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제물포, 표관과 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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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제물포, 표관과 변사
  • 김광성
  • 승인 2024.09.20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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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시대 - 김광성의 개항장 이야기]
(17) 표관
변화는 기억을 지워버린다. 광속시대에 편승해 남기느냐 부수느냐 논쟁이 이어지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遺構)들은 무수히 사라져 갔다. 외형적인 것만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정한(情恨)이 녹아 있는 기억마저 더불어 지워졌다. 인천 개항장을 그려온 김광성 작가가 최고와 최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항장의 근대 풍경과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 손때 묻은 물상들을 붓맛에 실어 재구성한다. 

 

1910년대 표관(75x35cm)
1910년대 표관(75x35cm)

 

흑백 무성 영화만으로도 만족스럽게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은막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활동사진(영화)들은

실로 충격적인 문화충격이었다.

육중한 기차가 관객을 향해 돌진해 오고,

서양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아 움직였다.

이 신비하고 경이로운 활동사진은 입소문을 타고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활동사진관 앞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왜정시대, 인천의 활동사진관 원조는 표관(瓢館)이다.

애관의 전신인 최초의 극장 ‘협률사’가 있었지만

협률사에서는 ‘남사당패’, ‘줄타기’, 성주풀이‘등과 ’신파연극‘을

흥행위주로 공연하였고

표관은 활동사진만 상영했다고 한다.

무성영화라고 하면 조용한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시대의 활동사진관은 다채롭고 풍부한 청각적 환경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달변가 변사(辯士)의 역할은 단연 백미였다.

악단의 연주를 신호로 상영시간 박두를 알리면

변사가 스크린 앞에 나와 인사를 한다.

상영될 영화의 내용을 마치 고대소설을 낭독하는 듯한 어조로 설명해 줌으로써

영화에 대한 관객의 이해와 흥을 돋운다.

영화가 시작되면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내거나

대포 소리도 효과적으로 내었다.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는 해설자인 동시에 연기자이고 무대감독이었다.

심지어 영화를 자의적으로 해독하거나 변조했으며,

퍼포먼스에 몰두하느라 영화 따위야 우습게 보는 변사도 있었다.

무성영화이니 변사 맘대로 해설해도 책임이 없었고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울렸다 웃겼다 해도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변사가 인기를 끌고, 누가 해설하느냐에 따라 관람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변사가 흥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자 각 극장은 전속 변사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영화를 광고했다.

영화가 끝나면 고관대작들이 목소리를 들으려

변사를 인력거를 납치할 정도였다.

영화 한 편을 해설하면 쌀 세 가마 값을 벌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고 하니

자연히 스타변사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표관은 광복 후 ‘문화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시(市)가 운영했으나

6.25 동란 통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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