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우리의 시간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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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우리의 시간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 이상하
  • 승인 2023.10.12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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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읽기]
인천을 바라보는 시선들(2)
- 이상하 / 조각가

 

“지나간 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인천은 외세에 의한 개항으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아픔과 치욕의 시간이 도시 한구석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시간을 지나온 도시들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모양과 처지는 신세계적 판타지를 기대하고 모여드는 이방인들과 기존에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새로운 힘을 가진 세력에 의한 차별과 억압이 도시의 곳곳에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오랜 시간의 쓰임으로 낡아, 고단과 불편을 얼기설기 머리에 이고, 여기저기 기우고, 덧대고 칠해가며 개발의 광풍)에도 지금을 견디고 있는 장소와 골목으로 시선을 옮겨서, 온전했을 지난날의 기억을 소환하는 고제민 작가와 자본을 앞세운 개발 논리에 사라진 골목과 사라질 골목을 사진에 담아, 지나간 우리의 시간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유동현 작가는 지난 인천과 지금의 인천, 다가올 인천을 이어주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그들의 작업은 시간과 장소의 기록을 넘어, 그 이상에 가치를 보여준다.

두 작가의 작품에서는 지난날의 나와 당신이 비치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아련한 그리움이 흐른다. 관객들은 작품 앞에서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지난날의 자신과 만나기도 하고, 그리움을 소환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단순히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서 어릴 적 나와 너를 만나 아름다웠던 그때로 잠시나마 돌아가는 경험을 하게 한다.

 

고제민작 시간의 풍경 - 별빛 가득한 인천항 72,7×50cm oil painting on canvas 2023년
고제민 작 시간의 풍경 - 별빛 가득한 인천항 72,7×50cm oil painting on canvas 2023년

 

고제민 작가에게 인천은 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삶을 영위하는 곳으로 고등학교에서 오랜 시간 미술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하고 지금은 개항장에 작업공간을 마련해서 작업하고 있으니, 삶에 대부분을 함께 한 인천을 떼놓고는 그를 이야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작품을 보면 인천에서의 모든 시간이 그의 작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오롯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인천에 바다와 항구, 남아있는 마을과 골목을 그리고, 때론 사라지고 남은 여운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사라졌지만 희미하게 남은 흔적과 그 안에서 움트는 삶의 모양을 찾아내서 그곳만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정체성에 향수를 더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고제민작 시간의 풍경_ 괭이부리말 116.2X130.3cm oil painting on canvas 2023년
고제민 작 시간의 풍경_ 괭이부리말 116.2X130.3cm oil painting on canvas 2023년

 

고제민 작가는 “풍경이 사라질수록 기억은 선명해져, 어릴 적 추억과 부모님이 그리운 풍경이 되어 다가온다”고 했다. 작가에게 풍경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그곳에 흐르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지난날을 관통하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작가는 이것을 채집하고 각색해서 화폭에 재현한다. 그의 작품을 볼 때는 조용하고 천천히 오랜 시간을 두고, 그 안에 나를 넣어 들여다보아야 한다. 고제민 작가는 작업을 통해 축적된 결과를 모아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것이 작가에게는 그리운 삶의 기록이겠지만, 우리(인천)에게는 아름다운 시간에 대한 예찬이자 도시의 중요한 기록이다. 작가에게 ‘시간의 풍경’ 작업은 자신에게 예술이란 무엇이며, 예술로 함께 할 공감과 가치, 해야 할 이유를 되묻는 시간이 된다.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풍경 안에 자신을 투영해서 담아내고 사라져가지만, 소중했던 삶에 색색의 숨을 불어 넣으려 작업을 한다.

