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보기 드문 사람, 변호사 김승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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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보기 드문 사람, 변호사 김승묵
  • 이용식
  • 승인 2023.10.1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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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7) 김승묵 변호사 – 이용식 / 전 인천연구원장
인천in이 9월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고 활약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중2 때의 김승묵
인천중 2학년 때, 왼쪽부터 이두성, 김승묵, 김영남 (사진: 김영남 제공)

 

김승묵(1944~2020) 변호사를 처음 만났던 것은 80년대 중 후반쯤으로 기억한다. 그 시기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김 변호사는 여러 단체와 개인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의 이러한 활동과 활약이 필자와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3년 전(2020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코로나로 병문안이 불가능했던 시기에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던 때까지 40여 년에 걸친 그 오랜 세월 동안 김승묵 변호사는 내게도 ‘참 보기 드문’ 한결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하여간 그런 분은 처음 보았다. 앞에서건 뒤에서건 그분을 조금이라도 험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하는 말이라면 다들 철썩같이 믿었고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렇다고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말주변이 있는 분도 아니었다.

회의 도중에 언쟁이 붙을라치면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분은 “에이……” 겨우 이 한마디를 거들 뿐이었는데 그러면 언성을 높이려던 사람들이 금세 목소리를 낮췄다. 의욕만 앞선 나머지 섣부른 논의가 오가다가도 그분이 “좀 느슨하게 가지”라고 하면 다들 멈칫했다. ‘우리가 너무 나갔구나’라며 자신들의 성급함을 돌아보았다. 생각해보면 참 희한한 일이었다. - 정희윤 전 목요회 간사의 회고, 참 보기 드문 사람 김승묵을 기리며(김승묵 추모문집, 133쪽, 2021).

재작년 가을(2021년 11월 9일)에 있었던 <故 김승묵 변호사 추모집 출판기념회>에서도 여러 사람의 추모사와 경험담을 통해서 김 변호사에 대한 면면이 소개되어 작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그의 맑고도 깊이 있는 품성과 인품이 가족들과 지인들을 통해 다시 한번 드러난 것이었다.

그의 면모는 여러 사회활동의 결과와 후일담,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확인되었다. 김 변호사는 일상의 모습에서 그리고 사회활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에서 요구하는 의미 있는 일을 묵묵히 해왔던 것이다.

 

- 송림동 태생, 명민하고 속 깊은 아이

김승묵은 1944년 4월 13일 인천 송림동에서 태어났다. 송림초등학교를 거쳐 인천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부터 그는 명민하고도 속이 깊은 아이였던 것으로 가족과 오랜 친구들을 통해 전해진다. 공부를 참으로 잘했는데, 이를 과시하거나 우쭐대는 법이 없었다. 평생 동료처럼 그리고 사회에서 만난 친한 형처럼 지냈던 그의 둘째 형 김양묵은 승묵이 얼마나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얼마나 겸손하고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여러 가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확인시켜 주곤 한다.

초등학교 이후 학창 시절 그와 가까웠고 평생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들은 그가 얼마나 명민하며 마음 씀씀이가 바르고 성격 좋은 친구였는가를 다양한 기억과 추억을 통해 밝히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이래 중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뛰어난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재능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의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고 있다.

초등학교 전교 1등의 성적으로 무시험으로 인천중학교에 진학한 김승묵은 1960년 제물포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제물포고는 길영희 교장의 혁신적인 교육철학 아래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문 학교로 발돋움했는데, 여기서도 그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관심을 보이며 수준 있는 능력과 성과를 보여주곤 했다.

그는 일찍부터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고전음악 듣기를 좋아했다. 친구 김광윤의 방은 그에게 훌륭한 고전음악 감상실이 돼주었다. 그 시절에는 드물게 김광윤은 방을 혼자 썼던데다 독일제 고급 건축이 그 방에 놓여 있던 까닭이다. 김광윤과 김승묵, 기인명까지 주로 세 사람이 그 방에 모여 고전음악 듣기를 즐겼다.

