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김동우 전 세종대 회화과 교수 - 허경진 / 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50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동우는 교대부국 교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인천 교대부국에 입학하였다. 누나가 인천에 몇 대 없던 피아노를 배우느라고 이 학교 저 학교에 찾아가 밤늦게까지 연습하자 누나를 지켜준다고 옆에 따라다니던 국민학교 오륙학년 때부터 저도 모르게 피아노를 배웠다. 누나가 서울대 음대 피아노과에 합격하자 부모가 결혼 패물까지 팔아서 피아노를 사 주었지만, 동생이 1963년 인천중학교에 합격한 뒤에 누나는 서울대 졸업 직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날마다 누나 무덤에 찾아가 우느라고 공부를 하지 못해 제물포고 입학시험에 떨어졌는데, 누나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가 교지 『춘추』에 실린 것을 보면 김동우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재주를 지녔음이 분명하다. 그는 인천에서 기차 통학하기가 좋은 서울역 부근 양정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음악을 하던 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큰아들이 전공을 바꿔 홍대 미대에 입학하더니, 작은아들마저 음대에 입학하겠다고 하자 부모가 반대하였다. 그가 집을 뛰쳐나가 친구 집에서 몇 달 뒹굴자, 아버지가 집으로 불러들여 ‘재수하지 않는 조건’으로 음대 입학시험 보는 것을 허락하였다. 한 학기 밖에 남지 않아 급하게 레슨을 받고 실기시험을 치렀지만, 피아노와 화성학에서만 좋은 점수를 받고 청음에서 점수를 받지 못해 떨어진 뒤에 국민대 축산과에 입학하였다.
이탈리아 시장의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서 돌려주다
죽은 누나 무덤에 날마다 찾아가 우느라고 인천중학교 시절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지만, 입학식에서 길영희 교장의 한마디 훈시는 열두 살 어린 김동우가 평생 양심과 자존심을 지키며 살게 해주었다.
“여러분! 우리가 길을 걷다가 신발에 콩알만 한 돌이 들어오면 참고 그냥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는 티끌만 들어와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양심은 눈과 같아야 합니다. 발바닥 같은 양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김동우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자의식을 느끼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는데, 20년 뒤 가난한 유학생 시절에 돈가방을 주운 순간 길영희 교장선생의 가르침을 저도 모르게 실천하였다.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생전 처음 망치로 돌을 깎아 나가는 석조 작품을 학교에서 배우는데, 수업시간만으로는 부족해서 대리석 채석장 밑에 작은 공간을 빌려 생애 첫 작업장을 마련하였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곧장 작업장으로 달려가 밤 12시까지 작업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몇 발자국을 걷는데, 발길에 무언가 채여서 주워보니 손가방에 돈이 가득 들어있었다. 깜깜한 주차장 아무도 없는 곳에서 돈다발이 든 가방은 그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을 오르는 짧은 시간 그의 양심은 유혹을 뿌리치려 싸웠다. 1년 치 생활비는 족히 되는 돈뭉치가 그의 자존심을 시험하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지갑에서 나온 명함을 들고 전화하였다. 깊은 밤중이었지만 아침까지 유혹과 갈등하고 싶지 않아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하였더니, 아래층 치과 의사가 “내 손님이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전화가 왔었다”고 하였다. 얼마 후 여인이 찾아와 ‘자동차를 사려고 은행에서 찾은 돈’이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거듭하였다.
그의 남편이 시장 명함을 내밀었다. “이 돈이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포기했었다”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꼭 시장실로 찾아오라고 하였다. 당시 카라라에 조각공부를 하러 유학 온 한국유학생들은 해마다 체류증을 연장하기 위해 수많은 서류(여권ㆍ재학증명서ㆍ은행 송금증명ㆍ주택임대증명ㆍ보험가입증 등)를 준비해 시청 경찰서에서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뒤부터는 까다롭게 굴던 경찰관이 서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너 한국인이야?”하며 체류증에 흔쾌히 도장을 찍어주었다. 시장이 양심을 지킨 김동우를 비롯한 모든 한국 유학생에게 보상해준 것이다.
