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와 이솝이 던지는 1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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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와 이솝이 던지는 1가지 질문
  • 최원영
  • 승인 2024.04.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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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의 책갈피] 제150화

 

 

이상적인 삶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요즘 많은 사람이 TV에서 ‘자연인’의 삶을 동경한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현실에서의 삶이 너무나도 고된 탓에 그런 동경을 하는 건 아닌지요. 동양의 장자와 서양의 이솝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또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떤 깨달음이 필요할까요? 오늘은 두 분의 말씀 속에 담긴 지혜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자, 도를 말하다》(오쇼 라즈니쉬)에서 그런 삶이 어떤 삶인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해드리겠습니다.

 

한번은 장자가 강에서 낚시하고 있었다. 그때 초나라 사신 두 사람이 왕의 공식문서를 받들고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께서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든 채 여전히 강물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나라에 한 신령한 거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 거북이는 죽은 지 3천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귀한 상자에 넣어 사원의 제단에 모시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거북이는 죽어서 뼈만 남아 3천 년 동안 향을 맡으며 왕의 제사를 받기를 원하겠소? 아니면 진흙 바닥에 꼬리를 끌면서 돌아다닐지라도 평범한 거북이로 살아 있기를 원하겠소?”

그러자 두 사신이 대답했습니다.

“그야 물론 거북이로서는 살아서 진흙 바닥에 꼬리를 끌며 돌아다니는 편이 낫겠지요.”

이 말을 들은 장자가 말했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나 또한 진흙 바닥을 기어 다니고 싶으니까!”

타인의 시선에 신경 써야 하는 ‘재상’ 자리, 그리고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자유인’, 장자는 후자를 기꺼이 선택했습니다. 온갖 영예와 권력까지도 쥘 수 있는 제안이었지만 그 자리에 만약 오른다면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흔쾌히 제안을 거절했던 겁니다. 권력보다는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장자처럼 쉽게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자유’를 구가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행복한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를 배우지도 못했고, 그런 경험을 해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것이지요.

이솝우화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세상의 모든 교양, 미술이 묻고 고전이 답하다》(박홍순)에 나오는 우화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개구리들이 의논 끝에 자신들에게도 절대적인 힘을 가진 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개구리들이 신에게 왕을 보내달라고 간청하자 신은 커다란 통나무를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통나무 왕은 뜻밖에도 제법 명군이었습니다. 전에는 툭하면 서로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한 끝에 큰 싸움이 벌어지는 사태가 되풀이되었는데, 통나무 왕이 내려온 뒤부터는 그 위엄 때문이었는지 개구리들은 서로 얘기하는 목소리도 상당히 낮췄습니다. 그래서 개구리 나라에 기적적인 정적과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는 통나무 왕을 능가할 왕이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개구리들은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 말도 없는 왕에게 점차 불만이 생겼고, 다시 신에게 새로운 왕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강하지 않으면 왕이 아니고 무섭지 않으면 왕이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이리하여 하늘에서 다시 새롭게 왕이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커다란 학이었습니다. 학 왕은 내려오자마자 다짜고짜 개구리들을 잡아먹으며 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저 개구리의 선택이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통나무 왕이 이끄는 나라에서 살 때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개구리들에게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자유는 오히려 불평과 불만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들이 공포와 감시와 구속이 있는 어두운 세상을 불러들인 것은 아닐까요?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저렇게 노예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노예인 것도 모르고 개구리처럼 죽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이 우화를 접하면서 에리히 프롬이 “사람들은 자유에서 도피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한 말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무언가의 또는 누군가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이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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