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신용석 전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 - 김락기 / 문학박사
"소련에 입국한 최초의 한국 기자"
‘소련’이라 쓰고 ‘쏘련’에 가깝게 발음했던 나라는 해방 후 한국인에게 좋은 기억이 있을 수가 없는 나라였다.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사변의 배후였다는 것을 비롯해 1983년의 대한항공의 여객기인 칼(KAL) 007편 격추사건 등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미지의 무서운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냉전’이라는 전쟁 아닌 전쟁 속에서 남과 북이 갈라진 한반도 역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 질서의 어느 한쪽에 속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은 지식인을 비롯한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한쪽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상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의 이면에는 대상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도 자리잡기 마련이다.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 프랑스 파리 주재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일하며, 1970년대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직접 경험해서 한국 사회의 국제적 시야를 넓혀간 기자가 있다. 바로 인천이 낳고 키운 신용석이다.
조선일보에 재직하던 시절 그가 쓴 기사를 몇 개만 찾아봐도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1973년 7월에는 한국 기자로는 최초로 소련 당국의 공식 입국허가를 받아 2박 3일간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불안 속의 레닌그라드”라는 제목으로 일곱 번에 걸친 기사를 송고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현장을 취재하여 “사막과 초원엔 시체 냄새만 〈본사 신용석 특파원〉이집트 영내 전선을 가다”(조선일보 1973년 10월 25일)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1973년 1월과 2월에는 베트남전쟁의 휴전을 위한 프랑스의 중재(조선일보 1973년 1월 18일)와 미국, 소련, 중공(현재의 중국) 등 여러 국가가 참가한 “월남 국제회의” 개최(조선일보 1973년 2월 25일) 등을 보도하기도 했다.
파리특파원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도 할 수도 있지만,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하야와 서거, 왕위 대신 사랑을 선택했던 영국의 에드워드 8세와 세계적으로 알려진 화가인 피카소의 부고, 역시 저명한 화가인 샤갈의 인터뷰 등 이제는 역사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사도 현장감이 충실하게 묻어난다.
소위 ‘스트레이트성’이라고 하는 사실 전달 위주의 기사를 넘어서는 기획기사에서 신용석의 언론인으로서의 시대에 대한 고민과 통찰력이 한결 빛이 난다. 깊이있는 취재와 분석이 필수인 여러 기획을 통해 신용석이 한국사회에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프랑스 문화산책”(1976년 11월 ~ 12월), “유럽합중국 – 신용석 주불 특파원이 엮은 「오늘의 서구」”(조선일보 1979년 7월 ~ 8월), “프랑스 프랑스적 프랑스정신”(조선일보 1980년 9월 ~ 10월), “요즘 유럽에선…신용석 순회특파원이 본 「변신의 몸부림」”(1985년 5월), “변신하는 프랑스”(조선일보 1986년 7월), “소국이 잘사는 지혜 - 신용석 외신부장 탐방기”(1987년 3월)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을 아우르는, 제목만 들어도 웬만한 기자가 섣부르게 욕심내서 쓸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특히 “아이를 많이 낳자”, “다산유도 – 온갖 지원” 등의 부제가 붙은 유럽합중국 기획 기사의 내용을 읽어보면 합계 출생율이 0.7%대에 머물러 전 세계에서도 가장 낮은 처지인 2024년 대한민국의 고민이 40여 년 전 유럽의 고민과 잇닿아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기사 속의 단어만 우리나라에 맞게 바꾸면 요즘의 상황을 전한 기사라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감이 있다. 