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故 강인구 교수 - 김락기 / 문학박사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원류는 한반도”
일본의 역사에는 ‘고분시대(古墳時代)‘라고 부르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의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는 나라현(奈良県)에서 세운 가시하라고고학연구소(橿原考古学研究所)에서는 3세기 말 무렵에 나라현을 중심으로 대형 고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후 300여 년에 걸치는 시대를 ’고분시대‘라고 설명한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예로 들며 거대한 고분의 축조에는 동원된 인력의 음식과 생활용품 등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대형고분도 마찬가지라며 강대한 정치권력과 부를 가진 왕과 유력자가 출현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
일본 고분시대를 상징하는 대형고분이 앞은 네모지고, 뒤는 둥근 형태를 가졌다는 뜻의 ‘전방후원분’이다. 결국 3세기 말부터 6세기 말에 이르는 시기에 현재의 나라현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세력이 등장해 그 이후 일본 역사의 줄기를 만든 셈이다.
이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유의 무덤 양식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한반도에서 처음 전방후원분을 발견하여 그 원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학자가 강인구(姜仁求, 1937~2022) 교수다.
“강교수는 낙동강과 영산강유역에서 일본 특유의 고분으로 알려진 전방후원분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현장조사를 한 결과 일본을 깜짝 놀라게 한 완전한 형상의 전방후원분을 가야 지방에서 찾아낸 것이다.
강교수는 함안․고성 외에도 대구 신지동 1호분, 선산 낙산동 5호분, 고령 지산동 1호분, 성주 성산동 6호분, 의성 탑리고분과 한강유역 고분에서 전방후원분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이 놀라운 사실이 학계에 뒤늦게 발표되는 원인을 강교수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고고학적 조사연구 결과가 학문외적 특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남해안과 낙동강 유역 지장 고분을 정밀조사하면 더 많은 전방후원분이 발견될 것이라고 밝혔다. 강교수의 전방후원분 확인은 일본인들이 굳게 믿고 있는 임나일본부설을 뒤엎는 결정적 자료로 한국학계보다 일본학계의 반응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일본 동지사대학 모리(森浩一) 교수는 전방후원분의 기원 규명은 한일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경향신문〉1983년 7월 11일)
일본의 전방후원분이 사실은 한반도에서 기원하여 전파된 것이라는 강인구의 논지는 한국학계에서도 찬반이 엇갈리며 논란을 이어갔다. 하지만 제기된 논지에 대해 반론과 재반론이 연속하며 해당 분야의 성과가 축적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강인구의 역할은 그 결과의 옳고 그름을 떠나 높이 평가받고 있다.
꼼꼼한 현지조사와 동아시아 각 지역을 시야에 넣고, 지역 간의 문화적 흐름을 파악하여 고분 형태를 비롯한 여러 문화적 요소의 원류를 밝히려 했던 강인구의 방법론은 한국의 고고학, 고대사 연구에서 나타나는 여러 의문을 해결해 나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근래에도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나는 일본적 요소에 대한 해석, 가야는 경남을 중심으로 경북 일부 지방에 존재했다는 통설과 달리 지리산 넘어 전북 지방에서도 가야계 고분이 발견되는 양상에 대한 해석 등 문화적 요소의 전파와 접합, 변이를 되새기게 하는 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강인구의 선도적 문제 제기는 양과 질의 모든 측면에서 한국 역사고고학을 충실하게 채우는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역사학과 고고학을 아우른 학문의 넓이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를 지낸 김정배는 강인구의 저서인 《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학연문화사, 1997)에 대한 서평에서 “이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강 교수는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이후 고고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고고학의 풍부한 발굴자료를 분석 정리하고 해석하는 최종의 목표를 항상 문헌사학 쪽이 원하는 방향에 맞추고 있다. 바로 이 점이 한국고대사학계가 원하는 분야의 한 면이기 때문에 이 책의 진가는 고고학과 고대사학계가 모두 경청할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 저서에서 나타나는 많은 관점들이 논지의 정곡을 찌르든 또는 비켜가게 되든 간에 일단은 짚고 넘어가야 되는 논점이라는 점에서 좋은 책이 상재되었다고 하겠다.”(《역사학보》제160집, 1998) 라고 논평했다.
논평의 언급대로 강인구는 서울대 사학과에서 문헌사학을 익힌 후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1978년 일본 규슈대학(九州大學)에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사이에는 문화재관리국,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일했으며, 영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1985년 1학기부터 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활약했다.
저서와 논문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주로 고분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방법론과 문헌사학의 방법론을 종합하는 연구를 지속해 왔는데, 신라의 왕릉 비정(比定)이 상당수 오류라고 밝히는 등 고고학과 문헌사학 양쪽 모두를 아우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주장들이 많다.
역사학과 고고학을 아우른다는 측면에서 강인구의 특별한 업적이 있는데, 바로 《삼국유사》의 역주(譯註)사업을 주도한 것이다. 2003년 10월 5일 송고된 〈연합뉴스〉의 ‘〈연합인터뷰〉「삼국유사」역주 강인구 교수’에서 강인구는 "기존 「삼국유사」 역주본 중에는 1970년대 일본에서 나온 것이 학술적으로 가장 정평이 있습니다. 이 일본어 주석본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인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라는 사람이 주도적으로 이룩한 성과물입니다"라며 “다른 무엇보다 우리 민족 최고의 고전을 일본 사람 역주본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민족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라며 1995년부터 시작해 8년 만에 다섯 권으로 완결을 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주본 저술의 취지와 배경을 설명했다.
