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시대정신이 된, 인천이 낳은 가객 - 송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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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로 시대정신이 된, 인천이 낳은 가객 - 송창식
  • 이현식
  • 승인 2024.02.05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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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23) 가수 송창식 – 이현식 / 문학평론가
인천in이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의 방식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가수 송창식(출처, 서울시 50+포털 홈페이지)
가수 송창식(출처, 서울시 50+포털 홈페이지)

 

가수 이상의 가수 송창식

한국 사람 치고 가수 송창식을 잘 모르는 사람은 아주 어린 세대를 빼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음악인이다. ‘한번쯤’, ‘피리 부는 사나이’, ‘왜 불러’, ‘고래사냥’, ‘사랑이야’, ‘나의 기타 이야기’, ‘맨 처음 고백’, ‘푸르른 날’ 등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노래가 동시대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 1977년 한 해만 빼고 MBC 10대 가수에 연속해서 선정되었고 1975년에는 최고 인기가수상과 최고 인기가요상을 동시에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기록만으로 송창식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또 그를 두고 한때 인기 많았던 7080 대중가수 중 한 사람쯤으로 평가하는 건 그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중학교에 입학하다

송창식은 1947년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는데 한국전쟁통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역시 전쟁 직후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송창식은 천애 고아나 다름없이 성장했다. 그렇게 송창식은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신흥국민학교를 졸업했고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해, 가기 어렵다는 인천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이때가 1960년이었다. 인천중학교는 중학교 입시가 살아있던 그 시절, 경기중학교나 서울중학교처럼 공부 잘하는 학생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경기도를 대표하는 명문 중학교였다.

중학시절 송창식(TV조선 방송캡처)
중학시절 송창식(TV조선 방송캡처)

그러나 그는 너무나 가난해 공책을 살 돈도 없고 종이 한 장 구하기도 어려워 중요한 수학공식 같은 걸 팔뚝에 적어야 할 정도였다. 친척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얻어먹고 학교를 다녔는데 음악 수업 때, 당시 음악 담당이던 양윤식 선생의 눈에 띄었다. 양윤식 선생은 성악을 전공한 분으로 당시 교장이던 길영희 선생께서 특별히 모셔온 분이었다. 당시 송창식의 중학교 동기 김윤식(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의 회고를 들어보자.

이 친구가 중학 2학년 때, 음악시간에 양윤식 선생님 눈에 띈 거야. 왜냐하면, 목청이 좋았거든. 하루는 음악 실기 시험을 치르는데, 우리는 아직 변성도 안 돼 그저 끽끽거리는데, 이 친구는 노래를 부르는데 이건, 완전히 어른처럼 바이브레이션을 하는 거야. 그때 모두 깜짝 놀랐지. 그 뒤로 몇 번인가 음악시간이 끝나면 선생님이 송창식을 불러서 뭐라 말씀하시곤 했어. 공부를 잘하는 친구여서 당연히 제물포고등학교로 진학할 거라 생각했는데 서울예고로 갔더군. 정확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당시 양 선생님이 너는 성악을 전공하는 게 좋겠다고 권해서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어릴 때부터 목소리가 커서 아이를 잃어버려도 큰 소리 나는 곳에 가면 금방 어린 창식을 찾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중학교 때 담임을 했던 심재갑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음악적 재능이 남달라 무슨 음악이라도 한번 들으면 그걸 악보로 옮기고 스스로 작곡도 척척해서 주변에서는 ‘한국의 모차르트’라고 사람들이 평할 정도였다고 한다.

 

학창시절 송창식 뒷줄 맨 오른쪽 끝(TV조선 방송화면 캡처)
학창시절 송창식 뒷줄 오른쪽 끝(TV조선 방송화면 캡처)

 

가난한 시절, 노숙자 같은 삶을 살다

그런 그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에 원서를 내고 수석으로 합격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를 붙잡는 건 가난이었다. 1학년을 간신히 마치고 더는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제도가 한국전쟁으로 인한 군경유가족 자녀는 퇴학시킬 수 없다는 규정으로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 학교 수업은 1년만 마친 셈이니 중퇴나 다름없지만, 법적으로는 서울예고 졸업이 최종학력인 셈이다.

