지지 않았을 때다.

인천은 아직 ‘직할시’로서 시청에는 문화 관련 전문부서 표찰이 보이지 않는다. 문화홍보실 혹은 문화관광과 등으로 ‘문화’는 그냥 껴 있는 업무였다. 공연장이라고는 주안의 시민회관이 전부였다. 시민들의 문화생활은 동네에 있는 극장을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마디로 인천을 ‘인촌(村)’이라고 깔보던 시절이다.

서두를 이렇게 구구절절 뽑은 것은 ‘해반’이란 문화단체가 참 대단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무지에서 꽃을 피운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이흥우는 (사)해반문화사랑회 명예 이사장이기에 앞서 현직 치과의사다. 그의 명함 한 면에는 치의학박사로, 다른 면에는 해반문화사랑회 명예 이사장, 그리고 ‘철학박사’가 함께 새겨져 있다. 요즘이야 모든 분야에서 ‘융합’을 외치고 학문에서조차 ‘이종교배’를 외치고 있지만 그동안 그는 문화예술, 치의학, 철학을 어떻게 섞으면서 살아왔을까.

애초에 그는 거창하게 문화운동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청년 시절, 삶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인생이라든지 철학이나 사상 등에 빠져 있었다. 한때는 시를 쓰기도 했으며 그 열정으로 개인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시인이 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계율과 허울을 벗어 던져 버리고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옛날에 썼던 글을 보면 그가 되고 싶었던 게 ‘거지’였을 정도다. 거지가 될 수 없는 사람이 거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불성설이고 건방진 이야기였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는 세상 모든 걸 집어던지고 제 맘대로 인생에 탐닉해서 사는 게 꿈이었다.

 

현실과 꿈이라는 두 레일의 기찻길이 어느 때는 하나의 레일이 되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역에서, 어느 때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천상병의 ’귀천‘ 역을 지나다, 어둑해진 하늘 멀리 깜빡이는 별에 끌려, ‘아. 저 별의 원소가 바로 나의 원소야’ 잠꼬대하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다. 지금 여기는 꿈인가 현실인가? (치학신문 이흥우의 철학에세이)

 

그는 지난 2021년부터 주간 치학신문, 지역신문 등에 ‘인문학 컬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의 글을 보면 그가 소싯적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고 현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나를 유추할 수 있다. 그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잠들고 깨어나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졸업 후 본업에 전력투구해도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마음 한구석의 미진함을 채운다고 한편에서 사회 문화 활동을 하며 인생의 반을 꿈속에 갇혀 지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경인가도 따라 인천을 걷다(2017)

 

‘변방’ 송림동에 마련한 병원과 갤러리

그의 부친은 교사였다. 그 덕분에 대부분 어렵게 살았던 시절임에도 못 견딜 만큼 어려운 환경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장남이라는 중압감이 있었다. 그 세대 대부분의 장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는 것 때문에 마냥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시를 쓴다든지 사색에 빠진다든지, 철학자나 사상가가 되고자 하는 비현실적인 꿈은 계속 꿨다. 하지만 장남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세상과 주변을 둘러볼 만큼 철이 들었을 때 맨 처음 보인 것이 부모와 형제였다. 최소한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한 후, 그래도 남는 삶이 있다면 나중에 하고픈 것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 빚진 것을 갚아야 하고 동생들을 돌봐야겠다는 의무감을 벗어던질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한 책임들을 해내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마음속으로는 농학이나 천문학 같은 걸 전공하고 싶었지만 결국 의사라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다.

시인이나 사상가가 된다는 생각은 한동안 접었다. 처음엔 서울의대를 갈 작정이었다. 입시가 목전에 있을 시기 그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되면 가족들을 어려움 없이 부양하고 웬만한 부와 사회적 지위 등 이른바 세상적 ‘출세’는 하겠지만 그거 굉장히 바쁘지 않겠나?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치의대를 선택했다.

대학에 들어가선 공부는 뒷전이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을 깡그리 잊어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까지의 공부는 대학 입시를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비우고 새롭게 채우기로 했다. 닥치고 ‘책’이었다. 잠자는 시간 빼고 책을 끼고 지냈다. 때론 풀밭에 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 보며 사색하기를 좋아했다.

늘 헐렁한 옷차림새에 헐렁한 행동을 했다. 아마도 물들인 군복에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친구 만나 대화하고 그들에게 미쳐서 살다가 보니 학과 성적은 겨우 F학점을 면할 정도였다.

그렇게 지내다가 입대해 군의관 생활을 마쳤다. 군의관 3년 차 때 결혼했다. 다시 복학해 남은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캠퍼스 풀밭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뭔가 손에 들고 지나가는 것을 봤다. 뭐냐? 그래? 나두 볼까? 대학원 입학 원서였다.

