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앵커, 국회의원 그리고 화가... 이윤성의 네번째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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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앵커, 국회의원 그리고 화가... 이윤성의 네번째 변신
  • 허회숙 객원기자
  • 승인 2023.12.05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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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in이 만난 사람]
이윤성 전 국회부의장 - 개인전 열고 화가 데뷔

 

 

공영방송사 기자로 출발해 최고의 뉴스 앵커였다가 4선 국회의원까지, 이윤성의 인생은 잘 짜여진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그가 국회부의장을 끝으로 정계를 떠났을 때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실제로 그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아직 드라마가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호를 떠난 은둔 무사가 칼을 갈 듯, 파스텔 안료를 문질렀다. 그의 인생 네 번째 선택은 그림이었다.

온 세상에 재앙이었던 팬데믹 기간을 이 전 부의장은 도전의 기회로 삼았다. 3년간 꼬박 그림에 매달려 40여 점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한 노 정객의 고상한 취미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의 그림은 예사롭지 않다. 전문가들도 호평을 아끼지 않는다. 그에 그치지 않고 공개평가를 받아보라는 권유가 이어졌다. 그에 용기를 내어 오는 11일부터 단독 개인전을 연다. 전시회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를 찾아가 보았다.

 

화가 이윤성

 

◇ 도전하는 삶

- 오랜만이다. 인천에선 그래도 가장 이력이 출중한 사람의 하나로 꼽힌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실향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한 평생을 인천에서 살았다. 인천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학만 기차 타고 서울까지 다녔다. 공영방송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대한민국 최초로 기자들이 뽑은 직선 앵커가 됐다. 보도본부 24시, 9시 뉴스 등을 진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발탁 되어 정계에 데뷔했다. 인천 남동구에 출마해 1996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내리 4선을 하고 국회부의장까지 지냈다.”

 

 

- 끝으로 정계를 떠난 건가. 그 이후엔 어떻게 지냈나.

“공식적으로 정계를 떠난 건 2012년이다. 이후 한 종편 방송사의 제안으로 뉴스 앵커를 3~4년 했다. 민선 6기 유정복 시정부에서 인천사회복지협의회장을 맡아 3년 임기를 마쳤다. 사회복지협의회장은 기자나 국회의원보다 더 값진 경험이었다. 이거 안 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걸 끝으로 공식직함을 모두 내려 놓고 이후부턴 자연인 이윤성으로 살고 있다.”

 

 

◇ 그림은 관심이다

- 11일 파스텔화 전시회를 연다고 들었다. 정치인에서 화가로 변신한다는 건데 상당히 파격적이다.

“공직을 내려 놓고 일 없이 지내자니 허전하고 심심했다. 단순한 소일거리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악기, 서예 등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는데, 현역 화가인 오랜 지인이 그림을 권유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가난 때문에 크레파스나 물감 살 돈이 없어 제대로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재능이 있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런 내게 그 분은 무조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고 부추겼다.”

 

 

- 그림엔 수채화도 있고, 유화도 있는데 왜 파스텔인가.

“파스텔은 지울 수 있다. 수정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초보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재료값 부담도 적고 학습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다. 한마디로 가성비나 효율성이 좋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오일 파스텔 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건 유화와 거의 같다. 나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는 의미다(웃음).”

 

 

- 그려보니 어떤가.

“나는 기자할 때도, 정치인 할때도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어둡고 소외된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를 그만 둔 후 사회복지협의회장을 자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나의 철학이자 신념이다. 그런데 하다보니 그림도 그렇더라. 그림은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그냥 관찰이 아니라 온정신을 담은 관찰이다. 그건 집중이요, 관심이다. 그림은 가장 애정깊은 관심으로 이루어진다.”

 

 

◇ 모방은 찬조의 어머니

- 수업은 어떻게 했나.

“처음 나에게 그림 그려보라고 추천해 준 분께 직접 배우려 했는데, 코로나가 덮쳤다. 그와의 대면수업을 취소하고 동네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해 다녔다. 그 살벌한 팬데믹의 한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은 무언가 배우려 모여 들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염병 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다. 운 좋게 친절하고 실력있는 강사님을 만나 무조건 그가 시키는대로 따라했다. 그의 권유대로 모방부터 시작했다.”

 

 

- 전시회까지 열게 됐다.

“하다 보니 집안에 그림이 쌓여갔다. 엔데믹의 조짐이 보일 즈음, 그 화가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내 그림을 보더니 이쯤에서 평가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수준 이상이라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남이 등 떠밀 때 못이기는 척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 말고도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내는 입소문이 점점 커졌다. 그 덕에 용기를 냈다.”

 

 

◇ 융합의 세상, 조화로운 삶

- 시기가 묘하다. 혹시 출마하시는가.

“(손사레) 에이, 그런 말 마시라. 이젠 박종효 남동구청장처럼 후진양성에만 힘 쓸 거다. 정치엔 아무런 미련이 없다.”

 

 

- 외모도 그렇고 패션도 그렇고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단언컨대 그림 덕이다. 그림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정성이 깃든 집중력이다. 하나의 사물에서 3가지 이상의 색을 찾아 내야 한다. 그 기본은 본래의 색, 어두운 색, 밝은 빛의 세가지다. 거기서 그림은 출발한다. 나는 단순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그 작업까지 단순하지는 않다. 그렇게 진지하게 몰두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무엇엔가 집중하고 몰두하다 보면 늙을 시간도 없다. 단 피로할 때까지 무리하면 안 된다.”

 

 

- 앞으로의 계획은.

“그림도 남은 내 인생도 융합의 세계, 조화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 도전의 영역을 더 넓혀보고 싶다. 그런 호기심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한 단계를 넘어서면 다음 단계가 궁금해 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어차피 유한한 인생, 다 알고 모든 걸 경험할 수야 없겠지만 해 보는 데 까진 해 보고 싶다. 그래야 후회를 덜 하지 않겠는가. 그건 내 삶의 지론이기도 하다.”

 

 

인터뷰 내내 화가 이윤성의 자세는 꼿꼿했고 목소리는 씩씩했다. 청년 같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하지만 적어도 보도본부 24시 앵커 시절을 연상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볼펜을 쥔 채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보도본부 24시 이윤성입니다”하던 그 모습 말이다.

그런 그에게 그림을 잘 그렸느냐 못 그렸느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늘 멈추지 않고 왕성한 호기심으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그 자체를 그는 즐기는 듯했다. 정치인으로서 정점에 섰던 그가 화가로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림을 보니 그 가능성도 넉넉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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