이때부터 송창식은 노숙자 같은 삶을 이어간다. 남의 집 헛간이나 창고, 역 주변에서 잠을 자면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일이라면 도둑질 빼고 무슨 일이건 했다. 공사판을 전전하기도 하면서 추운 밤을 홀로 버텨내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굶지 않고 어떻게든 밥을 먹는 게 그 시절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사람이 가난하면 어느 때는 불만 같은 게 생긴다구요. 감정적으로도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도 생기고. 그럴 때면 이거 내가 안 갖고 싶어하는 거야. 그렇지 않나요? 그거 갖고 싶어하는 거보다 안 갖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거. 이렇게 극한 상황에서 탈피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거, 이런 테크닉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익혔어요.(EBS 방송인터뷰에서)

다행스럽게도 그는 지독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이게 고생이라고 느끼지는 않았다고 한다. 가난에 대한 자의식과 억눌림을 내면에서 스스로 극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손에 잡히는 책이나 신문 등, 읽을거리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속독(速讀)이 몸에 밴 것도 이 무렵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시봉 그리고 트윈폴리오

그러다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일이 생긴다. 또래 중 대학생 친구들이 있었고 특히 홍익대 친구들이 많아 학교에 놀러가는 일이 잦았는데 송창식의 노래 실력을 눈여겨본 친구 하나가 그를 당시 음악감상실과 젊은이들의 현장 공연으로 이름을 얻어가던 명동의 세시봉으로 데려간 것이다.

대중가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불렀던 노래는 오페라 아리아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남루한 옷차림, 중고 악기점에서 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볼품없는 기타를 들고 아직 채 소년티를 벗지 못한 한 청년이 부르는 이태리 아리아가 청중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게 되면서 그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 청년 송창식은 밥을 먹여주겠다는 조건에 응낙하며 세시봉의 단골가수가 된다. 그러면서 드디어 1967년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를 결성하고 앨범을 내게 된다. 이때 처음 발표한 곡이 ‘하얀 손수건’이다.

 

1960년대 세시봉
1960년대 세시봉
트윈폴리오 데뷔 무렵 송창식과 윤형주
트윈폴리오 데뷔 무렵 송창식과 윤형주

 

트윈폴리오의 첫 번째 앨범은 비록 대부분 번안곡이기는 했어도 이 앨범을 계기로 포크송이 한국 대중가요의 새로운 트랜드로 떠오르게 된다. 여전히 ‘뽕짝’이라고 불리는 트롯트가 대세이던 시절, 그리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미국 팝 음악 사이에서 한국인의 정서에 더욱 가까운 ‘포크 음악’이 번안의 형태로 대중들의 귀를 사로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트윈폴리오’는 윤형주의 미국 유학으로 해체되고 송창식은 솔로로 다시 혼자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동아일보 1968년 12월 21일 트윈폴리오 리사이틀 공연소식 기사
동아일보 1968년 12월 21일 트윈폴리오 리사이틀 공연소식 기사

1971년 첫 번째 송창식의 정규 앨범에는 그가 직접 작곡하고 이장희가 작사한 ‘창밖에는 비 오고요’가 실려 있다. 정규 앨범에 수록한 곡으로 그가 직접 작곡한 첫 번째 노래였다. 이 노래 외에는 대부분 외국 곡에 그가 작사한 것들이었다. 이후 1972년 정규앨범에는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나그네’, ‘자장가’를 비롯해 윤형주가 작사하고 그가 작곡한 ‘비와 나’, 김민기가 작사하고 그가 작곡한 ‘내 나라 내 겨레’ 등이 수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1969년 뮤지컬 영화 <푸른 사과>에 그가 조연으로 등장하고 이 영화에서 ‘내 나라 내 겨레’가 연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푸른 사과>에는 앳된 송창식이 등장한다. ‘내 나라 내 겨레’는 1972년에 수록되었지만 1969년에 이미 작곡되어 발표된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이어 1973년 발표한 정규 앨범에는 대부분 그가 직접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가 대다수를 이룬다. ‘꽃보다 귀한 여인’, ‘밤눈’, ‘철 지난 바닷가(최영호 작사)’가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점점 그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로 앨범을 채워가기에 이른다. “가객 송창식 님을 좋아하는 사람들(https://www.songcs.net)”이라는 홈페이지에 그의 여러 앨범들이 아카이브 형태로 정리, 소개되어있는데 이에 따르면 1973년 앨범은 발매일이 1973년 11월 29일이다. 그가 6개월 단기 보충역으로 군에 입대한 것이 1973년 10월이니 아마도 이 앨범은 그가 입대한 이후에 발매된 것으로 보이고 작업은 군 입대 이전에 모두 마쳤을 것이다.