훗날 김승묵의 손위 처남이 되어 가족으로도 연을 맺는 이태수의 방도 친구들 사이에서 아지트로 통했다. 기실 그 방은 이태수의 어머니가 아들의 공부를 위해 따로 얻어준 방이었다. 김승묵은 아주 어려서부터 친구들을 유난히 좋아했다. 공부를 빼어나게 잘하면서도 잘난 척 한 번을 하지 않는,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챙기는 태도가 몸에 밴 그를 친구들도 다들 좋아했고 믿음직스러워했다. 김승묵은 제물포고에 다니며 여러 평생지기를 얻었다.(김승묵 추모문집, 34~35쪽)

이태수 역시 제물포고교 7회 졸업생으로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1963년)한 김승묵은 사학과나 철학과에 가고 싶었으나 집안 형편을 고려해 법조인의 길을 택한 것으로 가족들은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사법시험 준비에 몰두하지 않다가 졸업 2년 후 몇 달 동안 공부에 매진해서 1970년 사법고시 수석으로 합격한다.

 

사법연수원 앞에서
연수원생 시절 사법연수원 앞에서. 김승묵은 사법연수원 제1기다.

 

- 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사법연수원을 수료(1972년)하고 해군 법무관 제대, 서울민사지법 배석판사 임관(1975년)을 거쳐 서울형사지법 판사(1977년), 그리고 춘천지법 강릉지원 단독판사(1979년)로 근무하는 등 순탄하게 법조인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 1981년 서울남부지방법원 단독판사로 근무한 지 두 달 만에 판사직을 그만두고 인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법조인으로서 실력과 품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튼 이유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가까운 지인과 가족들의 입을 통해 짐작하거나 그가 사석에서 이를 못내 아쉬워했던 친구에게 마지못해 터놓은 짧은 얘기나 반응을 종합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바닥도 역시 어려웠다”는 그의 짤막한 얘기와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려는 ‘더 없는 효자 김승묵’이란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김승묵은 인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사람들의 무료 변론을 맡았고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지역 현안의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김 변호사의 대표적인 봉사 활동은 뿌리 깊은 사학비리 전형이었던 인천대를 시립화하는 과정에서 도드라진다.

 

목요회 100차 월례회에 참석한 김승묵 변호사
「목요회」‘제100차 월례회 기념강좌’를 경청하는 김승묵(앞줄)

 

- 인천대 시립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

지금도 인천대학교는 김승묵 변호사를 크게 기리고 있다. 사학비리의 대명사였던 선인학원 정상화와 인천대 시립화 과정에서 그가 했던 결정적인 역할과 헌신을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원 민주화 과정에 함께 했던 이들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당시의 힘든 싸움에 힘을 보탰던 박재윤 교수(제고 21회)는 “학원 민주화와 시립화는 김 변호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고, 그래서 그 힘들었던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추모집 출판기념회를 인천대 교수회관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故 김승묵 변호사 추모집 출판기념회>의 타이틀을 “‘참 보기 드문 사람’ 인천대학교는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로 붙인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추모집 출판기념회 안내 팜플릿에는 ‘인천대 시립화 및 대학 민주화를 위해 하신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92년 목요회를 중심으로 조직한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 모임’에서 활동하면서 ‘선인학원 기금 78억 원이 설립자 백인엽에게 건네진 경위와 선인학원 국가헌납 과정에 관한 진상 보고서’를 만들어 내 선인학원을 정상화시키고 인천대를 시립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음

1. 백인엽 관련 소송자료 등 결정적 자료 획득

- 90년 법정화해 형식으로 재단기금 78억 원 유출 과정

- 81년 선인학원 및 불법 조성 개인재산 헌납각서, 이사회 회의록

2. 백인엽과의 힘겨운 소송에서 승리를 이끌어 냄

- 백인엽이 제기한 교육부 이사 승인 취소 부당 행정처분 효력 정지 명령 신청을 선인학원 시·공립화 10만 인천시민 청원 서명록 제출 등으로 막아냄

