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터골'이 배출한 농구 국가대표,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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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터골'이 배출한 농구 국가대표, 최종규
  • 유동현
  • 승인 2024.02.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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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25) 농구 국가대표 최종규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프로농구 감독 시절의 최종규

 

1997년 프로농구가 출범했다. 인천 대우 제우스(대우증권 농구단)가 인천 연고로 창단되었다. 초대 감독으로 최종규(崔鍾圭)가 임명되었다. 그는 인천 태생으로 연세대학교 농구부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대우 창단 멤버는 코치 유재학을 비롯해 우지원, 김훈 등 연세대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인천 연고 팀에 인천 출신이며 연세대 농구선수였던 최종규가 사령탑에 앉는 것은 여러모로 아귀가 딱 맞는 일이었다.

당시 그는 일반인들은 물론 농구 팬들에게 다소 낯선 인물이었다. 당연히 농구 명문 인천 송도고 출신인 줄 알았다. 최종규는 제물포고(8회) 출신이다. 운동 특기생이 아닌 일반 전형으로 연세대학교에 들어가 주전 센터로 활약했고 대학 3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대학 졸업 후 모든 선수들이 들어가고 싶어 했던 실업 강호 한국은행팀에 입단했다.

그의 바스켓 인생을 이야기하다 보면 한때 아시아를 주름잡았던 한국농구의 한 시대를 더듬어 보게 된다. 1969년 태국 방콕에서 제5회 ABC대회(아시아선수권대회)의 막이 올랐다. 당시 아시아 농구판은 한국, 필리핀, 일본, 대만이 강하고 나머지 팀은 약체였다. 중국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아시아선수권대회 3회, 아시안게임 4회 우승한 필리핀이 최강이었다.

그 대회에서 한국이 결승에서 필리핀을 95-86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신동파는 혼자서 50점을 넣었다. 3점 슛이 없던 시절에 50점이라니, 던지면 들어갔다. 그날 이후 ‘아시아의 득점 기계’ 신동파는 필리핀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최고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한국농구의 최고 전성기이자 대전환점을 이룬 경기였다. 그 대회 멤버는 최종규를 비롯해 김영일, 김인건, 신동파, 유희영, 이인표, 조승연 등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드림팀’이었다.

이 기세는 이듬해 방콕 아시아경기대회로 이어졌다.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는 1970년 12월 9일부터 20일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열렸다. 원래 이 대회는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스포츠를 통한 국력 상승과 경제 발전을 위해 개최하려고 했는데 체육관을 지을 여건이 되지 못해 반납했다.

그 대회의 우승 후보는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유럽에서 축출되어 1974년까지 아시아로 출전했다. 그 나라는 유독 농구만 강했다. 미국 대학팀 선수로 뛰는 자국 유학생들까지 불러들여 선수단을 꾸렸다.

우리 팀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비록 14위라는 저조한 성적을 냈지만 이후 피나는 훈련을 반복하며 최고 수준의 팀워크를 이뤄냈다. 눈 감고도 패스를 주고받고 골을 넣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척하면 척’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을 81-67로 격파하고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1970, 방콕) 결승전 이스라엘과의 경기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1970, 방콕) 결승전 이스라엘과의 경기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농구는 몸으로 부딪히는 격한 스포츠다. 기세 싸움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YMCA체육관에서 한 달 동안 유도 연습을 했다. 특히 필리핀 선수들은 거친 플레이를 펼쳐서 그동안 우리 선수들이 많이 당했다. 유도 연습을 하고 나니까 ‘깡’이 생겼다. 몸싸움도 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집단 싸움 조짐이 보이면 우리 벤치에서 먼저 우르르 달려나가곤 했다. 필리핀이나 이스라엘 선수들이 도망갈 정도였다고 한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농구가 우승한 것은 처음이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난리가 났다. 김포공항에서부터 환영식이 대단했다. 군용 지프에 올라타 카퍼레이드를 했다. 당시엔 오픈카가 따로 없었다. 카퍼레이드는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이어졌다. 이게 참 고역이었다. 대회가 열린 방콕은 한여름이었다. 그 때문에 선수단의 단복은 여름 옷감으로 만들었다. 12월 초 영하의 날씨를 고스란히 오픈카에서 맞아야 했다.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개선장군들은 덜덜 떨며 카퍼레이드를 한 후 청와대로 향했다.