 

군복무시절 송창식(TV조선 방송화면 캡처)
군복무시절 송창식(TV조선 방송화면 캡처)

 

송창식만의 음악으로 전성기를 누리다

그런데 송창식의 음악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군 복무를 계기로 찾아온다. 1967년부터 군에 입대할 때까지 6~7년의 기간에 그는 더 이상 밥을 굶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가수로서 이름도 얻게 되었지만 여전히 뭔가 부족한 듯 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편함을 갖고 있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그는 어느 순간 그 불편함의 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전까지는 기고만장했죠. 그러다가 군에 가서 나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많이 실망했어요. 군 시절 병무청에 근무했는데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로 주한미군을 위한 TV 방송 프로그램, 당시 공중파로 채널 2에서 시청 가능했다)에서 미국 아마추어 콩쿨대회를 방송한 적이 있어요. ‘프로들만큼이야 하겠어?’ 생각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걸 보다가, 나하고 비교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는 그들이 더 나은 거예요. 그래서 너무너무 분했지.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그럼 과연 자질이 없는 거냐, 아니면 바보냐, 병무청을 다닐 때 눈이 부어서 다닐 정도로 많이 울었어요. 억울해서.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이게 내가 할 걸 내가하지 않고 남이 할 걸 내가 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오더군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그전과는 다르게 이론도 정립하고 다른 노래가 나오게 된 거죠.(EBS 방송 인터뷰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새로 내놓은 앨범은 그 이전과 확연히 다른 노래들이다. 오늘의 송창식을 만든 노래는 대부분 군에서 제대하고 난 이후에 발표된 것들이다. ‘맨 처음 고백’, ‘한번쯤’, ‘피리 부는 사나이’, ‘고래사냥’, ‘왜 불러’, ‘그대 있음에’, ‘날이 갈수록’, ‘가위바위보’, ‘사랑이야’, ‘나의 기타 이야기’, ‘토함산’, ‘돌돌이와 석순이’ 등 70년대를 대표하는 노래는 그가 자신의 음악을 찾겠다는 다짐 이후 만들어져 발표되었다. 특히 ‘사랑이야’와 ‘나의 기타 이야기’가 수록된 1978년 앨범은 한국대중음악 명반 100에 선정되기도 했다.

 

군 생활이 끝나고 발표한 1976년 송창식 독집 앨범
군 생활이 끝나고 발표한 1976년 송창식 독집 앨범

 

시대의 아이콘이 된 송창식

송창식은 이미 우리 전통적인 대중가요 양식이 된 트롯트와 서양 포크 계열의 팝음악, 서양 고전음악, 국악이나 민요조의 가락을 그만의 양식으로, 다시 종합해서 우리 고유의 대중음악을 만들어내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곡조나 ‘한번쯤’, ‘가나다라’, ‘푸르른 날’ 같은 노래는 그 어디에도 없던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인 동시에 고전의 반열에 올라간 노래들이다. 그게 고전으로 손색이 없는 이유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대를 초월해 우리에게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송창식은 1970년대 고도성장과 저항의 연대를 상징하는, 한 시대의 문화를 온전하게 노래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함을 더 한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가 압축적 성장으로 본격적으로 달려가던 첫머리이다. 고도성장과 산업화, 풍요로움이 낳은 자유롭고 발랄한 새로운 세대를 낳은 시대이자 권위적 유신독재 체제에 항거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시대가 1970년대이다.

송창식의 노래는 이런 자유롭고 발랄하면서도 저항적이었던 1970년대 대중의 정서를 온전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시대의 정신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고래 사냥’, ‘내나라 내겨레’는 그 시대의 저항을 대중적 감각으로 잘 표현한 노래이면서 ‘한번쯤’, ‘맨 처음 고백’ 같은 노래는 사랑의 정서를 구체적인 생활 감성에 빚대어 표현한 노래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 ‘나의 기타 이야기’ 같은 노래는 송창식 스스로 음악가로서 자신의 존재론적 자아를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구별되지 않고 하나로 어울려 1970년대라는 한 시대를 표상한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공동체와 개인의 다채로운 면모들이 송창식의 노래에는 담백하고도 사실적으로 담겨있기에 동시대를 살아간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고 마침내 시대를 뛰어넘어 고전의 반열로 올라가게 된 것이다.