여자친구를 만나러 명동 나갔다, 권진규 개인전을 보고 조각가의 길에 들어서다
국민대 축산과를 다니던 그가 파리를 거쳐 카라라까지 유학하여 조각을 배우게 된 동기는 권진규 조각전에서 받은 장엄한 메시지 덕분이었다. 1971년 여자친구를 만나러 명동에 나갔다가 시간을 때우러 명동화랑 2층 계단을 오르던 중, 미술을 공부한 적도 없고 관심도 없던 그의 가슴이 뛰었다. 난생 처음 소리나 글자가 아닌 물질 그 자체이면서도 독특한 힘을 가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형상을 구워낸 흙덩어리였다. 전시장 입구 왼편 진열장 속의 두상을 처음 보는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흥분과 긴장을 느끼며 전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이것이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본 것이지만, 마치 예전에 보았고 알고 있던 것을 보는 듯하였다.
조각가 권진규가 다음 날 저녁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가서 인사했지만, 권진규는 벙어리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 없었다. “제가 어제 우연히 선생님 작품을 보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또 왔습니다.” 해도 목석같이 있었다. “선생님 작업실에 좀 놀러 가도 되겠습니까?” 물었더니 그제야 종이에 약도와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여러 달을 선생의 시중을 들고 청소하는 것만으로 족하게 여기며 작업실을 드나들었고, 저녁에 흙덩이를 조금씩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밤새 무엇인가 만들어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이 거울 두 개를 주며 얼굴을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며칠 동안 열심히 자각상(自刻像)을 완성했더니 선생이 악수하면서 제자로 받아 주었다. 침묵 가운데 한두 마디 짧은 가르침이 긴 침묵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뿐만 아니라 선생의 표정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두상 백 개를 한 뒤에 인체를 하라”는 가르침 때문에 권진규 작업실에서는 인체를 한 번도 만들어보지 못했다. 얼마 후 학교를 그만두고 조각에 전념했지만, 한 번도 칭찬을 들어보지 못했다.
김동우 생애에 가장 기뻤던 순간은 선생이 어느 날 오후 작업 중에 불러 악수하면서 무사시노 시절 스승 스즈미 선생이 졸업선물로 주었다는 무쇠 헤라를 자신에게 주었을 때였다. 그때 선생이 빙그레 웃었는데, 그것이 선생과의 마지막 악수가 되었다. 바로 얼마 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작품 소장을 제의해와 그렇게도 좋아했는데, 그 개관식 다음 날 선생은 스스로 갈 길을 갔다. “작품처럼 내 삶을 다스리겠다”는 말만 남기고. 국내에 학연이 없던 김동우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작품 구입 수고비를 사양했다가 3년간 생활비를 지원받다
김동우는 파리 유학 2년 차 6월 6일 생일날 비가 와 6층 다락방에서 창밖 비둘기 울음소리나 듣다가, ‘나를 위해 돈을 아끼지 말고 써보자’는 생각에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 홍대 출신 유학생이 손님과 식사를 하다가 같이 하자고 불렀지만, 식사비를 내줄 돈은 없고 얻어먹기도 싫어서 따로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가려 하자 술이니 한잔하자고 부르기에 그쪽 테이블로 가서 낯선 손님과 인사하였다. 호암미술관에 부르델의 작품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를 구입하러 서울에서 온 예원화랑 염기설 사장인데, 내일 부르델박물관에 같이 가서 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일당 500불의 거금이었지만 사양하고 이틀 도와주었더니 굳이 수고비를 주려기에, 화집이나 한 권 사 달라고 해서 두 권을 받았다.
염 사장이 떠나던 날 서울 연락처를 달라더니, 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매달 백만 원씩 지원받게 되었다고 한다. 3년 동안 지원받고 돌아와 작품을 주려고 하자, 염 사장이 굳이 사양하고 한국 최고의 조각가가 되어달라고 격려하였다. 김동우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정말 열심히 조각에 매달렸다. 1년 동안 작품을 만들어 사진을 찍고 염 사장에게 개인전을 부탁하자. 제1회 개인전은 한국 최고 화랑에서 해야 한다면서 현대화랑 박명자 사장을 소개하였다. 무명 작가에게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주었다는데, 뜻밖에 성공하여 조각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비 오던 생일날 파리에서 예원화랑 염 사장을 만났던 날, 현대화랑에서 첫 전시회를 열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날이 그의 인생을 바꿔주었다. 염 사장의 친구인 가나화랑 이호재 대표가 나중에 염 사장에게 “무엇을 믿고 한국에서 미대도 다니지 않은 무명 유학생에게 몇 년 동안 큰 금액을 지원해 주었느냐?”고 묻자, 가난한 유학생 시절인데도 기백 넘치는 모습을 보고 이런 사람은 조금만 도와주면 성공할 것이라 믿고 지원했다고 한다.