청와대 방문 후 인천으로 내려왔다. 최종규는 농구 대표선수 중 인천 출신인 유희영(송도고 출신)과 함께 금의환향했다. 동인천역 광장 앞에서 시민 환영 행사가 열렸다. 인천 선수단 중 덩치가 큰 여자 선수에게 눈길이 갔다. 투포환에서 우승한 박문여고 출신 백옥자 선수였다. ‘아시아의 마녀’와 함께 인천시청(현 중구청)까지 또다시 찬바람 쌩쌩 맞는 카퍼레이드를 했다. 인천 바닷바람이 더 매서웠다.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서울 시내 카퍼레이드(맨 오른쪽)
동인천 출발 카퍼레이드(백옥자 선수와 같은 차 배정)

 

이 땅에 농구가 전래된 것은 1907년 미국인 필립 질레트에 의해서다. 기청회관(현 YMCA 회관)을 통해 각지로 전파되었다. 학교를 중심으로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한국농구는 6.25 전쟁 이후 급속하게 발전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코트의 환경과 선수들의 기량이 한 단계 도약하게 되었다.

해외 전지훈련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 국내에 주둔한 미군 농구팀과의 경기는 그 갈증을 풀어줬다. 용산에 주둔한 미군 7사단 장병들로 구성된 농구단이 있었다. 당시에는 미군은 징집제였기 때문에 미국 대학 농구선수들이 포함되었다.

1960년대 미국은 후진국에 대한 원조에 열을 올렸다. 식량뿐만 아니라 문화와 스포츠도 원조를 했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미국 프로팀에서 은퇴한 코치 두 명을 2년 계약으로 한국에 보냈다. 물론 그들의 급여는 미국 국무성에서 줬다. 그때 한국농구의 기초가 단단하게 다져졌다.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비하인드 백 패스, 트위스트 슛(더블 클러치)은 물론 매치업 존 같은 고급 기술을 처음으로 배웠다. 그전까지는 왼손으로 드리볼을 해도 안정감이 없다고 귀싸대기 맞던 시절이었다.

최종규는 그들을 통해 농구 기술뿐만 아니라 영어도 배웠고 미국 문화도 접할 수 있었다. 훗날 감독으로 활동하던 시기 최종규가 한 농구 잡지와 인터뷰했던 내용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미국인 지도자들이 참 대단한 분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대표선수가 됐는데, 물론 그전에도 이경재 선생님 등 훌륭한 지도자들이 계셨지만 포 맨 플레이, 투 맨 플레이 아니면 속공 같은 거, 이런 걸 어떻게 해야 하고 그런 걸 배워 본 적이 없어요. 그분들은 그냥 ‘뛰어’ ‘야, 슬라이딩해’ 그런 식으로 정신력, 일본식으로 ‘도꾸다이’, 체력, 리바운드, 그런 식으로 배웠지, 플레이를 해 나가는데 하나씩 의미를 생각하면서 하는 게 없었다 말이지….”

 

최종규는 1968년 1월 농구의 본고장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해 있을 멕시코올림픽과 그 이듬해의 제5회 ABC대회(아시아선수권대회)를 대비한 대표팀의 미국 원정 훈련 길에 포함되었다. 당시는 1달러도 아쉬울 만큼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 사건과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목을 잡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다행히 미국 자선단체에서 초청했다. 돈이 없어서 군용 수송기를 타고 일본을 거쳐서 샌프란시스코 공군 비행장으로 도착해서 다시 민간 비행기를 타고 겨우 시애틀에 도착했다.

주요 도시를 돌며 2부 리그에 속한 미국 대학팀들을 찾아다니며 경기를 치뤘다. 첫 경기는 도착 당일 시애틀에서 저녁 7시 경기였는데 도착이 늦어 9시로 미뤄진 상태였다. 체육관에 이미 관중이 꽉 찼다. 부랴부랴 유니폼만 갈아입고 코트에 나섰다. 이동하느라 이틀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해 경기 중 교체 멤버들은 벤치에 앉아 졸 정도였다. 6연패로 시작한 미국 전지훈련의 성적은 총 6승 11패.

