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향 지휘봉 20년, 오케스트라 음악의 초석을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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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향 지휘봉 20년, 오케스트라 음악의 초석을 놓다
  • 유동현
  • 승인 2024.05.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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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39) 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김중석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단국대 교수(학장) 시절의 김중석
단국대 교수(학장) 시절의 김중석

 

‘조크’로 글을 시작한다. 1980년대 독일의 유명 교향악단이 공연을 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당시는 대개 일본 공연 투어 전후에 끼워 넣은 구색 맞추기 방문이었다. 연주회 이틀 전 서울에 도착한 단원들은 긴장감이 별로 없었다. 한국 관객의 수준을 얕봤다.

연습 대신 관광에 나섰다. 그들은 서울 시내를 둘러보다가 중도에 급히 호텔로 돌아와서 서둘러 악기를 챙겨 들고 연주회 장소에 모여 밤늦도록 리허설에 몰두했다. 그들은 낮에 접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차량들은 백(빠꾸)을 할 때 음악을 ‘연주’했다. 바로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왔다. 한국은 그들이 ‘음악의 성인’으로 받드는 베토벤의 작품을 길거리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지구촌 유일의 나라였다.

 

응봉산에 울려 퍼진 ‘양키두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아펜젤러 선교사는 인천에 첫발을 내디뎠다. 부인 엘라 여사 등 일행은 부둣가에 있던 대불호텔에 투숙했다. 그들은 조선의 불안한 정국으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했다. 안골(지금의 내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상경 시기를 관망하면서 목회를 시작했다.

7월 7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로 부친 풍금이 도착했다. 아펜젤러는 1시간여 동안 ‘만복의 근원 주 하나님’ 등 찬송가를 연주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하늘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 찬송이었다. 내리교회 신자는 물론 안골의 주민들도 서양 멜로디를 신기하게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인천사람들은 서양음악을 먼저 접한 ‘사건’이 있었다. 1882년 5월 22일 신헌을 대표로 한 조선 정부는 미국 전권대사 자격으로 제물포항에 온 슈펠트 제독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서양국가 중 최초로 맺은 조약이다. 장소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현 자유공원 팔각정(석정루) 아래 공터였다.

조약 체결 후 미국 군악대는 ‘양키두들’이란 음악을 연주했다. 조약 체결 당시 미국은 이미 국가(國歌)가 있었으나 조선은 없었다. 양 국가 대신 미국 남북전쟁 때 불리던 ‘양키두들’을 연주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연주된 최초의 외국곡이다. 낯선 선율은 바닷바람을 타고 응봉산 기슭을 휘돌아 인천 곳곳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우리가 서양음악을 접한 것은 15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근대 보따리에 들어 있던 서양음악

제물포항을 통해 이 땅에 들어온 개화의 보따리 속에는 진귀한 박래품들이 가득했다. 그중 음악도 들어 있었다. 인천은 우리나라 서양음악(양악)을 싹틔운 도시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합창단의 활동은 물론 오케스트라의 등장도 앞선다.

‘70년대편 인천시사’에 의하면 인천시립교향악단은 1966년 5월 4일 창단에 따른 조례가 승인됨에 따라 40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초대 상임지휘자는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고향 인천에서 음악교사를 하던 김중석이었다. 당시 26세였다. 시립으로는 국내에서 서울, 부산, 대구, 전북(전주)에 이어 다섯 번째로 창단되었다.

 

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위촉장 (1966)
인천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위촉장 (1966)

 

창단 기념공연은 6월 1일 오후 7시 30분 제 1시민관(현 인성여고 체육관)에서 열렸다. 이날은 제정된 지 두 번째 맞는 인천시민의 날이었다. 당시 시민의 날은 인천의 실제 개항일로 추정한 6월 1일이었다.

그랜드피아노가 없어 홍예문 넘어 인천여고에서 빌려다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온 단원이 동원되었다. 운반 중 단원들은 손이 까지고 피가 났다. 지금 같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연주자의 손은 악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천시향은 첫 레퍼터리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 등 10여 곡을 연주했다. 창단 공연에 이어 보름 후 KBS에 출연해 전파를 통해 전국 시청자들에게 창단 신고를 했다.

