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위해 하늘의 ‘별’이 된 강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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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위해 하늘의 ‘별’이 된 강재구
  • 유동현
  • 승인 2023.10.10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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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6) 살신성인의 표상 강재구 소령 – 유동현 /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in이 9월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고 활약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창령초등학교에 있는 강재구 소령 흉상
창령초등학교에 있는 강재구 소령 흉상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강재구의 이야기는 역사이자 신화다. 한때 그는 온 국민이 배우고 따라야 할 귀감(龜鑑)이었다. 공자 왈 맹자 왈은 몰라도 ‘살신성인(殺身成仁)’라는 뜻은 그를 통해 배웠다. 골목 병정 놀이할 때도 아이들은 서로 ‘강재구 소령’을 하겠다고 다투었다.

한 ‘사건’이 그를 역사적 신화적 인물로 만들었다. 먼저 그날 그 사건을 재구성해 본다.

 

‘구(求)할 구’자의 운명

한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4년부터 자유 베트남을 돕기 위해 국군 파병을 결정했다. 1965년 8월. 강재구는 파병부대인 맹호부대 제1연대 제8대대 제10중대장으로 부임했다. 파병을 자원한 그는 부대원들과 베트콩과 싸우기 위해 연일 실전 훈련에 매진했다. 그해 10월 4일은 일정에 따라 수류탄 투척훈련을 하는 날이었다. 날이 밝자 중대원들은 강원도 홍천 북방면 성동리에 위치한 훈련장에 도착했다.

유난히 맑은 월요일 아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월요병’이란 것이 있다. 주말을 지낸 후인지라 훈련장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중대장 강재구 대위는 훈련에 앞서 그 어느 때보다 중대원들에게 안전의식과 긴장감을 강조했다.

병사들이 차례차례 수류탄 투척대 앞에 섰다. 안전핀을 뽑은 다음 수류탄을 팔을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힘껏 던졌다. 오전 10시 37분쯤 순서에 따라 박 모 이병이 수류탄을 손에 쥐었다. ‘아뿔사’ 그는 팔을 뒤로 젖히는 순간 수류탄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 수류탄은 그대로 중대원이 모인 뒤쪽으로 떨어졌다. 땅이 고르지 않아 수류탄을 발로 차 버릴 상황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투척 대기조가 푹발 반경에 위치해 있던 터라 수십 명의 살상 피해가 불가피했다.

일촉즉발, 절체절명의 순간, 한 사람이 그대로 수류탄을 몸으로 덮쳤다. 곧이어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중대장 강재구는 산화했다.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망설임없는 살신성인으로 부하 5명만 가벼운 부상을 당했을 뿐 나머지 부하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의 이름에는 ‘구(求)할 구’자가 있다. 운명인가.

바로 곁에서 이 참상을 지켜봤던 중대원 이 모 병장은 훗날 이렇게 그 상황을 설명했다. “제 옆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수류탄이 터지고 하늘로 검은 물체가 튕겨 올랐는데, 가만히 보니 중대장님의 다리였어요. 그래도 사고 직후엔 살아계셨어요. 신음을 하고, 대원들이 달려가 지혈을 했지요. 그분은 동료 부대원이 잘못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깔고 앉으려 했어요.”

 

강재구 소령 영결식
강재구 소령 영결식

 

육사, ‘재구 2중대’ 명칭 지정

65년 10월 8일 오전 10시 대한민국 육군 창설 후 세 번째로 육군본부 광장에서 육군장(葬)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3군 참모총장, 3부 요인, 한미 주요 장성, 주한 외교사절, 맹호부대 1연대 5대대 10중대, 그리고 육사생도들이 참석했다. 부인 온영순(28) 여사와 외아들 병훈(2) 군이 맨 앞에 자리했다. 강재구 소령은 동작동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계급 특진과 군인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강재구 중대가 소속했던 수도사단 1연대 3대대는 그후 ‘재구대대’로 명명됐다. 대대 마크는 호랑이에 수류탄이 그려졌다. 육군은 그의 군인정신과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1966년 ‘재구상(償)’을 제정, 매년 모범 중대장을 선발해 시상하고 있다.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는 그가 생도 시절 소속되어 있던 생도대 2중대의 명칭을 ‘재구 2중대’로 지정했다. 광개토 1중대, 무열 5중대, 문무 8중대 등 그동안에는 오래된 역사 속 위인의 호칭을 따서 붙였었다.