모자상을 팔등신 미인으로 고쳐 달라는 이사장 지시를 거부하고 해직되다
김동우는 15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95년에 귀국하여 운 좋게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국내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그가 서울에 있는 대학의 교수가 된 것은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69학번으로 미술과는 거리가 먼 축산학을 전공하다가 1971년 우연히 명동화랑에서 권진규의 개인전을 보고 감동받아 그의 작업장을 찾아가 제자가 되어 조각에 입문하였으나, 1973년 5월 권진규가 자살하는 바람에 스승을 잃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미술공부를 하였기에 국내 미술계에는 인맥이나 연고가 없어 고아 같은 신세였다. 유일하게 내세울 경력이라곤 현대화랑에서 생활비를 보조받는 전속작가라는 타이틀뿐이었다.
1997년 IMF가 시작되면서 현대화랑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이 끊기게 되어 생활이 난감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 위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학교수 임용에 마지막으로 서류를 접수하여 수십 명의 경쟁을 뚫고 교수가 되었으니 인생 최고의 행운을 잡은 듯하였으나, 얼마 후 그의 자존심을 시험하는 고난이 시작되었다. 대학교 법인 이사장이 대학 본관 앞에 대형 석조작품을 제작해 달라고 하였다. 석재와 공구비는 학교에서 부담하고, 2.5m 화강석 모자상을 1년 가까이 걸려 완성하였다. 작품비는 재능기부 차원이었다.
“완성된 작품 사진을 이사장이 보고 싶어 한다”고 총장이 전하기에, 사진을 들고 이사장을 만났다. 사진을 본 이사장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며 “아니 김 교수. 왜 이렇게 짜리몽땅해? 엄마가 남자같이 팔뚝이 굵어?” “여자가 머리가 크면 시집도 못가. 머리를 줄이고 좌대 밑으로 발을 좀 길게 해서 8등신으로 좀 시원하게 고치세요.” 날벼락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항변하였다. “이사장님. 현실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아름다움은 그 기준이 다릅니다. 로댕은 창녀였던 노파를 모델로 작품하였는데, 주름으로 가득한 그녀의 몸매가 실제로는 그리 아름답지 않지만, 작품으로 승화된 몸은 그녀의 고난했던 삶을 투영하여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제 작품은 우리 시대 어머니들이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등을 겪으며 극복한 강인한 모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매시브한 여성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하니 고치세요.”
그 대학에서 이사장은 왕이다. 교수는 신하에 불과하다. 그는 작업장에 돌아와 작품을 보며 잠시 고민하였다. 이 어려운 IMF 시기에 수십 명 중 나를 뽑아준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이사장의 요청대로 작품을 고치느냐는 문제가 90대 부모님을 모신 두 아이의 가장으로서의 현실적 문제와 더불어 예술가로서의 양심ㆍ자존심과 심하게 부딪쳤다. 교수 목숨을 쥐고 있는 이사장의 명을 거역하는 일은 그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거는 일이었다.
그는 얼마 후 고민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당장 크레인을 불러 모자상을 학교로 싣고 갔다. 본관 앞 정원 한가운데 20톤의 작품 무게를 지탱할 콘크리트 기초좌대가 아름다운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대한 기중기에 의해 작품이 공중에 매달렸다가 꽃들 속으로 안착되는 광경을 많은 직원과 학생들이 보았다. 얼마 후 그는 해직 통보를 받았다.
조각가가 자기 작품에 소신을 지키기 위해 이사장의 부당한 지시를 어겼다고 대학교수를 해임하는 소설 같은 일이 현실이 되었다. 이 부당한 현실 앞에서 지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다가, 몸으로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교문 앞에서 일인시위를 시작하였다.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피켓을 목에 걸고 서 있고, 점심시간 후에는 총학생회에서 마련해준 천막에서 5시까지 농성하는 일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 하루도 결석 없이 1년 넘게 하였더니, 총장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매일 청바지 차림으로 나가던 그가 모처럼 양복과 넥타이를 매니 아내가 웬일이냐 물어 “총장이 호텔에서 보자고 한다”고 알려주었다. 은근히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는가 기대하며 총장을 만났더니 “내일 당장 부교수로 복직을 시켜주겠다”고 한다. 단, 조건이 있다. “4년 안에 아무 때나 스스로 작가로 돌아간다고 사퇴하면 해직 기간의 봉급과 1억 원의 위자료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너무나 받고 싶은 좋은 제안이었다. 복직도 되고 목돈도 생기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인데 왜 가슴이 뛰는 것인가?