 

미국 전지 훈련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미국 전지 훈련 중 (오른쪽에서 두 번째)

 

제물포고는 언제부터 농구부가 있었을까. 제물포고 3회가 2학년 때부터 시작됐다는 당시 재학생들의 증언이 있다. 1회 입학생 전체 정원은 37명으로 고작 한 반에 불과했는데, 2회부터 두반이 됐다. 최초 농구팀은 3회 2명, 4회 5명으로 구성됐다. 농구부를 전담하는 지도교사가 따로 없어 그냥 자체적으로 연습을 했다. 

농구부 선발은 선배들이 갓 입학한 1학년 교실을 돌며 일단 키 큰 학생을 지목했다. “이따 방과 후 농구장으로 나와”. 지목된 학생은 분위기상 농구장에 나가야 했지만 바로 부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선배들의 눈에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본인이 하겠다는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인천중학교에는 이미 농구부가 있었다. 중학교도 이런 과정을 거쳤고 중학교 때 농구를 한 학생은 고등학교에서 당연히 선수로 뛰었다. 교내에서 가장 키가 컸던 최종규를 비롯해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 과정을 거쳐 농구부가 되었다. 키큰 가수 송창식도 인천중학교에 다닐 때 농구선수로 뛰었다는 증언이 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학교에서 유니폼 정도는 제공했다. 문제는 농구화였다. 당시 국산 농구화는 아예 없었고 부잣집 아들만 양키시장에서 미군들이 신었던 중고 구제품 농구화를 구해 신기도 했다. 대부분 겨우 말표 운동화를 구해서 연습을 하곤 했는데 달리다 급하게 정지하면 옆 부분이 터져 나갔다. 그날은 헤진 운동화를 겨우 끌다시피 하거나 아예 맨발로 집에 돌아가야 했다. 운동화를 바로 구하지 못하면 며칠 동안 맨발로 연습을 했다. 애지중지 운동화를 아끼기 위해 고무신을 신고 등교했다가 상급생한테 혼나기도 했다.

5, 60년대 제물포고 농구장은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코트였다. 모든 학교가 흙바닥에서 연습을 할 때 제고 농구부는 시멘트 코트에서 뛰었다. 비가 내려도 대걸레로 몇 번 닦아내면 바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6.25 전쟁 후 한동안 교정에 미군이 주둔했던 탓이다. 미군들은 운동장 한구석에 시멘트로 농구코트를 만들어 놓고 자기들끼리 시합을 하며 즐겼다. 미군이 떠난 후 학생들이 그것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그 덕분에 다른 학교 선수들보다 드리볼 실력이 뛰어났다.

제물포고 농구부가 실력이 좋았던 것은 단지 코트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좋은 연습 상대가 있었다. 자유공원 너머에 있는 인천중산화교학교 선수들과 정기적으로 연습경기를 했다. 화교 학생들은 대만(자유중국)의 영향을 받아 농구를 즐겼고 그 실력도 뛰어났다. 가끔 월미도도 건너갔다. 그곳에 주둔한 미군들과 체육관에서 친선경기를 한 것도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게 해 주었다.

 

제물포고 농구팀(12회 졸업 앨범)
제물포고 농구팀(12회 졸업 앨범)

 

현재 최종규는 미국에 거주하고 하고 있다. 그와 대면하거나 유선을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지만 접촉이 쉽지 않았다. 대신 그와 함께 인천중학과 제물포고를 다니며 농구부 1년 후배로 활약한 노영식(제고 9회, 중등 교사 출신) 동문을 통해 당시 농구부와 최종규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었다.