전공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녀석이 대학원 시험이라니…. 그는 대학원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전공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 공부를 하긴 했다. 그런데 그해 대학원 출제 방향이 정말 이상했다. 전공보다 문학, 철학 비스무레한 문제가 다수 출제되었다. 그동안 무지막지하게 했던 독서의 힘을 톡톡히 덕 봤다. 결국 동대학원에서 치의학박사(구강외과전공)를 땄다.

대학원을 마치고 동구 송림동에서 개업했다. 당시 주안이나 부평 쪽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막 형성될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점 퇴락하는 원도심에 간판을 내걸었다. 자신이 살았던 도원동에서 멀지 않은 동네였고 오래된 골목에서 자랐기 때문에 원도심에서 일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병원 한쪽 골방에다 5평짜리 살림방을 꾸려 신혼생활을 했다. 환자가 무척 많았다. 하루에 50명쯤 몰려왔다. 환자를 보다 보면 밥때를 놓치기 일쑤였다. 매일 오후 서너시나 돼서야 늦은 점심을 먹었다.

치료비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환자들에게 선뜻 치료비 청구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2년쯤 병원을 꾸린 뒤 따져봤더니 그의 수중에 달랑 50만 원이 남았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물었다. “당신 그렇게 밥 굶으면서 2년쯤 일하다가 죽는 게 좋은가, 아니면 밥은 먹고 10년 정도 환자를 돌보는 게 좋은가?” 아내의 말이 옳았다. 아내한테 사회적응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이다.

 

시화전이 맺어준 평생의 문화 원군

이흥우는 한 살 때 인천으로 왔다. 1953년 태어난 곳은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이다. 교사로 봉직했던 부친이 인천으로 오며 함께 온 것이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지금 축구전용경기장(옛 인천공설운동장) 부근의 도원동 황골고개 쪽에서 살았다. 창영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바로 앞에 경인선 철도가 지나가고 있어서 긴 나무로 된 안전막대기가 철도 건널목에 놓여 있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16회) 다닐 때 학교 윗길에 있던 자유공원으로 놀러 갔던 일과 그곳에서 조금 내려가서 보게 되었던 칙칙한 중국인 동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바닷가에서 망둥이를 잡았던 일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중학생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중2 때 학교 교지 <춘추> 12집에 ‘시골 풍경’이란 제목으로 글이 실리기도 했다. 고교 시절 바둑에 빠져 기원에 자주 갔다. 2급 정도일 만큼 기력(棋力)이 만만치 않았다. 공 차기도 좋아해서 방과 후 야간 축구부에서 날렵한 윙어로 활약했다.

 

제물포고 시절

 

그는 예과 다닐 때 대학신문에 필명으로 시를 투고하는 등 시 창작에 빠져 있었다. 2학년 때 친한 친구와 함께 사동에 있던 옛 인천시 공보관에서 시화전을 준비했다. 30~40편 정도 써서 그림과 같이 액자에 걸어야 했는데, 그림 그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침 그 친구의 형과 후에 이흥우의 부인이 될 최정숙의 오빠가 친구였다. 소개를 받았다. 그와 친구는 시를 쓰고 최정숙은 그림을 그려서 시화전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당장 연애 시절로 접어들지 않았고 본격적인 만남은 본과 3학년 정도 됐을 때였다.

대학생 최정숙은 학비를 벌기 위해 작은 화실을 운영했다. 시화전을 함께 치러낸 인연으로 이흥우, 친구, 최정숙은 종종 같이 만났다. 가끔 술 마시고 화실에 나타나기도 했는데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는 흥우 씨가 무척 측은해 보였다(고 한다). 대학 축제 때 동반할 파트너가 없다고 하니, 같이 가주겠다고 해서 그때부터 열애가 시작됐다. 그 시절의 전형적인 연애담이다.

 

잘 살던 동네도 별수 없었던 문화 소비

이제부턴 해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보자. 해반(海盤), 뭔가 입에 착 붙는 어감이다. 바다 해(海)자에 너럭바위 반(盤)자다.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모든 걸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다는 뜻을 품고 있다. 든든한 반석 위에 문화를 세우겠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이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이렇다. 부인 최정숙은 미술을 전공한 화가로 미술학원을 운영했는데 이름을 ‘해반’으로 지었다. 후에 화랑을 열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내걸었다. 해반문화사랑회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감 좋고, 뜻은 더 좋고’라는 평을 받는다.