단순히 필력(筆力)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기자의 상황인식과 종합적 분석력, 통찰력이 탁월했기에 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위와 같이 유럽을 중심으로 발로 뛰며 쓴 신용석의 기사는 미국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바라보던, 조금 비약하면 미국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며, 그것을 우리의 시선이라 착각하던 한국의 지식인 계층에게 세상에는 미국과 소련 외에도 제3의 세력, 제3의 문화가 있으며, 장기적으로 우리의 독자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각성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듯이 1980년대 후반에 노태우 정부에서 “북방외교“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소련, 중국과의 수교 및 남북 관계의 획기적 개선의 시발점이 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같은 사건의 밑바닥에는 우리의 국익과 세계를 다각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바람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특파원 시절을 포함해 기자로서 신용석이 전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유럽 여러 나라의 상황과 각 나라의 외교 전략이 보일 듯 보이지 않게 한국 사회에 스며든 결과라고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直指心經》보도
파리특파원으로서 신용석의 활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고 하는 《직지심경》의 존재를 처음 한국에 알린 일이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찾아온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일이었다. 신용석의 회고(경인방송 유튜브 [인천, 라떼는 말이야] 2022년 10월 29일)에 따르면 파리특파원으로 일하며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 까지는 매일 국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기사를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천했는데, 그런 과정에서 친해진 도서관 아시아과 담당 직원의 귀뜸으로 ‘직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파견한 여러 신문사의 파리특파원이 있었음에도 신용석이 특종 중의 특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성실성과 자료조사에의 열의였다는 점은 곱씹을 만하다.
기사의 “유네스코의 관계관과 파리국립도서관의 동양서적 전문가 마리 로즈세규이 여사는『한국이 구텐베르크보다 75년 가량이나 앞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창안, 실용화한 것은 세계문화사에서 중용한 새 사실』이라고 지적하고『우리는 이번 국제전을 계기로 모든 세계의 문헌 – 교과서 – 백과사전을 정정토록 통보, 조처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세계 관계기관에의 통보와 더불어 모든 기록도 정정하게 된다.”는 내용처럼 ‘세계 최초 공인(公認)’이란 사실을 과장없이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인천일보에 ‘지구촌’이라는 기명 칼럼을 쓰던 신용석은 1100회의 마지막 칼럼 제목을 “청주 시민들의 직지(直指) 사랑”으로 붙이고 특종을 계기로 직지와 인연을 이어가는 상황을 소개했다. 이어 직지를 찍어낸 흥덕사지를 발굴하고 청주고인쇄박물관을 세워 직지의 가치를 빛내고 있는 청주시민 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인천일보〉2023년 7월 20일)
창영학교와 인중에서 싹튼 신문기자의 길
신용석은 1941년 인천에서 태어나 창영초등학교, 인천중학교(7회)를 거쳐 서울고등학교(12회),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揚武號)와 두 번째 군함인 광제호(廣濟號)의 함장을 역임한 신순성(愼順晟)이고, 아버지는 인천 최초의 의학박사로 일제강점기인 1942년부터 지금의 신포동에서 신외과(愼外科)를 운영한 신태범(愼兌範) 박사, 어머니는 재불화가(在佛畫家)로 유명한 이성자(李聖子) 화백이니 평범함을 뛰어넘는 집안 출신이다.
신용석은 앞서 언급한 2022년 10월 29일 경인방송의 유튜브 프로그램 [인천, 라떼는 말이야]에 출연해 한 사람의 일생이라기에는 너무나 폭넓은 삶의 행적을 진솔하게 풀어놓았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몇 가지를 소개해 보면 기자로서 신용석의 자질이 이미 어린 시절 인천에서 싹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용석이 다니던 시절의 창영초등학교에는 〈창영어린이〉라는 4면짜리 학교신문이 있었는데, 5학년 때 한 달에 산문과 동시 한편씩 쓰는 큰 역할을 맡았으며, 인천중학교 2학년 때 창간된 교지《춘추》에 반의 대표로서 편집위원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 부친 신태범 박사가 애독하던 《타임(TIME)》, 《뉴스위크(Newsweek)》,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등의 외국 잡지를 그림으로나마 보면서 일찍부터 신문, 잡지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서울대 입학 후에는 교내 신문인 《대학신문》 편집장을 맡아 큰 경험을 쌓았다. 조선일보에 입사하게 된 계기도 대학신문 기자 시절 비롯된 인연인데, 여기서 뜻밖의 이름이 나온다.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베트남전쟁》(1985),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 등의 저작으로 잘 알려진 고(故) 리영희 교수다.