 

5학년 때 창영으로 전학, 송현동 거주

강재구는 어떤 짧은 생애를 살았을까. 간략히 연대기적으로 서술해 본다. 강재구는 1937년 7월 26일, 당시 인천 금곡리 54번지에서 강진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성전기(지금의 한전) 인천 부평지사에 다녔다. 재구는 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4년 인천 소화동국민학교(昭和東國民學校, 지금의 부평동초교)에 입학했다.

5학년 때인 1948년 창영국민학교로 전학을 갔다. 잠시 송현동에 거주했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 봄, 반 석차 72명 중 2등으로 창영을 졸업했다. 지역 수재들이 모인다는 인천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 다닐 당시 주소는 송림동 57번지였다.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보자. ‘침착하고 순박하며 모든 일에 책임감이 유하므로 친우도 많으며 잘 유망한 인물임’. 인천중학교를 381명 중 18등 성적으로 졸업했다.

6·25전쟁 이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육군사관학교(16기)에 입학했다. 그해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이후 그의 어머니가 장사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홀어머니 밑에서 남동생 두 명과 여동생 한 명이 함께 거주했던 터라 그의 가정은 궁핍한 편이었다. 강재구는 넉넉지 않은 군인 월급을 홀어머니에게 매달 보냈던 ‘효자’였다. 당시 거주하던 곳이 부평 2동에 위치한 호명산 앞 안남로 주택가였다. 일설에 의하면 미쓰비시 줄사택에 살았다고 한다.

1965년 8월 1일 대위 진급 후 온영순씨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강병훈)을 둔다. 베트남 파병 맹호부대에 지원했다. 그곳에 가면 위험수당, 전투수당 등 국내 근무보다 보수를 더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극구 말렸다. 안타깝게도 그해 9월 3일 어머니가 뇌일혈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강재구 소령
강재구 소령

 

맥아더 동상의 김경승, 강재구 흉상 조각

고인을 추모하고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전국 곳곳에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세워졌다. 육군사관학교에는 왼손에 수류탄을 쥔 그의 동상이 있다. 졸업식 날 생도들은 받은 꽃다발을 강재구 소령 동상에 건다. 가장 먼저 꽃다발을 거는 생도가 동기 중에서 가장 먼저 장군에 진급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모교인 서울고등학교와 육군 제 3878부대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와 홍천 강재구 공원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보다 앞선 1966년 창영초등학교는 개교 기념식 날인 5월 6일 본관 앞에 강 소령의 흉상을 제막했다. 그날 대통령은 대형 조화를 보냈다. 강재구는 이 학교 40회 졸업생이다. 이 흉상을 조각한 작가는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조각한 김경승이다.

‘천년 봄 가을 지나도 귀한 피 향내로 오히려 소매를 적시게 하는 그 사람 여기 서 있다. 몸은 부서져도 의로움을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사랑에 얽매이어 장하고 매운 정신 보아라. 높은 슬기와 총명 뿜어낸 힘으로 온겨레 가슴을 밝혔으니 때는 바뀌어도 그 모습 새시대의 맥박 뛰는 이 하늘아래 살고 싶은 내력 되리라.’

흉상 기단에 새긴 비문이다. 글은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사가인 한상억 선생이 썼다. 2019년 창영초등학교는 육군사관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 강재구 소령의 숭고한 희생을 후배들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했다.

 

강재구 아들, 육사 대신 서울대 선택

강재구 소령의 단 하나의 혈육인 병훈 군은 한동안 국민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강 소령이 산화했을때 그는 돌을 갓 지나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던 때였다. 영결식장에서 소복 입은 엄마 품에 안긴 모습이 신문에 실려 많은 사람들의 애처로움을 자아냈다.

군인의 가족으로 단칸방 살림에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던 모자는 졸지에 비극을 맞아 생활이 더 힘들어졌다. 다행히 국가에서 주는 연금과 국민 성금으로 모인 돈, 그리고 각계의 도움 덕분에 남편 없이 홀로 아들을 잘 키워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병훈이가 나이가 돼 그가 원한다면 우선적으로 육사에 입학하게 하라”고 당시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이는 육사 창설 이래 처음 있는 조치였다고 한다.

