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을 사랑한 경세가(經世家), 이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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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을 사랑한 경세가(經世家), 이인석
  • 이현식
  • 승인 2024.06.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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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40) 이인석 전 인천발전연구원장 - 이현식 / 문학평론가
이인석 원장(경인일보 보도사진 캡처)
이인석 전 인천발전연구원장(경인일보 보도사진 캡처)

 

경세가(經世家)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자면 세상을 경영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경세가는 정치인이나 사상가, 관료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사람에 따라서는 경세가이면서도 정치인인 경우도 있고 관료나 사상가이면서도 경세가적 면모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원래 경세가는 자기 나름의 철학이 있으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와 실무에도 밝아 세상을 폭넓게 바라보면서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현실적이고도 실질적인 대안을 낼 줄 아는 사람에게 붙이는 말이다.

고담준론만 논하거나 기능적인 일 처리에 능숙한 사람, 권력을 갖고 갈등을 조정하는 사람을 경세가로 부르지는 않는다. 요즘처럼 세상이 복잡해지고 변화가 빠른 때에 특정 분야의 전문가는 많아도 자기 나름의 철학과 식견을 바탕으로 문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해결의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혜안을 갖춘 경세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말의 바른 의미에서 경세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하고 고향인 인천에 내려와 인천발전연구원(현 인천연구원) 원장을 역임한 이인석 같은 사람이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

이인석 원장(여러 직책을 역임했으나 이글에서는 원장으로 칭한다)은 그의 주된 이력만 놓고 보자면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오랜 시간(1969년~1998년) 일명 코트라(KOTRA)라고 불리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근무했다. 그 가운데에서 20년이 넘는 세월을 독일에서 주재하며 무역 업무에 종사했다. 푸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동베를린, 취리히 등이 그가 근무한 곳이다. 그의 재능을 발견하고 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발탁한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그를 새로 구성하는 청와대 비서실로 불러들인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인사여서 언론에서 그를 주목하는 기사가 여럿 보도되기도 했다. 정치계 인사도 아니고 대학교수도 아닌데다가 정부 고위 관료도 아닌, 당시로서는 국내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무역관 관장이던 사람을 발탁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런 인연은 김대중 대통령이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선거 패배의 아픔도 달랠 겸 영국 런던으로 유학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침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한국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총재의 특강을 요청해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이인석 원장과 인연이 맺어진다. 독일 통일과 경제성장에 대해 당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김대중 총재의 눈에 이인석 원장이 들어온 것이다. 이때의 만남은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유학시절 김대중 총재가 가장 의미있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이인석이라는 소문이 났다고 한다. 이인석과 대화할 때면 항상 김대중 총재가 따로 필기구를 준비해 중요한 대목을 메모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이인석을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청와대 비서실 구성 때 이인석 원장을 두고 돌았던 소문은 ‘브리핑의 귀재’라는 말이었다. 그만큼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어 실체를 정확히 분석하고 그 대안 역시 구체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제시했었기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청와대비서관으로 발탁한 언론기사
청와대비서관으로 발탁한 언론기사

 

브리핑의 귀재

필자 역시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이인석 원장이 인천발전연구원 원장 재직 시절 중국과 교류를 위해 연구원의 경제학 박사 몇이 중국 측 인사들과 협의하고 시장에게 올릴 두툼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우선 원장에게 보고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인석 원장은 “시장님처럼 바쁜 분께 보고서를 이렇게 올리면 안 되는 것이네” 하면서 직접 보고서를 요약, A4 용지 채 한 장이 안 되게 작성해서 직접 연구원들에게 회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문서를 보고 “브리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이인석 원장이 왜 브리핑의 귀재로 불리는지 체감한 적이 있었다. 중국과 인천이 교류할 때 핵심 문제는 무엇이고 무엇을 우리가 준비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가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 안에 정확히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KOTRA에 근무할 때도 그는 그냥 평범한 직원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실제 오래 살았던 경험도 경험이겠지만 독일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연구하는 생활이 몸에 배인 그로서는 독일 사회와 한국 사회를 비교하고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보냈다. 여러 책을 찾아 읽고 자료를 스크랩하고 그보다 많은 시간은 사색하는 데에 보냈다.