 

부인 최정숙 화가와 함께

 

결혼 전부터 그는 아내에게 부모에게 보답하고 형제들 뒷받침해주고 나면 작업할 공간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차일피일 실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아내가 큰 수술을 하게 되었다. 결혼 생활 10여 년 지나서 애들이 일곱, 여덟 살 됐을 때였다. 수술실로 실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 약속을 꼭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의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마침 병원 옆 건물이 싼값에 매물로 나왔다. 주저 없이 그걸 샀다. 1층은 치과병원으로 만들었고 3층은 아내의 작업실로 꾸몄다. 18평짜리인데 그게 지금의 해반 사무국으로 쓰는 공간이다. 그러다가 얼마 후 2층까지 자리가 나서 ‘해반갤러리’를 만들었다. 그때가 1991년이다.

동구 송림동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방이었다. 인천이 문화적 저변이 약한 데다 외진 곳에 있으니 갤러리 운영이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번화가로 가볼까. 생각해 낸 곳이 부평의 현대백화점 부근이었다. 당시 최고의 상권이었다. 100여 차례 가깝게 미술기획전시를 하였다. 나름 소비가 있는 동네이니 그림도 소비가 되겠지 했다. 아니었다. 오산이었다. 착각이었다. 그 동네에서도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다.

부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갤러리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저변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인천의 문화애호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시민들의 문화적 저변을 키워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1994년에 출범시킨 사단법인 해반문화사랑회였다. 해반갤러리를 베이스캠프로 삼았다. 부평에서 3년쯤 활동하다 보니 운영자금이 바닥났다. 작전상 후퇴. 어쩔 수 없이 송림동 병원 2층으로 다시 갤러리를 옮기고 3층은 사무국으로 개편해 사용했다.

갤러리를 놀이터 삼아 다시 시작했다. 그곳에서 같이 모여 피아노 치고 노래 부르고 시낭송회, 문화강좌 그리고 문화탐방도 하면서 한바탕 재미있게 놀았다. ‘놀이’를 통해서 문화적인 저변이 차츰 넓어지리라 생각했다. 회원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이웃들까지 이 모임에 참석하는 게 다른 문화단체와 비교되는 특징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 시민 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때 모토를 ‘지역사랑, 문화사랑, 인간사랑’로 정했다.

“되돌아보면 시민운동이란 것은 멀리 꿈꾸는 자들이 아이들처럼 모래성을 쌓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루하루의 숨 가쁜 삶 속으로 돌아오고 마는 우리 생활인에게, 어쨌든 모든 것은 개인의 삶 하나로 귀결되고 만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부끄러운 것도 있지만 참 열심히 했다. 더불어 열정을 갖고 해반의 회원들이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은 참 좋았다. 우리 스스로가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를 여태 이끌어 왔던 힘은 바로 이런 의미의 추구에 있었다.”(이흥우, <해반의 문화운동이 지역에서 갖는 의미> 중에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해반문화사랑회 초대 이사장을 맡은 이흥우는 지역의 문화적 저변을 넓혀서 궁극적으로는 인천만의 독특한 문화를 피우고 가꿔나가고자 했다.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아나야 그 지역의 문화가 꽃을 피운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졌다.

무엇보다 문화예술인들이 발붙이려면 시민들의 문화적 저변이 넓게 퍼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일찍이 문화가 정치를, 더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제60회 해반문화포럼 (2015)

 

이제는 발상의 대전환을 할 때가 왔다. 정치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로 관심의 대상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생각의 우선순위를 문화 종교 경제 정치의 순으로 놓아 보면 어떨까. 그나마 문화에는 모든 이가 하나가 되는 최소한의 공통분모가 있지 않을까. 이제는 문화예술인들이 정치인들을 이끌고 다녀야 한다. 정치인의 정신을 문화예술로 계도하고 그 새로운 정신을 그들이 실행하게끔 해보자. 메말라버린 정치인들의 정신의 무덤 속에 문화로 곱게 빚은 토우를 묻어주자.(1995년 7월 4일 조선일보 일사일언 중)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송림동으로 모여들었다. 인천의 문제를 인천사람들이 인천의 목소리를 모아서 해결하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설립이었다. 해반 토론회에서 달동네도 한국에서 박물관이 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동구청을 설득해서 달동네박물관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를 포함해 해반 회원 몇 명은 자문위원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 뒤에 몇 명은 달동네 박물관의 문화해설사로 활동도 했다.

이밖에 개항장에 퇴락한 창고로 남아 있던 공간을 ‘예촌’이란 기획으로 시작해서 현재의 인천아트플랫폼의 그림을 그리게 한 것도 해반이었다. 중국촌(차이나타운) 활성화, 도서관 살리기 운동 등도 함께 펼쳤다. 아예 2003년도에는 인천시 문화예술과에서 인천시 역사상 처음 수립한 ‘문화중장기발전계획’을 해반이 맡아서 해냈다.

