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 의문사 1호, 자유민주주의자 최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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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 의문사 1호, 자유민주주의자 최종길 교수
  • 이현식
  • 승인 2023.10.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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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5) 독재에 희생된 최종길 교수 - 이현식 문학평론가
인천in이 9월부터 88년 역사의 인천중·제물포고 총동창회와 협력하여 <인중제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인천중학교 1회 졸업생부터 시작하여 제물포고 67회 졸업생에 이르기까지 기수와 직업군을 망라하여 균형있게 연재합니다. 위인 열전 식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모범이 되거나 의미있는 삶을 펼쳐온 이들을 인터뷰나 문헌조사 등으로 취재하여 광역시 인천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고 활약해온 인천인들의 참모습을 조명합니다. 

 

의문사 1호 최종길 교수
고 최종길 교수(1931~1973)

 

2023년 올해는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인천중학교 6년제 4회)가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50년이 되는 해다. 1973년 10월 16일 오후 2시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친동생 최종선(제고 8회)과 함께 자진 출두 형식으로 남산 중앙정보부에 조사받기 위해 출석한 후 만 3일이 채 지나지 않은 10월 19일 새벽,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 의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증거가 많지만 끝내 정확한 사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종길 교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2021년 7월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20번째 이야기에서 “대한민국 의문사 1호”라는 타이틀로 방영되기도 했다.

 

촉망받던 쾌활한 소년 최종길

미래가 촉망받던 유능한 학자를 무참하게 살해한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은 남북분단과 박정희 유신 독재체제가 불러일으킨 예견된 비극이었다. 최종길 교수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이른바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 날조된 것으로 그의 독일 유학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최종길 교수가 법학 공부를 위해 외국 유학을 떠난 건 1957년이었다.

서울대 법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최종길은 그 무렵 제물포고교의 교사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형인 최종남이 일하던 인천의 동일방직에 기술 지도로 와있던 스위스인 홀라커(Holacher)의 독일어 통역 아르바이트를 맡게 된다. 원래 어학에 재능이 있던 데다가 성격도 쾌활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최종길을 눈여겨본 홀라커가 스위스 취리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도와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58년 법학의 본고장인 독일의 쾰른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고국에 대한 향수를 함께 달래던 한국 유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지정학적으로도 가까워 공산권과 교류가 있던 유럽 사회에서 북측과 모종의 연락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성 제보에서 출발한 이 사건이 그런 비극을 만들어 낸 것이다.

1931년 공주에서 태어난 최종길이 인천으로 이주한 것은 큰형 종남과 누나 종숙이 인천에 취업을 하게 되면서였다. 1942년 겨울 무렵 전 가족이 인천으로 이주해 종길은 1945년 3월 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한다. 종길은 집안 형편도 어렵고 세금을 낸 증명이 있어야 입학이 허락되던 인천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해방되면서 새로 문을 연 6년제 인천중학교에 시험을 보고 입학한다.

당시 인천중학교는 한국인 졸업생과 재학생, 학부모, 뜻 있는 인천시민들이 힘을 합해 독립투사이자 교육자, 농민계몽운동가였던 길영희 선생을 초대 교장으로 모셔 새롭게 민족의 인재를 길러내자는 취지로 문을 연 학교였다. 길영희 교장은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내걸고 학생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고 교육에 임하는 분이었다. 학교의 관리자가 아닌 학생 한명 한명에게 애정을 갖고 지도하는 참 스승의 표본이 길영희 교장이었는데, 종길은 길 교장의 영향 아래에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 인천중학교와 병설된 제물포고등학교에 영어와 독일어, 공민(사회과목의 일종)을 담당하는 교사로 잠시 일을 한 것도 길 교장의 뜻이었다. 길 교장은 명석하면서도 바른 심성과 정의감을 갖고 있던 최종길을 각별히 아꼈다. 당시 제물포고교는 길 교장의 뜻에 따라 선배들이 교사로서 후배들을 가르치도록 하는 제도 아닌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최종길 교수 말고도 여러 명의 졸업생이 선배이자 선생으로 후배이면서 제자가 될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1958년 취리히의 최종길
1958년 취리히에서 최종길

 