 

냉전시대에 한국인으로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생활을 번갈아 경험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일 거예요. 지금도 서독에서 겪은 분단 경험에 대한 기억이 활동사진처럼 선명해요. 특히 1990년 10월 동독에서 동독인들과 함께 통일 현장을 목격했던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해요.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라고 여기고 있지요. (중략) 분단이 정치에 지배를 받는 동안 진영 간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됐죠. 대안이 있다면, 분단을 역사의 눈으로 보는 것이에요. 역사적 문제에 정치가 한 발 뒤로 물러선다면 비로소 국민들도 진영의 사슬로부터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요. (윤관옥, 「역사의 주체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 인천문화재단 기획, 『8인의 대화-21세기 삶의 길을 묻다』, 인천문화재단, 2020)

 

경세가로서의 그의 면모

그의 이런 고민은 2019년 출간된 『독일은 어떻게 통일되고, 한국은 왜 분단이 지속되는가』(이인석 지음, 도서출판 길)에 잘 드러나고 있다. 500쪽에 이르는 이 저서에서 그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되는 과정부터 1990년 통일에 이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이 책에는 서독과 동독의 갈등과 협력, 서독이 독일 통일을 위해 주변 국가와 어떻게 협상을 진행해왔는지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면서 한국과는 다른 독일의 분단과 통일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부는 한국이 1876년 한일수호조약 이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왜 분단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지를, 그간의 역사와 지정학적 특수성, 남북 양 체제와 주변 열강과의 관계 등을 두루 고찰한다. 책의 구성이 독일과 한국의 처지를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이인석 원장은 1부 독일 통일은 한국인의 시각에서 독일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집필하고, 2부 한국의 분단은 한국인이 아니라 국외자의 시선에서 조금 더 객관적으로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서도 역시 그의 경세가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통일에 이르게 되었는가, 즉 통일 관련 법과 제도적인 측면부터 독일 경제력의 역할, 정치와 외교, 국제 관계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살피면서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독일 통일 관련 이인석 저서
독일 통일 관련 이인석 저서

 

인천으로 돌아오다

이인석 원장은 1943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후퇴 때 연평도를 거쳐 인천으로 내려와 피난민의 아들로 인천에서 성장했다. 창영초등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제물포고등학교를 5회로 졸업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배다리 헌책방 골목과 도서관을 드나들며 푸시킨, 고골 같은 러시아 작가의 책을 읽고 시인들에 심취했다. 그렇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사색하고 글 쓰는 시간을 더 좋아해 동기들과의 교류는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 아니었다.

다른 한편 길영희 교장이 실시한 무감독 고사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회상한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파격적인 ‘무감독 고사’는 시험 시간에 따로 감독 교사 없이 학생들 스스로 시험을 치르는 것이었는데 무감독 시험은 지금껏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더없이 엄격한 내 인생의 감독 역할을 했다”고 술회한다.(<경인일보> 2024.5.2. 김성호, “배다리 헌책방 골목서 미래를 꿈꾼 이인석입니다”)

 

인천발전연구원 원장 내정 언론보도
인천발전연구원 원장 내정 언론보도

 

그는 피난민의 자식으로 인천에서 성장하면서 조금 더 자유롭게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동경하는데 그런 바람 때문에 서울대학교 독문과로 진학하게 된다. 군 생활 때도 국방대학원에서 외국 출판물과 간행물을 검토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면서 이런 그의 막연한 동경은 조금 더 구체적인 상을 갖추게 되는데 이는 졸업 후 KOTRA에 입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인석 원장이 본격적으로 인천과 연을 맺은 것은 2000년 청와대 비서관 생활을 끝내고 인천발전연구원의 원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어린 시절, 그리고 청년 시절을 보낸 고향으로 돌아와 그는 인천에서 자기의 역할이 있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배다리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한 헌책방 노인이 “아주 오래간만입니다”라는 인사를 건넸다. 40년 전 학창 시절 책방을 드나들던 까까머리 학생의 얼굴을 헌책방 노인이 단박에 알아본 것이다. “그때 아주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도시가 나를 기억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인천에 착근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경인일보, 앞의 기사)

 

