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섭은 근대한국학 물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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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섭은 근대한국학 물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예언자"
  • 송정로 기자
  • 승인 2024.08.0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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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중앙대 교수 『근대한국학의 뿌리와 갈래』 출간
마지막 장에 고유섭 사례 집중 조명
고유섭 동상(박상희 작, 2021)
고유섭 동상, 인천시립미술관 우현마당(2021 박상희 작, 15x19cm 종이위 수채)

 

조선 미술사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1905~1944)이 ‘근대한국학 물결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예언자’라는 평가가 나왔다.

일본 관학자들이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한국학을 일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무기로 삼아 생장시켰으나, 경성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인 고유섭은 외부자 흉내내기를 돌파하고 대항하여 ‘비열하게 출세하기 보다 차라리 절망을 선택한 이념형 2세대 한국학 연구자의 또 다른 원형이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육영수 중앙대 교수는 탈식민주의적 지식의 시각에서 한국학의 계보를 그려보는 『근대한국학의 뿌리와 갈래』(돌베게 한국학총서24, 2024.7.29)를 출간했다.

육 교수는 한국학의 계보는 1870년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대한 지식 생산, 유통의 첫 물결을 일으켰고, 일본 관학자에게 이어졌으며(1.5물결), 1920~30년대 조선 지식인이 제2의 물결을 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저자는 이 세 주체가 얽히고설켜 오늘까지 축적돼온 한국학(조선학)에 담겨있는 식민성을 직시하는 것을 이 계보 탐구의 주된 과제로 삼고 있다.

이 책의 2부 ‘식민지 시기 조선학 연구의 계보’의 마지막 장은 <조선 미술사 연구의 제2물결; 고유섭 찾아기기>다. 이 장에서 저자는 ‘독자적 조선 미술사 서술을 위한 출사표?: 고유섭’ 등을 소제목으로 고유섭의 사례를 집중 조명하여 경성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이 1930년대에 전개되는 조선학 연구의 형식과 내용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초창기 조선학 연구의 물꼬를 튼 안확(1886~1946)은 ‘조선 학자는 스스로 조선 미술사를 써야 한다’고 했는데, ‘안확이 날린 홀씨가 바람에 실려 고유섭의 어깨 위에 닿았다’. 안확과 고유섭은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선 미술사를 독창적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역사적 의무감에 공감했다.

고유섭은 거의 미답의 백지상태로 남아 있던 분야를 개척한 외국 학자들의 업적을 자신이 극복해야 할 숙제로 삼았다. 1904년 <일본미술>에 조선 미술사 최초의 논문으로 꼽히는 ‘한국의 예술적 유물’을 게재한 세키노 다다시는 ‘고물 등록대장 같은 미술사라는 약점이’, 독일 가톨릭단체 소속으로 1909년 한국에 파견돼 20년 체류하며 조선의 일상 풍속을 기록한 안드레아스 에카르트의 ‘민족적 감정을 이용한 비학구적 서술’이라는 약점이 각각 있었지만 고유섭은 ‘그 상처와 칭찬(명예훼손)이 여하튼지 간에 감사할 만한 현상’이라며 그들의 성과를 쓴약처럼 꿀떡 삼켰다.

고유섭은 그러나 후에 유고 『조선 미술사』에서 “2~3명 외국인의 감사할 만한 노작이 있었으나 학문적인 관점에서 추앙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할 만큼 자신의 학문에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청년시절 고유섭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졸업논문이 독일 미학자 콘라트 피들러의 미학이론을 정리한 것처럼, 유럽(특히 독일) 미술사와 예술담론이었다. 그는 서양의 예술적 흐름에 대한 전문지식을 렌즈 삼아 조선 미술사를 비춰보는 자기 훈련에 몰두했다.

서양 미학 이론과 미술사의 숲에서 고유섭은 어떻게 조선미술사라는 오솔길을 개척했을까? 저자는 고유섭이 초등학교 때부터 ‘조선 미술사의 출현을 절실하게 요망’했고, 대학 시절에는 그 꿈을 ‘나 자신이 이루고 싶은 것으로 바꾸었다’라고 고백(고유섭, 「학난」)한데서 찾았다.

고유섭은 1942년 발표한 「조선 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 문제」에서 조선미술은 ‘조선의 미의식의 표현체, 구현체이며 조선의 미적 가치 이념의 상징체, 형상체’라고 공식적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조선 미술의 특색 = 조선 미술의 전통‘이라는 단순 명백한 도식을 보충 설명하고자 중국 및 일본과 다른 조선 미술의 ‘전통적 성격’을 재발견한다.

고유섭에 따르면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무관심성’ 세 가지 성격이 조선 미술 전통 목록에 추가되어야 할 독창적 미학이다.

 

고유섭이 태어난 인천 중구 용동 기념비

 

고유섭은 주검과도 같은 수면의 생활, 본능적 생활에서 떨치고 깨어나 ‘자의식의 자각’과 ‘자의식의 확충’에 빛나는 ‘살아 있는 문화인’으로 거듭나야 하며 자기 주체성을 잃지 않고 로컬적 맥락에서 우러나는 ‘창조적 모방’을 생산하려는 의지로 충만했다.

서양 선교사와 일본 관학자 사이 불안하게 낀 고유섭은 그 틈새의 통로를 무사히 통과하여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파적 발전사관과 좌파적 민중사관을 왕래했던 그는 두 우물에 빠지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와 문법으로 조선 미술사 쓰기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곧 맛과 멋, 즉흥성과 투박미가 구성하는 고유한 한국 미학의 집에 깃들었다.

저자는 고유섭이 후대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역설적으로 그의 ‘독창적인 실패’에서 찾아진다고 했다.

고유섭은 스스로 ‘춤·노래도 하나 못하면서도 술상을 떠나지 못했던’ 자신은 ‘항상 초장, 중장뿐이요, 종장을 마치지 못했다’라고 괴로워 했다. 식민정부에 고용되어(개성박물관장) 일상생활을 견뎌야 했던 그가 겪은 ‘앙가주망(사회참여) 지식인’ 노릇하기의 어려움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제3의 공간에서 방랑하면서 ‘번역이 불가능했던 번역’에 매달렸던 고유섭은 ‘반쯤 성공’했다고 했다.

자기가 이어받은 ‘더러운 전통’을 전복적으로 뒤집어 독창적 조선 미술사 서술을 위한 효소로 삼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래서 그를 ‘밉고, 가엾지만, 돌아서면 그리워지는’(윤동주의 「자화상」) 시대상이기도 했다고 했다.

 

고유섭(1905~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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