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서구 할메산 - 유광식/ 시각예술 작가
세상이 성큼성큼 빠르게 변해간다. 가을 단풍의 붉고 발그레한 색들이 TV를 장식하고 있는 가운데, 인근 공단의 공장에서 화재 소식이 자주 전해져 간담을 서늘케 한다. 부쩍 늘어난 사이렌 소리가 긴장된 일상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세상은 전쟁의 딜레마에 빠져 있고 미 대선과 더불어 손익 계산기가 탁! 탁! 바쁘게 돌아간다. 다들 가을 산의 정취는 챙겨서 지내는지 궁금도 하며, 어지러운 정국은 누가 걷어찰지 또 한편으로 궁금한 때이다. 일상 속 작은 여유라고 생각하며 인근 산으로 향했다. 햇살 가득한 오후에 말이다.
인천지하철 2호선 완정역 부근은 검단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는 중요한 곳이다.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에 만수산, 서쪽에는 할메산이 있다. 가을 옷을 입은 할메산(서로 이음길 7코스)을 오르기로 한다. 독정역과 완정역 사이의 남북으로 이어진 할메산은 고도 105m의 낮은 산이지만 본디 이름으로는 큰(한) 산(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강화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 구간으로, 산 자체보다는 산맥의 의미가 강하게 투영된 이름을 지녀 당하동 사람들의 뒷동산 쉼터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독정역 부근에서 산에 올라 완정역 방향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1~2시간 정도 청량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두둑한 이유를 지니고 산을 오르지는 않는다. 산은 별다른 거부 없이 사람을 받아 주고, 어지러운 세상의 침입을 산이 잠시 막아준다는 막연한 기대로 오른다. 더 깊은 이유로는 어린 시절 산골 환경도 한몫 한다. 산책로를 찾다가 입구라고 하기에는 어설픈 철제 계단을 용기 내어 박차고 올라야 했다. 그러고 나서 푸른 칡잎의 무수한 환대를 받고서야 산으로 안겨 들어섰다. 초입에는 자동차 운전전문학원, 골프 연습장, 참숯가마 영업장이 있다. 옛 숙박 시설을 개조한 듯한 시설에는 철 지난 시절을 대변하는 문화가 하나씩 총총 박혀, 아니 입실해 있다. 달라진 점이라면 개 짖는 풍경만 없을 뿐이다.
이름도 재밌는 할메산의 이름을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지만 곧이곧대로 파악해서는 안 될 것이렷다. 워낙에 변형되어 불리는 이름이 많아서다. 그런데도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을 하게 된다. 걷던 산 주변으로 묘지가 많다. 이곳은 검단중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새 단장 중이다. 이때도 공사 기간이었지만 폭풍전야처럼 조용했다. 듬성듬성 보이는 군부대의 흔적과 중앙공원으로 탈바꿈시켜 제대로 한번 보여주겠노라는 현수막이 거리를 두고 게시되었다. 길은 고르게 평탄화 작업이 되어 있고 난간과 멍석 길이 놓여 있어 거닐기 수월했다. 참나무와 밤나무, 소나무의 바스락대는 소리는 눈 감고도(절대 그러면 안 되지만) 걸어갈 수 있는 안내자 역할을 해 주었다. 사실 주변엔 지금도 군데군데 제조업 시설이 많다. 이전에는 주거시설보다 더 많았겠지만 신도시 개발 여파로 보상 후 이주한 것 같다. 안 그래도 묘를 이장한 흔적이 많아 조만간에 있을 변화를 짐작하게 했다.
도토리 껍질이 많다. 귀여운 밤송이도 수북수북 떨어져 있어 만져보다가 손가락을 찔리고야 만다. 이정표에는 이 지역의 ‘L’ 대형마트와 ‘H’ 아파트의 이름이 등장한다. 안동포사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자잘한 계단을 지나 정상에 오르니 작은 평상과 생활체육기구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 평탄화 작업 흔적이 있었다. 부대 훈련진지가 있었던 모양으로, 혹시 전망대 겸 휴식 공간인 정자를 하나 지으려는 건 아닌가 싶다.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과거를 바라보는 눈인 것처럼 이곳이 검단의 미래를 눈여겨 볼 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될는지도 모른다.
산책로의 높은 가지로 인해 먼 곳의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만큼 식생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나무 종마다 이름표가 걸려 있어서 식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노부부가 산을 천천히 오르고, 홀로 오신 날다람쥐 아저씨, 반려견과 오른 모자 쓴 젊은 여성,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처럼 평상복 청바지 차림으로 오른 나도 오늘만큼은 숲속 친구들이었다. 내려오는 길이 깊은 숲과 작은 동굴을 건너 밝은 광채를 맞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신 도로에 가까워지면서 자동차 소리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평소보다도 더 컸다. 하늘은 높고 바람은 따듯해서인지 오르락내리락 구간을 큰 부담 없이 걸었다. 어느새 할메산 자체가 리듬감 있게 온몸에 스며 있었다. 앞으로 등산로가 조금 더 정비되어 중앙공원으로 우뚝 서는 날이 그려졌다.
정겨운 이름의 할메산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검단의 어떤 옛이야기처럼 깊은 사연이 있어 보였다. 할메산이 있는 완정역 주변에는 여러 다중시설이 있다. 마전도서관, ‘L’ 대형마트가 있으며 지역의 큰 병원인 검단탑병원이 있다. 병원명이 ‘TOP'인 걸 보면 그 위상을 새삼 바라보게 된다. 한편, 한 고등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부터 남녀공학으로 전환된 사립 특성화학교 문곡(文谷)고가 바로 그곳이다. 알고 보니 옛 인천세무고이기도 했고 그 이전 부평여상이 전신이던 학교였다. 이제 반세기가 되어 이곳 당하동에 새로이 터를 잡고 올해부터 남녀공학 문곡고가 되었다. 과거 인천세무고는 십정동 열무물 마을에 있었고 2017년에 서구로 이전했다. 열우물 작업을 진행한 작가로서 그때 자주 보았던 학교가 현재 생활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사실에 반갑고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와서 기다려 준 것 같다.
완정역 일대는 검단의 나들목처럼 여러 곳으로 향할 수 있는 길목이다. 원당동이나 마전동, 백석동, 불로동, 왕길동, 검단동 등 검단 생활자라면 알만한 곳들로 나아가는 위치이다. 이 장소를 알게 모르게 품는 산이 바로 할메산이 아닐까. 본뜻은 아닐지라도, 할머니의 연륜과 따듯한 마음으로 개발이 세차게 이뤄지는 검단의 공간을 살살 달래주는 작고도 큰 산으로 버텨줬으면 좋겠다. 온 산을 뒤덮은 칡넝쿨이 서로 손 맞잡은 것처럼 끈질기고 강력하게 말이다. 먼 과거이지만 돌아가신 할머니의 미소가 마치 구름에 비쳐 흐르는 듯한 가을, 10월의 끝자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