한국인 최초의 독일 법학박사

최종길 교수가 한국인 최초로 독일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인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고 가슴 깊이 축하한 것도 길영희 교장선생이었다. 길교장은 서울대 강사였던 최종길이 기독병원 레지던트였던 백경자와 결혼식을 할 때 주례도 서고 제물포고교 강당을 예식장으로 내주기도 했을 정도였다. 최종길 역시 자신을 키워준 인천중학교, 제물포고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길교장이 후배들에게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에 바쁜 시간을 쪼개 흔쾌히 모교를 찾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길영희 교장선생님은 입에 침이 마르게 최종길 교수님을 칭찬하시더니 학교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 놓고 독일 유학에서 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오신 최종길 교수님의 초청강연을 연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최종길 교수님은…유럽의 여러 나라, 특히 프랑스의 드골리즘과 독일의 근면성 등에 대해 열강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보고도 가난한 나라에 산다고 주눅 들지 말고 희망과 야망을 가지라고, 야망을 갖고서 도전하라고, 동안(童顔)에 작달막한 키, 패기와 기상이 넘쳐나는 기상…. 유학을 통해 길러진 그분의 세계적 안목과 열변을 들으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훈상, 제고 8회, 전 분당 차병원 원장의 회고, <김학민, 만들어진 간첩(서해문집, 2017)>에서 재인용.

 

최종길 교수가 신생 학교로 첫 출발을 내디딘 인천중학교, 열정이 남다른 교장 선생님과 해방된 나라에서 제대로 민족의 인재를 키우겠다고 모여든 여러 선생님 밑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이다. 아울러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우정을 쌓았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행에 근무한 고(故) 김석주는 키도 비슷해 단짝이었으며, 육군 준장으로 제6대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고 김성진, 오공본드의 전신인 경기화학공업사 창업자 고 김창식, 위스콘신대학 화학과 석좌교수인 유혁, 전 내외통신 국제국장과 논설위원을 지낸 고 이익상 등이 모두 그의 동기였다.

 

단란하던 시절의 최종길 교수 가족
단란하던 시절의 최종길 교수 가족

 

전후 독일과 유럽의 사회적 분위기

한편, 그가 유학을 떠난 1950년대 말의 독일 사회 분위기가 어땠을까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1945년 히틀러가 주도한 전쟁에서 패하고 독일 역시 분단을 겪지만 한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서독이나 동독 모두 반나치즘의 정서가 강하고 서독은 특히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강했다. 아직 베를린 장벽도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동서독 간의 왕래도 1960년대에 비해 자유로웠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독일 사회에 영향을 미쳐 독일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고 유사한 분단국인 한국에 대해 독일인들 대부분이 우호적이었다. 최종길 교수가 유학했던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 그는 스위스, 독일, 프랑스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유럽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그는 독일에서 민법을 전공하며 근대적 사유 재산에 기초한 계약 관련 법제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유재산제의 문제점을 주장하며 재산의 공유와 국유화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그가 더욱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학문적 관심사만 보아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당시 한국 유학생 가운데에는 이념적 성향이 다양하고 이들에 대한 북측의 접근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미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념적 갈등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피폐하게 만드는지 몸으로 체험한 당사자들로서 가벼운 처신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최종길에게 그건 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투철한 자유주의자 서울대 법학과 교수 최종길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이후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에 2년간 머물면서 그가 겪고 체험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럽과 미국 사회에 체류하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한민국도 빨리 선진국이 되기를 마음 깊이 열망했을 것이다. 독일에 남을 수 있었던 기회를 마다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한 것도 마음속에 그런 열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의 자유가 보장되고 학생들도 발랄하게 생각할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고 있었다. 최종길은 학문이 발전하고 사회가 성장하려면 대학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기본적인 토대가 되어야 함을 미국과 유럽에서 실제로 보고 느껴 몸으로 알고 있었다. 최종길 교수는 논문 이외에 잡글을 쓰지 않았던 사람으로 유명한데 자유를 강조하는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기고 있어 그가 왜 그렇게 자유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학생 모두가 한결같이 법조 직업에 보다 적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학계, 실업계, 언론계 등 타 직업에 보다 적성이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독자적인 계획과 판단 하에서 넓고 깊게 배우고 생각하며, 자기의 소질과 능력을 발휘할 자기 고유의 장래를 위한 굳건한 터전을 대학에서 마련해야 한다. 대학에 있어서의 학문의 자유의 진가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의 각 방면에서는 이런 법학도를 목마르게 기다리며 부르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시대의 불꽃, 최종길(2003)>에서 재인용.

 

이런 지적은 50년이 훨씬 더 지난 오늘날에 비추어 봐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틀에 짜인 진로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와 사회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할 줄 아는 넓이와 깊이를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그는 추상적인 자유나 이념적 자유에 치우친 관념주의자가 아니었다.