리영희 교수는 1960년대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 중이었는데, 서울대학신문 편집장인 신용석이 몇 차례 리영희 교수에게 원고를 청탁하고 담당 교수를 설득해 게재했다고 한다. 신용석은 당시 “양적으로, 발행 부수로는 1등은 아니지만 조선일보의 편집국하고 논설위원실에 상당히 뭐랄까 진보적이라 할까, 세상을 보는 눈을 상당히 확대해서 좀 광범위하게 보는 그런 필진들이 여러분 있었어요”라며 리영희 교수, 양호민 전 한림대 석좌교수의 이름을 들었다. 진보, 보수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세상을 향해 열린 눈으로 깊이 있는 글을 쓰는 이들에 대한 존중이 크게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중 시절과 길영희 교장
”그러나 3년 동안 인중에서 배우고 닦은 후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되었을 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서울고로 진로를 정했을 때 교장선생님께서 서운해 하시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인중에서 손꼽히는 영재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신이 가르치시고 단련시킨 학생이 제고가 아닌 다른 학교로 진학한다고 했을 때의 교장선생님의 심경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서울고를 나와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인천에서 오랜만에 길교장선생님을 뵈었을 때 무척 당황했었다. 제고를 마다하고 타교로 진학한 본인을 어떻게 대하실 것인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의외로 반가운 표정을 지으시며 ‘자네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네. 제고 출신은 아니지만 인중 출신이니까 동창회에도 매번 참석해야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신용석, 〈인중과 길영희 교장선생님〉,《길영희선생추모문집》, 1986, 법문사, 372쪽)
여러 사정으로 제고가 아닌 서울고로 진학한 신용석의 멋쩍음과 그런 마음을 알고 있는 듯이 반갑게 맞이하는 길영희 교장의 너른 품을 느낄 수 있는 일화다. 이 회고에서 신용석이 떠올린 인중 시절의 기억은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운동장에서 만들어진 벽돌과 기왓장을 등에 지고, 언덕길을 올라서 제고 신축부지로까지 운반했”던 일이었다.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어 노동과 노동의 보람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회상은 단순히 지나간 일을 좋게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용석은 신문사를 그만둔 후 정치계에 뛰어들어 인천의 국회의원 선거와 인천시장 선거에 나서기도 했으며 한국인권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2014 인천아시안게임유치위원회 위원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해 왔다.
다방면에서 빼어나게 활약한 인물의 80평생을 정리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신용석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게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특파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천일보에 ‘지구촌’이란 코너를 맡아 2008년 7월 22일부터 2023년 7월 20일까지 장장 15년 동안 1100회에 걸쳐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파리특파원을 비롯해 기자로서의 오랜 경험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지구촌’ 연재를 끝맺는 시점인 2023년 7월 17일부터는 인천에 자리잡은 국제기구, 다국적 투자기업 등의 주요인사들과 대담을 통해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기획 〈신용석의 지구촌 in 인천〉을 현재까지 연재하고 있는 것도 언론인으로서 신용석의 깊이와 열정, 지역에 대한 애정을 잘 보여준다.
신용석의 부친인 신태범 박사는 1985년에 《인천 한 세기 – 몸소 지켜본 이야기들》이란 책을 출간해 후세들이 공백없이 인천의 옛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역할을 했다. 이제는 아들이 자신의 가계(家系)를 비롯해 어린 시절 겪은 인천의 모습, 장년 이후 인천을 위해 나선 시기에 고민한 인천의 모습 등을 차분하게 풀어내 주길 바라는 것은 필자 개인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