 

MBC 10대 가수 공연실황
MBC 10대 가수 공연 실황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살린 노래들

또 하나, 송창식 노래는 음절 단위로 끊어지는 한국어의 특성을 살려 그것을 적절한 곡조로 구현해 냄으로써 한국어의 음악적 특성을 최고조로 살려내었다는 데에 특장점이 있다. ‘가나다라’가 대표적인 곡이겠지만 그의 노래에는 한국어 가사와 곡조가 매끄럽게 어우러져 표현되어 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그는 한국어에 미세하게 남아있는 성조를 잘 살려 거기에 어울리는 곡조를 붙임으로써 누구라도 쉽게 가사를 음미하면서 노래를 읊조리게 만든다. 이는 그의 노래 가사를 소리내어 읽어볼 때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왜 불러’, ‘한번쯤’, ‘피리부는 사나이’ 등을 곡조 없이 가사만 읽어 보면 그가 한국어의 음절과 성조를 어떻게 우리 특유의 가락과 곡조로 맞춤하게 표현했는지 알 수 있다.

 

영웅의 퇴장, 송창식을 기억하는 방법

송창식은 1986년 정규 음반을 끝으로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 정규 음반에는 ‘참새의 하루’, ‘선운사’, ‘담배가게 아가씨’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담배가게 아가씨’는 한국형 랩의 시원(始原) 같은 곡이다. 그러나 그는 이 앨범 이후에는 노래만 부르고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판도가 변했어요. 그동안 대중음악을 듣고 즐기던 세대가 뒤로 물러나 버리고 아이들이 주도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활동을 할 때는 10만장을 판다면 아주 대히트인거예요. 그때 우리나라 형편이 그랬던 거죠. 그런데 1990년대가 되니까 20만장을 팔면 손해봤다고 해요. 이런 시대에 나는 10만장 이상 파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자, 이런 상황이니 판을 내겠다고 책상 앞에 앉으면 한심한 거예요. 걔들한테 맞춰서 곡을 만들 수도 없고 만들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내 곡을 내면 그 친구들은 흥미없어 할 테고. 그런 상황이 한해 두해 쌓이면서 다시 내 노래를 찾는 시절이 올 때까지 노래만 하자 이렇게 생각한 거죠.(EBS 방송인터뷰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들고 등장한 것이 1992년이다. 김건모가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들고 등장한 것도 이때이다. 이들은 모두 100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를 거둔다. SM엔터테인먼트가 SM기획으로 창립된 것은 1989년이다. 한국 대중가요는 새로운 시대로 점차 옮아가고 있었고, 한 시대의 정신을 만들었던 가객 송창식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시대가 아님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곡 발표는 포기하자고 마음먹게 된 것이다.

 

청년시절 가수 송창식
청년시절 가수 송창식

 

그렇다고 그가 노래 부르기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지금도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기본기를 잃지 않기 위해 늘 기타와 노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라는 사람과 삶 자체가 음악과 노래 없이는 성립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바뀐 시대를 한탄하지도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흐르고 모든 것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내면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는 한 시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었고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산 것이지 어떤 영광을 누리겠다는 욕심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죽으면 내가 남긴 자취는 싹 걷어갔으면 좋겠어요. 옛날 말에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나는 그거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꼭 기억되어야 한다면 지금처럼 기억되는 게 좋은 거죠. 자기 잘났다고 막 떠들고 그러는 거,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좀 남사스러워요.(EBS 방송인터뷰에서)

돌이켜 보면 송창식은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그는 한 시대 대중들의 마음에 깊이 남아 별이 되었는데, 만약 그가 넉넉한 집에서 태어나 어릴 때 바랐던 클래식 지휘자로서의 꿈을 이뤘다면 과연 오늘날 송창식이 이뤘던 것보다 더 커다란 업적을 거두었을까. 가정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와 동시대를 살아간 대중들은 그의 음악을 들으며 함께 울고 웃는 기회를 갖지 못했을 거란 사실은 분명하다. 인천에서 성장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모두의 벗이 된 송창식, 그를 어떻게 잘 기억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제는 인천에서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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