 

1968년 인천시향 시민관 연주회 모습
1968년 인천시향 시민관 연주회 모습

 

‘애호가’들이 이끌어 간 인천음악 역사

조례가 통과되자마자 교향악단이 일사천리로 창단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인천에 오케스트라의 토대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바로 인천관현악단 조직의 움직임이 있었다. 1947년 12월 13일 인천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현 인성여고 체육관)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후 인천영화극장(인영)과 애관극장 등에서 연주회를 이어갔다. 인천관현악단은 현악과 관악, 그리고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였다. 1950년까지 5차례의 연주회를 열었다. 6.25 전쟁의 발발로 오랜 기간 활동이 이어지진 못했지만, 전쟁 후 설립되는 지역 교향악단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인천시향 창단의 실제적인 근간은 육군경기지구 정훈(政訓)관현악단이었다. 이 악단은 6·25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3년 6월 인천에서 창단되었다. 1957년 해체되었다가 같은 해 인천음악애호가협회교향악단으로 다시 발족했다.

단체 이름이 흥미롭다. ‘애호가(愛好家)’는 어떤 일이나 사물을 몹시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요즘은 전 국민이 음악애호가라고 할 수 있다. 클래식부터 트로트까지 음악의 장르 중 한 분야 이상은 ‘몹시 사랑하고 즐긴다’. 당시 음악애호가는 서양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로 한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인천음악애호가협회교향악단은 줄여서 ‘인천애협교향악단’이라고 불렀다. 지휘자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이었다. 그는 1964년 동아방송 편곡지휘자로 스카우트되기 전까지 이 악단을 이끌었다. 1957년 11월 인천시민관에서 열린 인천애협교향악단의 제4차 연주회 무대에 까까머리 학생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협연했다.

인천음악애호가협회는 1960년 5월 19일 동산중학교 강당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 초청 인천시민위안음악회를 연다. 지역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 남녀 학생들로 신축 강당은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찼다. 초로의 지휘자가 무대 한가운데 섰다. 애국가 작곡가이자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 선생이 서울시향을 이끌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천 무대에서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

후에 인천애협교향악단 대부분의 단원은 인천필하모닉관현악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아홉 차례의 연주회를 가진 후 1966년 인천시립교향악단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다. 1981년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인천시향도 한 단계 도약했다. 마침내 모든 단원이 정식으로 봉급을 받게 되었고 85명의 단원으로 3관 편성을 했다. 당시 단원들 대부분은 서울 출신이었고 4분의 1은 유학파로 구성되었다. 비로소 ‘인천OB밴드부’라는 오명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시민회관에서 진행된 인천시향 정기연주회(1974)
시민회관에서 진행된 인천시향 정기연주회(1974)

 

화도유치원에서 처음 마주한 풍금

이제, 김중석(1940~2022)과 인천, 인천 음악과 김중석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인천에서 목재 사업을 했다. 네 살 때 인천 화수동으로 이사 왔다. 부친은 그때 화도교회 부설 화도유치원(폐원) 건물을 매입했다. 화도유치원은 1930년에 설립한 꽃섬유치원이 모태다. 중석이 음악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아주 중요한 공간이다.

화도교회는 1907년에 창립한 감리교회다. 내리교회는 교인들로 차고 넘쳐 더 이상 교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주일 예배만은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금의 동구 화수동인 ‘화도’와 창영동인 ‘우각리’에 각각 기도처를 설립해 교인들을 분산했다. 이것이 화도교회의 시작이다.

화도교회가 처음 터를 마련한 곳은 공교롭게도 당시 우상숭배의 1번지인 관왕(관우) 사당이었다. 교인들은 그 사당 내부만 고쳐서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화도교회는 일제 말 일제에 의해 폐쇄돼 모 교회인 내리교회와 합병했다. 해방되자 다시 화수동 옛 교회로 돌아가고자 했다.

(광복 후) 인천부 화수동 46번지에 소재한 옛 화도교회 자리로 돌아가 그 자리에 화도교회를 복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때는 옛 화도교회당과 담임목사 주택은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졌고, 유치원과 전도사 사택만 남아 있었는데, 그것도 다른 사람(송현성결교회 성가대 지휘자였던 ‘김충석’의 부친, ‘김중석’의 오기)의 소유가 되어 있었다. <인천화도교회 100년사 중>

중석의 부친은 사들인 한옥(사당) 사랑채를 교회에 임대했다. 어린 중석은 화도교회에 다녔다. 교회 안에 군정 때 쓰던 국방색 오르간(풍금)이 있었다. 예배 시간마다 오르간 반주에 맞춰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네 살짜리 어린아이의 귀와 눈이 반응을 했다.