최종규는 학생 시절 인성여고 부근(현재의 신포로 31번길 또는 신포로 35번길로 추정)에 거주했다. 신흥초를 졸업한 후 인천중학과 제물포고에서 공부했다. 6년 내내 홍예문을 넘나들며 등하교했다. 현재 공식적인 프로필에 그의 신장은 188㎝로 돼 있다. 고교 시절 이미 눈에 뛸 만큼 키가 컸다. 아마 키 만큼이나 발도 컸을 것이다. 당시 그에게 맞는 국산 운동화는 없었을 것이다. 가정 형편이 그리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에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 덕분에 일제 농구화를 신어 모두에게 부러움을 샀다.

제물포고 농구부의 전성기는 최종규가 있을 때였다. 그의 포지션은 센터였는데 외곽 슛이 좋아 포워드로도 활약했다. 당시 그의 실력은 인천에서, 아니 경기도에서도 최고였다. 당시 최고의 대회는 전국체전이었다. 최종규가 고1이었을 때 제물포고는 대구에서 열린 제43회 전국체전에 경기도 대표로 출전했다. 당시 인천시는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경기도 대표가 된다는 것은 도내에 속한 인천을 비롯해 수원, 안양, 평택 등의 고교 농구부 중 최강이란 의미다.

물론 인천 송도고도 농구부가 있었다. 1960년대 초 제고 9회 때까지는 송도고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후 송도고는 교실 2개를 터서 실내 농구장을 만들고 밤 10시까지 훈련을 했다. 학교의 적극적인 후원과 유희영, 김동광 등 좋은 선수들을 스카우트해서 전국에서 손꼽히는 농구 명문고가 되었다. 제고의 농구는 지역 예선에서 발목이 잡혀 더 이상 전국대회에 나가질 못했다. 당시 전국 최강은 신동파가 속한 휘문고와 김영기 활약한 경복고였다.

제물포고의 모든 운동부는 특기생을 선발해서 운영하지 않았다. 일반 학생들이 운동부원이 되었고 선수들은 모든 수업을 다 받은 후 자율적으로 훈련을 했다. 간혹 선배의 지도를 받았는데 농구부는 3회 졸업생 조병제가 군 복무 후 학교에 와서 후배들을 지도했다.           

운동부에 대한 학교의 지원도 특별하지 않았다. 심지어 농구 골대(림)에 다는 그물망(網) 조차도 아쉬웠다. 최종규가 선수로 뛸 때 농구 그물망을 달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13회가 연습할 때 비로소 림에 망을 달았는데 그것도 연습할 때만 달았다가 끝나면 다시 떼 내야만 했다. 비바람에 닳지 않도록 한 것이다.

서울 쪽에서도 당연히 최종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는 농구 명문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신동파의 1년 후배였다. 그는 신동파와 함께 난공불락 연세대의 전성시대를 이끌어갔다. 3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았다. 국가대표 선수로 뛰다가 1974년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고질적인 무릎과 발목 부상 때문이었다. 그는 은퇴 이후 태평양을 건너가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연세대 선수 시절(맨 왼쪽)
연세대 선수 시절(맨 왼쪽)

 

1993년 모교 연세대학교의 총감독으로 부름을 받았다. 1996년까지 연세대에 있다가 바로 연세대의 OB팀이라고 할 수 있는 대우증권 농구단 창단 때 지휘봉을 잡았다. 이후 프로농구로 전환해서 출범했을 때 인천 대우 제우스의 사령탑에 앉았다. 프로 원년 당시 작전타임 때 통역을 거치지 않고 외국인 용병 선수들에게 유창한 영어로 직접 지시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미국 이민 생활을 통해 체득한 영어 실력 덕분이었다.

영어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경기 중 매너 있는 언행과 깔끔한 복장으로 ‘코트의 신사’라는 별칭이 붙었다. 한국 프로농구 리그 역사에서 지금도 손꼽히는 신사 감독이자 덕장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그는 최고의 다혈질이 다 모인 프로농구 감독 중에서 웬만해선 큰 소리 내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원주 삼보 엑써스(1999~2001) 감독 시절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야생마 ‘농구 9단’ 허재를 순한 양으로 조련해 팀을 이끌게 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는 농구계의 ‘전설’이다. 그때 한국 프로농구 사상 그동안 예가 없었던 정규리그 3위 이하의 감독 중에서 유일하게 KBL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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