3. 선인학원 시립화에 마지막 법률적 난제 해결

- 인천대 시립화의 마지막 법적 걸림돌인 전임 이사진이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 취하를 이끌어 내었고, 백인엽이 인천대 기증서를 인천시장에게 제출하게끔 함

소신과 원칙에 입각한 그의 헌신적 활동은 공적인 영역에 한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활동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고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왔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수배 중인 민주화운동 지도자를 돕는 일은 만일 발각되면 변호사를 그만두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인사연(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사람들과 함께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여성용품을 사 들고 주안공단 내 파업 현장을 찾아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안역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들며 소박하게 여러 말씀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변호사로서 김승묵은 올바름 그 자체였고, 범접할 수 없는 수준과 경지에서 처신했다. 친형으로서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지내며 15년 간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을 했던 김양묵은 이렇게 회고한다.

변호사 생활할 때도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은 의뢰인에게는 무료 변론을 수없이 했다. 마구잡이로 수임하지도 않았다. 상담해봐서 의뢰인이 억울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만 변호를 맡았다. 소송을 진행하다가도 의뢰인이 거짓말한 사실이 드러나면 즉시 변호를 중단하고 의뢰인에게 이미 받은 수임료를 돌려주었다. 내 동생 김승묵은 그런 법조인이었다.

인권변호사를 자처한 적은 없지만 인권변호사였다. 정치적인 가치관에 근거해서라기보다 정도에서 어긋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 일에는 본인의 시간과 노력, 금전적인 것까지 기꺼이, 아낌없이 내주었다. 옳은 일에 후원하고 동참하는 데에 동생이 머뭇거리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명망 있는 자리로 오라는 손짓도 많았지만, 한사코 다 거절했다. 선인재단 해체에 큰 역할을 한 뒤 인천시립대학교 초대 총장 후보로 추천됐으나 선배에게 양보했고 국회의원 출마 권유도 마다했다. 동생이 수락만 한다면 당선은 보나 마나인 자리였는데도 말이다.

말년에는 동생을 존경하던 후배 변호사들이 동생을 모시고 로펌을 설립하려 했으나, 이 역시 고사했다. 후배 진영광 변호사가 운영하는 「법무법인 우리법률」에서 공증 업무에만 전념하다가 은퇴했다.

제 잇속 차리는 것과는 도통 먼 인물이다 보니, 가까이에서 보는 동생의 삶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변호사의 삶과는 달랐다. 긴 세월 남들에게만 후해서 정작 제 주머니에는 여유가 없었다. 동생이 2007년부터 서울과 인천을 지하철로 출퇴근한 것도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 김양묵 둘째 형의 회고, 친구이자 동료였던 내 동생 김승묵, 참 보기 드문 사람 김승묵을 기리며(김승묵 추모문집, 2021, 178~179쪽).

 

2003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지속가능발전위원회」위원 임명장을 받는 김승묵

 

필자가 김 변호사와 자리를 같이했던 것은 최원식 교수와 함께 했던 게 절반 이상일 것이다. 그때마다 그가 최원식 교수를 매우 아끼고 또한 후배지만 아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와 그 분위기를 통해 격조 있는 대화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곤 했다. 특히 김 변호사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적은 말수가 신통하게도 두 사람 간 대화의 격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최 교수는 추모의 글 말미에 ‘승묵 형님’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굳이 흠을 잡자면 호주(好酒)로 수(壽)를 줄인 것이다. 형님과 함께한 술자리의 따뜻함과 즐거움을 상기하노라면 천수를 누리지 못함이 다시금 애통하다. 그래도 우리 호인수 신부님이 그 삼엄한 코로나 병동을 뚫고 들어가 형님께 종부성사를 행했다는 소식이 감동이다. 듣건대 그렇게 진지하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절차에 복종하는 신자는 난생 처음이라고 호신부가 경탄했다니 그 광경이 애처롭다. 평소에 형님은 동양의 고전에 은근히 경도된 분이다. 그런 분이 호신부의 전투적 우정에 천주교를 영접했다니 그 전향조차 복되다. (김승묵 추모문집, 151쪽)