인천재발견•도시재생•산업재건

그는 인천발전연구원 원장(2000년~2005년)을 거쳐 인천상공회의소 상근 부회장, 인천대학교 석좌 교수 등 인천에서 여러 자리를 거치면서 인천이 어떤 도시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를 보냈다. 특히 인천발전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인천재발견”이라는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해 그 결과를 토론회, 언론 기획 등으로 다양하게 외화하고 『인천재발견』이라는 단행본 책자 두 권으로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인천을 근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간 축으로 검토하는 한편, 횡적으로는 요코하마, 텐진 등 아시아의 다른 도시와 비교 연구하는 기획을 통해 인천이 어떤 도시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지역 사회에 알렸다. 또 하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였다. 사실, 2000년 초만 하더라도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은 낯선 때였는데, 도시 재개발이 아닌 ‘도시 재생’을 처음으로 강조하며 원도심을 어떻게 다시 살려낼 것인가를 도시의 역사와 연관 속에서 검토하는 작업을 연구원들과 함께 추진했다. 여기에 더해 ‘산업 재건’을 내세웠는데 중국으로 대부분의 제조업이 넘어가는 현실에서 인천은 새로운 산업구조로 나아가야 미래에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도시가 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인천재발견 관련 토론회 언론보도 기사
인천재발견 관련 토론회 언론보도 기사

 

‘인천 재발견’, ‘도시 재생’, ‘산업 재건’은 지금으로서는 익숙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세 가지 축으로 인천이라는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검토하고, 미래를 설계해 인천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보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이런 프로젝트에는 도시를 바라보는 그만의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풍부한 자원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인천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요. 경제의 서비스화, 첨단화, 디지털화가 가속화할수록 위치의 역할은 줄어들고, 장소가 도시 경쟁력을 판가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죠. 지리적 위치에서 장소로 경제의 축이 옮겨가고 있음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해요.(『8인의 대화』, 앞의 글)

 

인천의 미래, 과거와 현재에서 출발해야

‘위치’가 아닌 ‘장소’의 의미에 주목하자는 것은 그가 인천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의 기반을 이룬다. 2020년 인천문화재단에서 발간된 『8인의 대화』에서 이인석 원장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장 재직 시절의 열정을 잃지 않고 인천에 대한 애정을 쏟아 내고 있다. 그는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쉬임 없이 열정적으로 토로하는데, 당시 인천일보 윤관옥 편집국장과 대담한 기록에는 과연 인천이 어떻게 미래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가에 대한 경세가로서 그의 혜안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 차고 넘친다. 조금 길지만 그의 말을 대목대목 간추려 소개한다.

 

나뭇잎이 다 같아 보이지만, 세상에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인천 역시 대한민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도시죠. 이처럼 다른 도시와 다르도록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지리적 위치(장소)입니다. 지리적 위치는 흉내 내거나 모방할 수 없잖아요? 그 지리적 위치가 도시의 역할을 결정짓고, 그 역할이 바로 한 도시의 정체성을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중략) 인천을 정체성 없는 도시라고 하기보단 인천인들이 자기 지역의 정체성을 잊고 있다고 하는 게 보다 적절한 표현이라고 봐요. 항만도시는 알면서 관문도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게 인천의 현실이죠. 그러다 보니 도시의 성장과 발전 원동력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모습도 보이질 않는 것 같아요. (중략) 인천의 원도심은 우리나라 개항기 역사의 보고(寶庫)예요. 개항은 개국의 신호이기도 하죠. 그래서 인천은 다른 도시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어요. 개항과 함께 문명의 충돌을 경험했고 그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지 않나요. 중구가 그 현장이고, 그래서 개항기 건축물의 보고로 불리죠.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거리를 걸으며 개항기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죠. 이런 특성을 ‘지역 고유재’라고 불러요. 한 지역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자원이라는 의미인데, 세계적인 도시에선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떠오른 지 이미 오래됐죠. 세계적인 관광도시나 상업도시는 예외 없이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곳이죠.( 『8인의 대화』, 앞의 책)

 

인천은 지금도 어떤 도시의 비전을 갖고 미래로 나아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그는 경인일보와의 가진 인터뷰에서 “내용은 없고 꿈만 쫓는 구호에 인천시민이 중독되어 왔”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또 그렇게 구호만 앞세우는 정치인들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어떤 방향을 선택하건 ‘현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이나, ‘인천의 과거가 곧 미래라는 사실이 기억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인천의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다.

이인석 원장은 인생의 삼분의 일을 외국에서 보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을 인천에서 살았다. 그에게 인천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자기를 성장시킨 곳, 또 하나의 고향이다. 피난민의 자식으로 인천에서 성장한 그는 인천이 그 어느 곳보다 살기 좋은 도시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인천에서 강조한 의제(agenda/인천재발견, 도시 재생, 산업 재건)는 빛을 잃지 않고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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