예배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나가면 오르간 앞에 섰다. 짧은 다리로 공기 페달도 밟으며 건반도 눌러봤다. 손이 가는 대로 이리저리 눌렀다. 불협화음이 났지만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중석에게는 천상의 소리였다. 주일학교 선생의 도움을 받아 결국은 ‘학교종’, ‘반짝반짝 작은 별’ 등 간단한 동요를 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웬만한 찬송가는 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후 그 교회 전도사로부터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인천중학교 시절 화도교회 중등부 성가대 반주를 맡게 되었다. 제물포고등학교 시절에는 바흐, 베토벤, 쇼팽 등의 명곡들을 연주하기에 이르렀다.

 

국립극장에서 열린 인천시향 연주회(82.11.30) 팜플렛
국립극장에서 열린 인천시향 연주회(82.11.30) 팜플렛

 

‘소년의 기도’가 된 성덕당 피아노

그 당시 피아노는 ‘귀물(貴物)’이었다. 피아노 있는 집은 인천 전체에서도 손가락에 꼽았고 웬만한 학교도 풍금만 갖추고 있었다. 그는 수도국산 기슭에 있는 송현성결교회, 제물포고 음악실 등을 전전했다. 새벽 예배 끝나고 연습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새벽, 어둠을 가르고 학교에 가서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교내 순찰을 돌던 미술 선생으로부터 뺨을 맞기도 했다.(하필이면 그날 ‘미술’ 선생이 당직인 게 불행)

부친은 아들이 상과대학에 진학하길 원했다. 음악 공부를 접고 입시 준비를 했다. 고2 어느 늦가을 저녁 무심코 교내 강당 ‘성덕관’ 앞을 지나다가 그 안에 놓여있는 피아노를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건반을 터치하니 감정이 묘했다. ‘소녀의 기도’를 즉흥곡처럼 자유롭게 연주했다. 빈 강당 안에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때 갓 부임한 젊은 음악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들으셨다. (이번에는 ‘음악’선생인 게 다행).

선생님은 음악을 전공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며칠 밤을 고심하다가 부친을 설득하고 그 음악 선생님께 작곡을 배웠다. 그날 친 ‘소녀의 기도’가 결국 운명적으로 ‘소년의 기도’가 된 것이다.

그는 제물포고(2회)를 졸업한 후 서울대 작곡과에 진학했다. 당시 서울대 작곡과는 한해 10명이 정원이었다. 바늘구멍을 뚫은 것이다. 작곡과 학생들은 피아노 이외에 부전공으로 현악기를 의무적으로 이수해서 오케스트라 학점을 따야 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임원식 교수였다. 그때 그는 그 교수의 손에서 춤을 추고 있는 ‘지휘봉’에 눈길을 빼앗겼다. 임원식 교수는 후에 인천시향 초대 지휘자 김중석에 이어 2대 상임지휘자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김중석은 1962년 대학 졸업 후 인천 대건고에서 5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퇴근 후 지역의 음악인들과 오케스트라 연주 활동을 했다. 이 시점에서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 단장 리여석이 등장한다.

1971년 리여석은 부평여중의 ‘기타 잘 치는’ 국어교사였다. 그는 학교장의 제안으로 기타 합주단을 꾸렸다. 기타는 어떻게든 가르쳐 보겠는데 합주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화성학, 편곡 등 음악이론 공부에 매진했다.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바로 지휘법이었다. 지휘는 자신의 음악을 아끼고 사랑해 준 친구, 김중석 인천시향 지휘자를 통해 배웠다. 비로소 이론·실기·지휘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오늘날의 독보적인 ‘리여석 기타오케스트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66년 인천시향이 창단되었고 김중석은 제1대(1966년 6월~1984년 3월) 상임지휘자를 맡았다. 2대는 임원식 교수 그리고 다시 3대(1992년 1월~1993년 11월) 상임지휘자로 돌아온다. 모두 20년 간 인천시향을 이끌어갔다. 그 사이 1975년부터는 단국대 음대 작곡과 교수(학장)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은퇴 후 줄곧 홍예문 근처 송학동에 거주했다. 자신이 활약했던 옛 공회당, 시민관 무대와 지척에 있는 언덕 골목에 살았다. 2022년 5월 1일 향년 82세로 타계했다. 어느 시기에는 ‘안단테’로, 때론 ‘라르고’로 음악인의 삶을 살다가 이제 영원히 천상의 무대에 섰다.

 

김중석의 저서
김중석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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