 

2021년 6월 16일 서울성모병원 원목실에서: 이날 김승묵은 오랜 세월 깊은 정을 나눈 호인수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왼쪽은 호인수 신부, 오른쪽은 김승묵의 오랜 친구이자 세례식에서 대부가 돼준 기인명, 가운데가 김승묵
2021년 6월 16일 서울성모병원 원목실에서: 이날 김승묵은 오랜 세월 깊은 정을 나눈 호인수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왼쪽은 호인수 신부, 오른쪽은 김승묵의 오랜 친구이자 세례식에서 대부가 돼준 기인명, 가운데가 김승묵

 

-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지적 갈등... '득도'로 마무리 

김승묵 변호사와 호인수 신부는 생전 마지막까지 그 관계가 아주 각별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따뜻한 관심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승에서의 이별을 앞둔 몇 달 동안 호 신부는 자주 김 변호사 근황을 전하며, 그에 대한 따뜻한 감정과 슬픔을 보이곤 했다. 김 변호사를 떠나보내는 날, 호 신부는 이렇게 그를 추모했다.

이틀 후 장례미사를 드리며 나는 기도했다. “오늘 이 세상에서 불러가신 주님의 종 김승묵 분도를 생각하소서. 그는 세례를 통하여 성자의 죽음에 동참하였으니 그 부활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미사 후에 상복을 입은 딸 연정 씨가 내게 오더니 조용히 말했다. “신부님, 아버지와 이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김승묵 추모문집)

김 변호사의 이른 죽음은 지인들에게 큰 슬픔과 아픔을 주었다. 동시에 ‘큰일’을 도모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내비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실력과 자질을 갖추었는데 이를 다 이루지 못하고 서둘러 세상을 하직한 게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를 깊이 있게 알고 있던 이들의 생각은 이와는 달리 조금 복잡하다. 김승묵은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게 최선을 다해 김승묵답게 그렇게 살았다는 회고다.

오랜 기간 우정을 쌓았고 여러 측면에서 깊이 있게 교감했던 절친이자 처남인 이태수 교수의 ‘승묵의 득도’란 글을 통해 그의 삶과 그에 대한 이 글을 함께 마무리한다.

승묵의 지적 갈구는 사법시험처럼 미리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곧장 달려가는 방식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처 없이 천천히 걷기만 하는 것 같았던 그 구도의 행보는 승묵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의외의 득도로 마무리된 것 같다. 승묵은 궁극의 진리에 대한 자신의 지적 갈구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틀림없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 능력만으로 궁극의 진리까지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미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이 갈구하는 것은 절대자가 채워준다는 믿음을 얻었다는 것을, 그래서 절대자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뜻을 명확히 하는 의식을 치른 뒤 숨을 거두었다. 신앙에 도달한 것이 승묵의 득도인 것이다.

내가 승묵의 영혼 속을 들어가서 알아낸 것인 양 그의 득도에 대해 그렇게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적절치 않을 수 있다. 나는 그의 평생지기였다고 해도 그가 갈구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같이 지냈다. 그의 구도가 득도로 마무리되었다는 것도 나의 짐작일 뿐이다. 그런데 나의 짐작이 맞는다면 승묵의 삶에는 아쉬워할 대목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좀 일찍 떠난 것만을 아쉬워해야 한다. 나도 사실은 그를 떠나보내면서 더 이상 오랜 벗과 산길을 같이 걷지 못하는 것, 술 한 잔 나누며 따뜻한 말을 주고받지 못하게 된 것만을 제일 아쉬워했다. 소위 큰일은 머리에 떠올려보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승묵의 영향을 꽤 받았던 때문이다.”(김승묵 추모문집, 69~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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