고고학 전공자가 문헌사학에서도 중요성이 매우 큰 《삼국유사》의 역주사업을 주도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강인구는 ”한국고대사 사료 가운데 고고학 관련 기록이 가장 많은 문헌이 바로 삼국유사입니다. 저는 삼국유사 기록을 이용해 신라왕릉에 관한 논문만 3편을 썼습니다"라고 강조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발간된 역주본에 대해 “삼국유사에 대한 번역・주석서는 현재 20여 종에 이르지만 대부분 번역에 중점을 두었거나, 주석의 내용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이번 역주본은 지금까지의 번역이나 역주본에 비해 내용이 가장 방대하고 최신 연구성과를 폭넓게 반영하고 있어 학술사적인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한겨레〉2003년 10월 3일)는 언급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인중과 인고가 키운 인재, 인천에 대한 애정
1937년에 태어난 강인구는 인천중학교를 3회로 졸업하고, 인천고등학교에 진학해 인고의 55회 졸업생이 된다. 인중을 졸업한 1953년은 제물포고가 개교하기 전이니 인고 진학이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천의 중등교육을 대표하는 인중과 인고에서 모두 조명할 특별한 졸업생이 되었다.
1956년 인고를 졸업한 뒤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해 평생 역사고고학자로 학문적 성과를 쌓아갔다. 강인구가 배움의 터전이었던 인중과 인고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밝힌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인중 시절 길영희 교장의 훈화에 대해 언급한 것이 남아있다.
“한번은 과외활동반을 마련하신 후 내용을 소개하시면서, 문예창작반, 운동반 등 여러 반을 두었으나, 그때 유행하던 웅변반을 두지 않은 이유를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생각을 여러 사람 앞에서 떳떳하게 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나 말만 미끈하게 잘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말은 진실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언행일치를 강조하시었습니다”(강인구, 〈인천중학시절과 길영희 선생님〉,《길영희선생추모문집》제4판, 1995, 법문사, 344쪽)
또 같은 책에서 “대학졸업 후 덕수궁에 근무하던 1964년 어느 초여름날, 진열실을 돌아보던 저는 분청사기와 청화백자를 관람하고 계신 교장선생님을 문득 뵙게 되었습니다. 너무 반갑고 놀라운 일이라 단숨에 달려갔습니다만, 순간 발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미술품 관람에 너무 열중하셔서, 그 분위기를 깨고 인사드릴 수 있는 용기가 저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한 시간 이상 걸려 8개의 진열실을 다 보시는 동안 5, 6보 떨어져서 줄곧 뒤를 따랐습니다. 건물 밖까지 배웅해 드리며 마음속으로만 깊이 인사 올린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어린 시절 맺은 인연을 성인이 되어서 깊이 기억하며 길영희 교장을 만난 순간의 반가움을 표현했다. 각자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중학교의 위상이 다른 탓이기도 하겠지만, 요즘 젊은세대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화다.
강인구의 인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알 수 있는 글도 있는데, 새얼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황해문화》11집(1996)에 실린〈삼목도와 선사유적〉과 같은 잡지 19집(1998)에 실린 〈인천의 진산, 문학산의 문화유적〉이라는 글이다. 관련 방면의 글을 몇 차례 써본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학술적 측면에 충실하면서 간결하게 글을 쓰셨다니”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한편, 《황해문화》10집(1996)에는 〈인천지방의 고문화와 새 문화의 진흥방안〉이란 글을 실었는데, 이것은 그 전 해인 1995년 11월 10일 인천대학교 지역사회연구소에서 개최한 《지방자치시대의 인천발전방안》이라는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약간 수정한 것인데 주목할 대목이 있다.
1995년은 인천이 강화와 옹진을 포함하여 광역시로 승격한 해이자 1991년의 지방의회 선거에 이어 단체장 선거가 처음 시행된 해로서 지방자치제의 온전한 부활을 알린 해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인천의 문화진흥 방안으로 문화유산 집중시설인 박물관과 미술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하며 ‘황해문명박물관’ 설립을 강조했다.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에는 주안, 남동, 소래, 군자염전이 있어 평안도의 광량만 염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생산량이 많았던 천일제염의 고장이었는데, 지금은 다 공단으로 바뀌어 없어지고 소래염전의 일부만 남아있습니다. 인천시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당연히 관심을 갖고 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하여야 할 것입니다”라며 인천과 소금의 연관성을 특별하게 부각해 보았다.
이 제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류의 생존과 생활에서 소금이 갖는 유구함과 중요성은 평범한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인천에 대한 각별한 관심에서 비롯된 강인구의 제언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의 제언을 적합한 방식으로 현실화해서 300만 시민이 소금의 고장으로서 인천을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인천을 인천답게 만드는 중요한 방안일 것이다.
2022년 2월 22일 향년 85세로 별세한 강인구는 인천시민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매일 같이 매스컴을 장식하는 정치인이나 스포츠인, 경제인들에 비하면 평생 역사고고학에 매진한 학자이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문화의 뿌리와 원류에 대한 탐구열로 동아시아를 비롯한 방대한 지역을 시야에 넣고, 문헌사학과 고고학 분야를 아우르며 연구 성과를 쌓은 학자를 인천이 키웠다는 자부심은 충분히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