작가에게 작업이란 어쩌면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응원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담백하고 따뜻한 회고적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살아나고, 그 시절의 온기로 몸과 마음을 덥힌다. 좁고 불편했던 골목의 기억은 추억이라는 옷을 입고, 고단하고 팍팍했던 삶은 서정(抒情)이라는 이름으로 가공된다. 그림 앞에 서서 작가가 만든 골목의 아름다웠던 시간을 걷다 골목을 돌아 나오면 다시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작가는 작업이 자신이 해야 할 소임이라고 여기며, 성실하고 견고한 스텝으로 지금 순간에도 작업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유동현작 송림동 샛골 동네
유동현 작 송림동 샛골 동네

 

유동현 작가는 인천 송현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월간 리쿠르트 기자와 편집장을 지내고 1997년부터 고향인 인천으로 돌아와 21년간 인천시의 공보관실과 대변인실에서 지역 및 시정 홍보를 담당하면서 원도심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천착(穿鑿)했다. 2019년부터 4년간의 인천시립박물관장을 하고 다시 골목으로 돌아와 인천의 지난 시간을 가감 없이 담담하게 보여주며 인천을 회고하는 많은 전시를 기획하고 10여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유동현 작가는 오랜 시간 한결같은 보폭으로 인천의 골목을 걸으며 ‘인천에 의미 없는 골목은 없다. 인천에 아름답지 않은 골목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을 앞세운 재개발의 광풍은 골목을 남길 생각도, 이별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줄 생각도 없이 밀어붙인다. 작가는 시간과의 달리기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골목 안에 풍경은 바뀌어도 작가에게 그곳의 시간은 흘러 소비되지 않고 쌓여갈 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발터 벤야민은 1930년에 이미 미래의 문맹(文盲)자는 글(문자)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못 읽고,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는 카메라이자 동시에 사진을 보는 도구다. 휴대전화는 단순히 찍고, 기록하는 도구를 넘어서 소통의 수단으로 공감과 합의(合意)의 광장이 됐다.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으로 많은 소통과 공감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긴 글보다 한 장의 사진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요즘은 Facebook에 쓴 짧은 글도 읽는 것이 귀찮아 Instagram으로 옮겨간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 점에서 유동현의 사진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유동현 작 당신은 잠들어도 그놈은 보고있다. (만석동 사택골목)
유동현 작 당신은 잠들어도 그놈은 보고있다. (만석동 사택골목)

 

작가는 우리가 장소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집, 가게, 공장, 고개, 우물, 마당, 정류장, 계단, 축대 등등 불량이라는 딱지가 붙은 우리의 장소들은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소멸했다. 사라지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 누구에는 추억으로, 누구에게는 상처로, 다른 누구에게는 기록이 되어 남는다. 장소는 상실되고 그 자리는 지금의 삶들로 채워지지만, 대지는 변함이 없다. 그 어떤 중장비로 파고, 다져도 지층에 쌓인 시간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나간 장소의 자취는 개인의 기억이나 공공의 기록 등, 어떤 형태나 물량으로든 남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좋았던 기억들로 조합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편집하는 경향(傾向)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유동현 작가의 사진이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지나온 길을 지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작가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때로는 한계를 넘는 힘으로 좌절하지 않고 시대를 견뎌온, 오래된 골목의 시간을 기록하는 소임을 다한다. 카메라가 만든 프레임을 통한 관찰자의 건조한 눈이 아니라, 대상의 깊은 곳까지 살피고 이해한 뒤에 고른 호흡과 같은 보폭으로 골목과 하나가 되려 한다. 작가에게 골목을 걸으며 사진을 찍고 남기는 행위는 고단한 시절을 잘 살아낸 모두에 대한 치하(致賀)로, 비록 삶의 모양새는 볼품없고 가진 것이 부족해서 불편했지만,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아름답고 소중했던 우리들의 시간에 대한 경의일지도 모른다.

유동현 작가의 사진 속에는 그리운 유년에 얼굴들이 보이고, 사진 속 골목을 돌아나가면 어린 날에 내가 보여, 선명한 기억으로 피어오른다. 사진 속 골목에서는 지나간 바람이 머물고,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관객들은 사진 앞에 서서, 가난했지만 따뜻하게 서로를 보살피고 나누며 살던 그때를 걷는 시간 여행자가 된다.

작가는 관객들을 살았고, 사라진 골목으로 이끄는 안내자다. “작가는 시대를 기록하는 이”라는 말은 고제민 작가와 유동현 작가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지층처럼 쌓이고 축적되어 지금의 시간을 만들고, 다시 그것으로 내일이 온다. 사라져 가는 시간의 궤적(軌跡)을 따라서 기록하고 남기는 두 작가는 우리의 따뜻했던 지난 기억의 수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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