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는 바람의 끝에 매달린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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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는 바람의 끝에 매달린 것은
  • 양진채
  • 승인 2017.12.15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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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단편소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 이선우 소설가

얼마 전 이선우 소설가의 첫 소설집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가 출간되었다. 이선우 소설가는 결혼한 뒤 인천에서 30년 넘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표제작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에는 황혼에 만난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사랑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손녀인 내가 등장한다.

삼 년 전 게이트볼 장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별을 앞두고 있다. 알코홀릭으로 홀로된 아들을 돌보기 위한 할머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할머니의 짐을 우체국에서 보내고 점심을 먹고, 공원을 산책하는 것으로 이별을 대신한다. 떠난다는, 이별을 전혀 느낄 수 없는 평온하고 다정한 식사와 산책이다.


우리는 짜장면을 앞에 놓고 앉았다.
“입술이 달아났수? 흘리고 먹긴.”
할머니는 할아버지 입가에 흘러내린 짜장면 가닥을 떼어 냈다.
“당신은 턱이 달아난 게야?”
할아버지가 손을 들자 할머니는 닦아 달라는 듯 입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이런 장면에서 어떻게 이별을 연상할 수 있을까. 젊은 연인의 식사보다 더 다정한 식사 풍경이다. 이 장면을 통해 이선우 소설가는 격정의 시기가 지난 노인의 사랑을 ‘삶’이라는 자리에 놓고 있다. 이별 역시 일상적인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나는 잦은 배 멀미를 하듯 알 수 없는 것들로 자주 출렁이고 요동치는데 저 나이가 되면 항구에 닻을 내린 것처럼 언제나 고요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내일 헤어져도 저토록 담담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김성환

ⓒ유동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짜장면을 먹고 공원을 산책한다. 그 공원은 화약공장이 있던 자리로, 한때 그 공장을 다녔던 할아버지는 폭발사고로 손가락을 다쳤다.
한국화약 인천공장은 1956년 초안 폭약 생산에서 시작해 58년 다이나마이트 생산에 성공함으로써 한국 산업사에 화약을 등장시켰으며 반세기 동안 경부고속도로 등 국가기간시설 건설과 경제발전을 위해 생산된 화약은 폭약 124만t, 뇌관 11억개, 도화선 7억7천만m에 이르며 국가재건 및 성장에 함께 했다. 위험한, 군수시설인 화약을 만들었던 공장이라서 크고 작은 사고 위험도 안고 있었다.


두 아름도 넘는 플라타너스 나무 여러 그루가 호숫가에 수문장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선영아, 꼭대기 좀 올려다봐라. 이백 년은 가까이 됐을 게다. 화약 공장이 있기 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니까.”
“정말 대단하네요.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어 좋겠어요.”
“할머니가 가면 혼자 얼마나 오게 될까 싶다. 이곳이 다 우리 회사 부지였어. 위력이 약한 화약이 터졌으니 손가락만 잘렸지, 그 자리서 잘못된 사람도 많았다.”
할아버지는 회사 부지를 말할 때 허공으로 조막손을 뻗어 넓게 원을 그렸다.
“어휴, 그 얘기는 올 때마다 들어서 다 외웠어요.”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가 웃었다.


지금은 화약공장이 있던 자리라는 것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 그 자리에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호수와 양떼 목장과 아름드리나무가 자리하고 있고, 인조잔디까지 깔려 있다. 화약공장은 지워진 풍경이 되었다.
작가는 왜 헤어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마지막 공간으로 화약공장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공원을 설정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그곳에 화약공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지워진 풍경 속 한 부분을 담당했던 할아버지에게 그 공원은 산책하기 좋은 그냥 공원이 아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말을 외울 정도가 될 정도로 그 장소는 할아버지의 삶에 깊숙하게 개입한 곳이다. 그렇다면 표면적으로는 담담하게 헤어지는 인물들에게 작가는 할아버지 삶의 깊숙한 곳을 배치함으로써, 담담한 이면 뒤 이별의 아픔을 깔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할 수 있다.


ⓒ유동현


“가시가 잘 박히는데…… 손가락에 박힌 가시는 누가 빼 주지…….”
할아버지는 딱히 나와 할머니에게 아니라는 듯 혼잣말로 침묵을 깼다.
“뭐든 한 손으로 하니까 가시가 잘 박히죠. 조심하는 수 밖에요.”
“대상포진 있던 자리 말야. 그 자리에 파스는 누가 붙여 주나.”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가야지 절대 파스 붙이면 안돼요. 언젠가 당신이 우겨서 파스 붙였다가 물집 생겨 오래 고생했잖아요.”
할머니는 꼭 병원을 가라고 단단히 이르며 면박을 줬다. 할아버지는 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조개탕은 못 먹어도 한 달에 두 번은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만드나 가르쳐 주든지 하구려.”
“무슨 소리예요? 뜨거운 거 잘못 만졌다간 큰일 나요. 더구나 한 손으로는 더더욱요. 역 앞 홍가네 식당에서 사 먹고 절대 만들어 먹을 생각일랑 마세요.”


이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헤어지는 것이 싫은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없는 삶을 인정하기 싫다. 그렇다고 알코홀릭으로 방치되다시피 한 아들을 돌보러 가겠다는 할머니를 붙잡을 방도도 없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연극적인 느낌의 대화야말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이자 삶의 현 주소이다.

이 소설 속에는 또 한 공간, 소래포구가 등장하는데, 이 소래포구는 공원처럼 직접 산책하는 장소가 아니라 멀리 바라보는 장소이다.


창밖으로 멀리 펼쳐진 바다 풍경이 들어왔다. 조업을 끝낸 통통배들이 휴식을 위해 소래포구 갯골로 들어오고 있었다. 큰 배들은 바닷물이 더 차오르기를 기다리며 갯골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평화롭다. 그래. 멀리서, 멀리서 보니까 평화로운 거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과 이별이 공원을 산책하는 직접적인 행위로 나타났다면, 동거를 제안하는 근태에게 확답을 하고 있지 않은 내게 소래포구는 멀리 봐라봐야 하는, 평화를 깨고 싶지 않은 그림이다. 나는 사랑에 확신도 빠지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선영아, 저 갯골 끝나는 곳에 염전 있던 거 알지? 지금은 폐염전 자리에 소래습지생태 공원인지 뭔지가 생겼어. 일제 때 소금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염전인데 협궤 열차도 그걸 실어 나르기 위해 그때 개설한 거라더라. 너 어려서 서너 번 망둥이 잡으러 갯골이니 염전 근처로 나랑 쏘다닌 거 생각나니?”
“전혀요.”
나는 창가로 가 할아버지 등 뒤에서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창밖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되는 폐염전 얘기를 할 때도, 할아버지가 소환한 기억에 뛰어들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이 운명에 순응하는, 바람이 불고 싶은 데도 불도록 놔두는 삶이라면, 나는 그 바람조차 맞기 싫어서 어딘가로 숨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할아버지 집에서 나오면서 근태의 전화를 확인하는데 그때 바람이 분다. 결국 바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지나 내게 오고 있는 것이다. 그 바람 끝에 매달린 것은 무엇일지 자못 궁금하다.

2015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3년도 안 되어 단단한 첫 소설집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를 출간한 이선우 소설가의 다음 소설을 기대해본다. 


옛 화학제조시설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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