1인시위가 시작되자 총학생회ㆍ동문ㆍ사교련ㆍ교수노조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자신의 투쟁을 지원하는 김동우 교수 복직투쟁위원회를 만들어 돕고 있는데, 그들을 외면하고 대학과 밀실계약을 해서 나의 실속을 챙기는 비도덕적 제안을 받아야 하는가. 그 자신의 양심의 문제, 실리와 명분의 싸움이 그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눈비 오는 날 처량하게 혼자 서서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보낸 지난 일 년을 생각하면 당장 받고 싶었지만, 총장의 제안이 끝나자 그는 본능적으로 총장 앞에 놓인 물컵과 자신의 물컵을 양손에 들었다. 그리고 총장의 물컵을 흔들며 말했다. “총장님 이것은 오물인데, 이 물에 섞어서 나에게 주셨으니, 이 오물이 한 방울만 들어도 마실 수 없습니다.”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그의 답변이 정말 본능처럼 나왔다.
예술가란 은유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는 순간의 찰나에 절묘한 방식으로 그 제안을 멋지게 거절하였다. 총장은 의외로 머리를 꾸벅이며 말했다. “김 교수님 역시 훌륭하십니다.” 그들의 짧은 담판은 그렇게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에서 아내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내심 좋은 소식을 기대하던 표정이었다. “이 ○○들이 나를 돈으로...”하는데 아내가 “당신 돈 받았어?”하며 황급한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아니 신발 좀 벗고 들어가서 말할게.” “아니야. 지금 말해.” 신발을 벗는 그에게 다그치며 되물었다.
할 수 없이 신발도 못 벗고 현관에 서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그의 아내가 기가 막힌 말을 하였다. “난 당신이 그들 돈 받았으면 이혼이야. 여보! 가난해도 당당하게 삽시다.” 눈물이 흘렀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아내를 모시고 있다니 더 부러운 게 무엇이 있을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팔등신으로 고치라굽쇼?」
「팔등신으로 고치라굽쇼?」는 2002년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중에서 가장 희극적인 제목의 영화였고, 내용 역시 한편의 블랙코미디였다. 한국 다큐멘터리 특별초청작으로 상영된 이 영화는 김동우와 같은 대학의 영화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치다 그만둔 황철민 감독이 한국의 사학 현실이 얼마나 전근대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일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동우가 교수재임용에 탈락한 이유는 교수로서 능력이 모자랐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서가 아니라, 예술적 취향이 높았던 재단 이사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에 괘씸죄에 걸려 탈락한 것이었다. 김동우도 교수직에 연연하여 시위를 한 것이 아니라 재단 이사장의 전횡에 의하여 자신이 탈락한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기에 시위를 했다.
조선일보 바로보기운동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옥천전투」를 제작하고 이사장의 사퇴 압력으로 2001년 12월 세종대학 교수직을 사퇴한 황철민 감독이 재임용에서 탈락한 동료 교수 김동우의 일인시위 소식을 듣고 시위의 모습을 담은 것이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었다.
80년대 당시 민중미술의 선봉이었던 임옥상이 이탈리아 유학 중이었던 김동우를 찾아왔었는데, 예술의 사회참여와 순수미술에 대한 논쟁을 3일 동안 벌였지만 결국 일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순수미술을 주장한 김 교수의 생각이 지금은 바뀐 것인가?’를 묻는 관객의 질문에 김동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임옥상의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참여는 예술이 가지는 하나의 기능이지, 그것이 예술 자체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다큐멘터리에 쓰인 곡들은 음반수집이 취미인 그가 직접 선곡한 곡들이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에디트 피아프의 목소리가 엔딩타이틀로 쓰인 이유가 바로 자신의 신념을 대변하였기 때문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오후 2시 남포동 대영극장 앞에서 세종대 김동우 교수 원상복직 및 대학 민주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소속 교수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2년 반이 흘러 만 3년 6개월 만에 행정소송에서 승소하여 복직하였다. 그를 쫓아낸 이사장과 이사들은 전원 해임이 되고, 교육부에서 임시이사들을 파견하였다. 그는 새롭게 구성된 이사회에 요구하였다. 그동안 부당하게 해임된 교수 전원을 복직시켜야 진정한 대학민주화가 이루어진다고 청원하여, 6명의 해직교수들이 복직하였다.