병훈은 공부를 아주 잘했다. 서울 영동고 출신으로 학력고사 320점(만점 340점)에 내신 1등급을 받은 그는 198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부에 입학하였다. 대통령이 보장해 준 육사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의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고려했을 것이다. 군인이었던 남편을 비극적으로 보냈는데 어머니도 굳이 아들에게 직업군인의 길을 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들 병훈과 인천을 엮은 ‘가짜뉴스’가 살짝 나돌았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강병훈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군장교로 병역의무를 수행한 뒤 기술고시에 합격해 5급으로 입직하고 중앙부처에서 순환근무를 하다가 2022년 부친의 고향인 인천광역시에서 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인천시 인사과에 문의한 결과, ‘강병훈’이란 이름을 과거나 현재의 기록에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졸업 후 일반 대기업에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교가 아니라 ‘방위’로 군복무를 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교과서에 실린 '아! 중대장님!'
교과서에 실린 '아! 중대장님!'

 

교과서에 실린 ‘아! 중대장님!’

강재구 소령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에 실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 교과서에는 주로 우리나라의 변화상, 위인들 이야기, 6.25동란 시기의 고난과 무용담, 무장공비 침투와 재일동포들의 북송 등을 비롯해 지금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네덜란드 둑 붕괴 관련 소년의 이야기 등 권선징악적이거나 체제우위 선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겼다.

강재구 소령의 참된 군인정신과 숭고한 희생정신은 당시 전 국민 계몽에 매우 유용한 소재였다. 물론 이순신 장군, 강감찬 장군, 을지문덕 장군 등 역사적으로 뛰어난 군인들이 있었지만 아주 멀게 가물거리는 위인들이었다. 그때 강재구 소령이 등장한 것이다. 장병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 중대장님!’이란 제목으로 실린 주된 내용은 훈련의 형식이 어떠했으며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처한 일선 지휘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등으로 기술돼 있다. 생도시절의 강재구 소령의 사진과 훈련 당시를 묘사한 그림이 곁들여 있었다.

단원 끝에는 <우리의 할 일> 세 가지가 적혀 있었다. 1.강재구 소령은 평소부터 어떤 군인었음을 알았는가? 2.강재구 소령의 거룩한 희생 정신을 서로 이야기해 보자 3.재구 부대가 베트남에서 활약하는 이야기를 모아 보자. 70년대가 지나면서 ‘아! 중대장님!’은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1966년 作 영화 '소령 강재구'
1966년 作 영화 '소령 강재구'

 

신성일, 고은아 주연의 영화 <소령 강재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사고 후 7개월 후인 1966년 5월에 개봉되었다. 서둘러 만들어진 영화였다. 영화 <소령 강재구>은 고영남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신성일, 고은아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 특성상 약간의 픽션이 가미되었다. 상영시간 111분인 이 영화는 강재구와 아내의 연애시절부터 사고 후까지를 담고 있다. 6.25전쟁 때 아버지가 북한에 납치된 후, 삯바느질하는 홀어머니(황정순) 밑에서 자란 육군사관생도 재구(신성일)는 가족과 동료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말썽만 부리던 건달 출신 후임병(트위스트 김)은 그를 친형처럼 따른다. 장교로 임관하고 현모양처형의 여인(고은아)과 결혼을 한 후에도 그의 모범적인 군생활은 계속되었고 군 내에서 신임이 나날이 두터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수류탄 투척훈련 중…. 이하는 우리가 아는 그 내용이다. 강 소령의 아들 병훈의 역으로는 김정훈이 맡았고 아역배우 시절 안성기가 강재구의 어린 남동생으로 등장한다.

66년 5월 16일자 경향신문에는 영화평이 실렸다. ‘영화는 과장없이 담담하게 그의 인간을 그렸다. 큰소리가 없는 간결한 묘사가 오히려 신록처럼 푸르르고 깨끗한 내음으로 그를 재현한다. 스스로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은 그의 행동을 보고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그와 같은 행동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그의 훌륭한 희생을 전하는 것보다 이러한 가능성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데 더 큰 뜻이 있다.’

이 영화는 국방부, 공보부, 문교부가 후원했고 강 소령의 육사 동기생 일동이 협찬했다. 관람등급은 국민학생 이상 관람가였다 당시 만화영화 외에는 국민학생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매우 이례적이었다. 국민 모두가 봐야 할 영화였다. 실제로 영화는 농촌이나 낙도에서 무료 순회 상영을 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태평양 너머에서도 상영되었다. 제10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한국이 낳은 별’이란 제목으로 출품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강재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늘 작은 성경책을 품에 지니고 다니고 틈나는 대로 셩경을 펼쳤다. 사망 당시 그의 군복 주머니에 있던 성경책엔 한 글귀에 빨간 밑줄이 쳐 있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그는 더 큰 사랑을 위해 그렇게 친구(전우)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리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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