이흥우는 50대 때 그야말로 ‘문화’로 날아다녔다. 지면 관계상, 당시의 주요 활약상을 몇 줄로 요약해 본다. (사)해반문화사랑회 초대 이사장(1999~2005), 지역문화네트워크 상임대표 (2003~2005),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자문위원(2001~2004), 인천학연구원 운영위원(2003~2005), 대한치과의사협회 의료문화상 수상(2005), 인천문화재단 이사(2004~2006), 한국예술학회 이사(2005~2007), 인천의제21실천협의회 상임회장(2006~2008), 문화재청장 표창(2013) 등이다.

2002년 부평에 개원한 구올담치과병원이 있다. 1층에 갤러리가 자리 잡고 있다. 개원과 동시에 시작한 전시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구올담치과병원은 선배 의사였던 이흥우가 해반갤러리를 운영하던 모습에 감동해 갤러리를 열었다. 해반갤러리가 동구로 ‘작전상’ 철수하기 전 부평(옛 현대백화점 맞은편)에 있을 때 김정일 원장은 해반갤러리를 오가며 훗날을 기약했던 것이다. 해반의 꿈이 헛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해반은 씨를 뿌렸고 구올담은 열매를 맺은 것이다. 무엇보다 해반 덕분에 인천은 ‘인촌(村)’이 아니라 ‘인천(川)’이 되었다.

 

바로 알기 답사 (2003)

 

철학으로 다시 ‘자유인’이 되다

이흥우는 문화운동을 하면서 문화에 관해서 더 알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인하대학교 철학과에서 불교 쪽으로 공부하기도 하고 숭실대학교에 가서 미학을 공부했다.

“옛날에는 문화예술을 사회적 공기라고 얘기했어요. 인천은 바다잖아요? 이것을 철학과 비교해서 말하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지면 다양한 물고기가 잡히는데 그 그물을 철학으로 놓고 보면 잡힌 물고기는 이념이나 사상으로 볼 수 있고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 물은 앞서 말한 ‘사회적 공기’, 문화예술이고 인간 본연의 가치에 가까운 것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물론 시대의 필요에 따라 문화예술도 얼마든지 이념이나 사상을 사회에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는 있죠.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보고,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가치로서의 문화예술입니다.”

2002년 그가 ‘철박(哲博)’을 취득했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들은 적이 있다. 솔직히 안정된 직업을 가진 치과의사의 호사 취미로만 알았다. 그가 ‘거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것을 한참 후에 알았기 때문이다.

 

진료실 옆 서재에서

 

제대로 숨 쉬고 살기도 어려웠던 코로나19의 답답한 상황에서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에세이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치과의사들이 보는 주간 ‘치학신문’에 글을 연재했다.

 

하나의 생명은 온 우주를 감당하기도 한다. 우주가 있어 내가 있지만, 한편 내가 있어 거대한 우주도 있다. 우주 전개 과정을 한 덩어리 사건으로 생각하면 빅뱅 이후 필연적 과정으로 내가 있기에, 나는 우주 역사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내가 죽는다고 우주가 사라지진 않지만, 다양한 우주 중 나에게 꽃으로 왔던 ‘내가 보던 우주’는 사라진다. 내 삶과 죽음이 우주를 성립하게 하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한 사람의 인생역정을 우주에서 벽돌 하나처럼 빼낸다면, 우주라는 전체 계단은 통째로 무너진다. 우주에서 보면 우린 빅뱅 이후 퍼져가는 우주의 별, 지구에 피었다지는 꽃잎과도 같다. (치학신문 2021년 3월, 우주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겸허함에 담긴 존엄함’ 중에서)

 

예술과 철학은 세상과 나의 교감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매체이다. 예술은 대체로 감성 능력을 많이 사용하고 철학은 이성 능력을 많이 사용한다. 사고는 대상을 한정하지만, 유연하기만 하면 철학은 자유로운 사유와 상상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연해져서, 우리는 무(無)에서 유(有)를 본다. 나의 감각이 신체의 한계 내에서 외부 세계를 지각하게 하듯, 철학 또한 사고라는 틀 안에서 나를 문득 보게 한다. 이때 시공은 태초 한 점으로 회귀하여 멀어졌던 주객(主客)이 합치된다. (치학신문 2021년 5월, ‘언제 나를 문득 보는가, 사랑하고 여행하고 사색하고 일하며 놀 때’ 중에서)

 

그의 글들을 보면 그가 문화, 치의학, 철학을 어떻게 섞으면서 살아왔는지 엿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계율과 허울을 벗어 던져 버리고 ‘자유인’이 되고 싶었던 그가 비로소 읽히기도 한다. 장남으로서 가장으로서 임무를 완수했기에 이제는 이렇게 헐렁하게 살아도 아내한테 사회적응 교육을 다시 받을 일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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