20대 초반에 읽은 로댕의 어록이 그를 이 싸움에 승리할 수 있게 하였다. “예술가는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바위를 뚫는 지속적인 인내를 가져야 한다.” 이 말이 기약 없이 하루하루 교문 앞에서 3년 6개월 동안 그를 서 있게 해준 힘이었다. 모두들 달걀로 바위치기라며 만류하였지만, 그는 로댕에게 배운 것을 실천하였다.
그리스 여신에서 시작하여 단군신화의 웅녀를 만들어내다
김동우의 작품세계에 대해 여러 평론가들이 평하였지만, 그를 조각가로 키워낸 카라라 국립미술학교 조각과 교수이자 학장인 홀로라이노 보디니의 평이 정곡을 찌른다. 김동우가 1986년에 카라라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국립미술학교 조각과에 재학하던 1987년에 제1회 개인전을 현대화랑에서 열게 되자, 이렇게 평하였다.
“김동우의 작품세계를 말할 때 그의 예술적 모험이었던 지난 과거를 모르고는 그 진가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1950년 출생하여 처음에는 농과를 전공하였으나 1970년 조각가 권진규를 사사하며 미술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82년부터 파리에서 2년간 조각 수업을 받고 많은 유명 무명 조각가들처럼 대리석의 매력에 사로잡혀 카라라로 이주하여 이곳 국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러한 체험들 속에서 그는 직업(MESTIERE)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대가들을 연구하면서 그의 면모를 드러내는 전문가적 경지(DIGNITA)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였다. 그는 동양 조형예술의 위대한 전통, 즉 한국ㆍ중국ㆍ인도의 경향 뿐 아니라 서양의 부르델(Bourdelle), 마리니(Marini), 무어(Moare), 그리고 모딜리아니(Modigliani)에 이르는 유럽 전통에도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는 보고 통찰하고 연구하면서 그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차원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면서 결코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따라서 여인상ㆍ두상ㆍ나상ㆍ동물상으로 표현한 그의 조각들은 자체의 정확하고 분명한 스스로의 공간 속에 존재하며, 그 안에서 일에 대한 사랑과 감정은 그 작품들을 자체의 정확한 차원 속에서 생동케 만든다. 그의 조각에 있어 기본 재료는 대리석이다. 그 재료의 아름다움과 색채는 리듬과 넓게 확장된 표면에서 추출되는 하나의 형식과 결합하여 작가의 복합적인 고전성 내에서 담백하고 고요한 형태를 이룬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작품활동에 계속 정진해 나갈 것이며, 그의 예술적인 압축된 힘과 형식 속에서 그 내용에 더욱 부합하는 리듬을 발견하면서 발전할 것을 확신한다.”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동양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서양으로 넓혀 갔다기보다는 서양을 배우다가 동양으로 돌아오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작품 제작 연도를 보면 카라라 국립미술학교 재학 중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조각전 도록의 표지 작품부터 얼굴도 갸름하고 코도 길며 손가락도 길다란 그리스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사암으로 만든 작품들은 동양 여인에 가깝지만, 한국 여인이라기보다는 이집트 벽화에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느껴진다. 그는 그 뒤에 여러 나라에서 개최되는 국제전에 출품하고, 1992년 독일 뮌헨의 GALLERY CHAROTTE, 2007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LA COTE ARTE CONTEMPORANEA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한국 여인의 모습을 만들어냈는데, 2010년 이탈리아 피스토이아의 Museo Marino Mariri 개인전에서는 얼굴이 둥그렇고 오등신에 코도 한국 여인에 가까운 작품만으로 채웠다.
그는 결국 단군신화의 웅녀로 돌아왔다. 웅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야 토양에 맞지만, 그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대리석 속에 숨겨진 웅녀를 찾아내기 위해 몇십 년을 갈고 닦았던 것이다. 2023년 8월 인사동 제이에이치(JH)갤러리 초대전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인간 삶의 본질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실제로 드러난 모습이 남녀가 만나 이루는 가족의 상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자신의 삶과 작품에 엄격하기 그지없었던 제 스승 권진규 선생의 예술가적인 태도를 항상 떠올리면서 사랑의 실체를 담은 가족상을 표현해보려 했습니다.”
그는 눈앞의 유행보다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인체 탐구에 매진하면서 근대 한국 조각사에서 부족하고 못다 이룬 묵은 숙제를 하는 것이 필생의 과제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앞으로도 그렇게 작품활동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