한편, 최종길 교수는 감성이 풍부하고 열정이 많은 자유주의자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은 <스파르타쿠스>(1960년 제작, 한국에서는 1965년 개봉)를 유학 시절 보고 아내와 동생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주면서 결국 눈물까지 보였다고 한다.

 

Free! 자유를 말하면서 불타던 그 눈길, 그 뜨거운 눈물! 형수와 나의 눈에도 눈물이… 자유가 얼마나 고귀하고 귀중한 것인지를 우리는 형의 그 눈길에서, 그 눈물에서 백 마디 천 마디의 웅변보다 더 강렬하고 새롭게 깨우쳤던 것이다. - 동생 최종선의 술회, 김학민, 앞의 책 참조.

 

이런 최종길은 자유를 억압하는 집권자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최종길 교수가 죽임을 당한 1970년대 초는 박정희가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욕망을 드러내면서도 정권 유지에 자신이 없어 이른바 ‘유신헌법’을 제정해 영구 집권 체제를 구축해가던 시기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마침내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 임기 제한을 없애는 동시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대통령 선출을 위한 들러리 조직과 국회 내에 유신정우회라는 어용 집단의 의석을 보장하는 독재 헌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적인 국가기구를 동원하여 집권 기반을 공고히 하는 일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이런 야만적 폭거에 맞서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저항적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최종길교수죽음과 관련한 1988년 동아일보 기사
최종길 교수 죽음과 관련한 1988년 동아일보 기사

 

독재에 희생되다

서울대학교도 문리대와 법대를 중심으로 반유신 데모가 일어나고 이들에 대한 경찰의 공공연한 폭력 행사도 일상화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기관원이 강의실에서 교수의 발언을 감시하고 학생들의 모임을 염탐하던 시절이었다. 학생과장이던 최종길은 학생들의 저항적 행동에 선생으로서 그들의 안위를 걱정해 염려 섞인 꾸짖음을 하면서도 슬퍼했다. 교수회의에서 강경 발언을 쏟아 냈던 것도 대학의 권위와 자유를 헌신짝처럼 여기는 정권의 태도가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권의 입장에서는 유신체제의 최대 걸림돌인 대학을 길들일 필요가 있었다. 학생들도 학생들이지만 교수사회에 대한 재갈물림도 필요한 시기였다. 마침 독일 유학생 출신으로 북과 접촉했다는 L모의 자수를 받은 중앙정보부는 그에게 추가 정보를 요구하고 제보자는 신빙성 없는 내용을 수사관에게 정보랍시고 흘린다(제보자는 모 대학의 명예교수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학민, 앞의 책을 참조). 지식인 사회를 옭아맬 좋은 그물망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최종길 교수의 죽음
최종길 교수의 죽음

 

동생 최종선의 역할

이때만 해도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모른 채, 잠시 조사만 받고 무사히 귀가할 것이라 의심치 않았던 동생 최종선은 자신이 중앙정보부 직원이기도 해서 상사들에게도 최대한 형에게 예우를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조사받도록 안내한다. 그러나 결과는 청천벽력같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처럼 갑자기 생명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형의 죽음을 날조한 사태 앞에 그는 평생을 걸고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일에 나선다.

동생 최종선은 중앙정보부 요원이면서도 오히려 친형을 잃은 유가족으로 정보부의 감시 눈길이 더욱 엄혹해지는 상황에 직면한다. 어떻게든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기록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의무감 속에서 제물포고교 동기인 세브란스 병원 레지던트 지훈상, 고창조 등의 도움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한다. 그곳이 아니면 감시의 눈길을 피해 기록을 남길 장소가 없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는 밤마다 자신이 보고 들은 형 최종길 교수의 죽음과 관련한 사실들을 기록한다.

이 기록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되고 마침내 1988년 최종길 교수 사망 사건에 대한 검찰조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소시효 만료라는 이유로 사건에 관여했던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은 처벌받지 않고 내사가 종결된다. 결국 최종길 교수가 희생된 지 29년 만인 2002년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위원 전원 찬성으로 “최종길 교수의 간첩 혐의는 조작되었고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진다. 벼락 맞은 것보다 더 심한 충격으로 평생 한 많은 삶을 살다 간 부인 백경자 여사도 2015년 모란공원 남편 묘지에 합장되었다.

 

1988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 참석한 유족들, 앞줄 왼쪽부터 최종숙(큰누이), 최광준(아들), 백경자(부인), 최희정(딸)
1988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 참석한 유족들, 앞줄 왼쪽부터 최종숙(큰누이), 최광준(아들), 백경자(부인), 최희정(딸)
최종길 교수 기념홀 부조. 서울대 법대 백주년기념관 1층 강의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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