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길 ~ 금강길 자전거 종주 시, 필히 공산성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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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길 ~ 금강길 자전거 종주 시, 필히 공산성을 보라
  • 이창희 시민기자
  • 승인 2015.05.08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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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시민기자의 라이딩 코리아] 아름다운 공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보지



 

공산성은 역사상 세 명의 왕이 지금의 서울(또는 개성) 땅에서 충남 공주 땅으로 피신했다. 첫번째는 백제시대 문주왕이고 두번째는 고려 현종, 세번째는 조선시대 인조다.

문주왕은 선왕이 고구려에 포위 당하고 죽자 공주로 천도했고, 현종은 거란족 침입으로 몽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왔다. 그리고 하나 더, 백제가 패망할 때 의자왕은 부여에서 이곳으로 피신해 닷새간 머물다 부여로 돌아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하기도 했다.

공주 땅은 어떻게 이 많은 왕들의 안위를 보전케 됐을까. 백제ㆍ고려ㆍ조선 세 왕조를 껴안은 공주의 품은 서기 475년 9월 백제 제21대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3만 병사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 궁궐에서 포위 당했다. 화염에 휩싸인 궁궐의 서문을 빠져 겨우 달아났지만 곧 백제 출신 고구려 병사에 의해 살해됐다. 신라 구원병 1만이 오자 고구려는 퇴각했다. 하지만 왕까지 잃은 백제는 아들 문주왕을 옹립하고 10월 천도한다. 그 발걸음을 멈춘 곳이 충남 공주 땅이다.

제1기 백제의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마침내 제2기 백제 웅진시대를 열게 한 곳, 공산성(公山城)이다. 백제의 웅진 천도는 고구려의 침략이 절대적인 원인이 됐다. 한강 유역을 놓고 삼국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당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아들 장수왕은 툭하면 백제를 공격했다.

장수왕의 영토확장을 위한 남진정책은 427년 평양 천도로 불을 본격 지폈다. 백제 도읍지로 바짝 다가온 장수왕은 마침내 한강 유역에 있던 한성을 초토화, 개로왕을 죽였다. 장수왕(長壽王)은 이름에서 보듯 98세라는 당시 초유의 장수를 기록했으며 무려 80년간 재임,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다. 백제로서는 천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천도한 수도는 지긋지긋한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대비하듯, 북쪽에 큰 강(금강)이 해자 역할을 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야트막한 산을 돌아가며 토성(土城)을 쌓아 대비했다. 웅진성이라 불렀다. 서기 475년 제22대 문주왕 원년부터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그리고 제26대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서기 538년까지 5대 왕 64년간 그리 길지 않은 기간 ‘웅진시대 백제의 역사’를 써내려 갔다.

금강이 북쪽으로부터의 방어망 역할을 해줬고 그 남쪽에 공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제8대 임금 현종이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제2차 침입(1010년)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주로 피란했다. 그때 절도사(節度使) 김은부(金殷傅)가 주민들을 데리고 곰나루에 나가 크게 영접했다.

현종은 서북면순검사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하고 옹립한, 즉 쿠테타 세력에 의해 막 즉위하게 됐는데 거란족이 이를 문제삼아 침략한다. 외란으로 왕위가 지극히 불안했고 주변의 신하조차 도망을 쳐 김은부의 환대가 가슴 깊이 와 닿았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김은부가 예를 갖추고 맞으며 아뢰기를 “임금님께서 산 넘고 물 건너시며, 서리와 눈을 무릅쓰고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고 옷가지와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파산역에 도착하니 아전들이 다 도망가고 끼니 조차 거르게 되었다. 김은부는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올렸다.

공주서 머물던 현종은 다시 전라도 나주로 내려갔다가 거란군이 물러가자 돌아오는 길에 다시 공주에 들러 김은부 집에서 하루 묵게 됐는데 이때 맏딸이 왕의 의복을 만들어 바치니, 왕이 곧 총애했고 아내로 맞아 원성왕후가 됐다.

공주에서 엿새 머문 현종은 귀경했고, 김은부도 중앙에 진출해 영전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둘째와 셋째딸도 모두 현종에게 시집보냈다. 각각 원혜왕후와 원평왕후다. 김은부의 외손자인 원성왕후의 아들 둘은 9대 덕종과 10대 정종이 되었고 원혜왕후의 아들은 11대 문종이 되면서 전란의 충신 김은부는 일약 왕가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거기에 원혜왕후의 딸은 덕종의 비(효사왕후)가 되고 원성왕후의 딸은 문종의 비(인평왕후)가 되면서 김은부는 딸 셋을 왕비로 만들었고 외손자 셋을 국왕에 앉혔으며, 외손녀 두 명을 또 왕비로 만든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가문이 되었다.



지금의 공산성은 백제시대에는 웅진성(熊津城)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公州山城)ㆍ공산성으로 불리다가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렸다. 그 이전 선조때 토성 위에 지금의 석성(石城)으로 재건했다.

공주가 천도 및 피란의 대상이 된 것은 천혜의 지세가 큰 몫을 했다. 다급한 상황에서 정한 도읍지였지만 특히 북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에는 천연요새였다. 넓은 강, 그리고 그 너머에는 또한 차령산맥이 1차 저지선 역할을 해줬다. 조선시대 인조가 몽진했을 때 신하들이 “공주는 주변 지세가 험해 몸을 보전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라며 인조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공주는 기후가 온화해 사람들이 먹고 살아가는데 적합한 조건들을 두루 갖췄다.

하지만 도읍지로 지속해 나가는데에는 문제도 있었다. 터가 좁았고, 홍수때 마다 공주 일대 침수가 심해 수백호의 가옥이 떠내려갔으며 금강 뱃길을 이용해 서해로 나아가는데 따른 어려움이 많아 결국 64년만에 성왕이 사비(부여)로 다시 천도한다. 공산성은 성으로만 존속하게 된다.

웅진시대의 백제는 천도한 문주왕(재임 3년)과 대를 이은 삼근왕(재임 2년)이 일찍 죽음으로써 실제로는 동성왕과 무령왕, 그리고 성왕의 재임기가 전부라 할 정도다.

1500년 전 백제 역사의 향기를 좇아 공산성에 올랐다. 지금은 복원한 산성이지만 60여년 간의 웅진시대 백제 왕조와 조선시대 숨결을 느끼기에는 충분히 고풍스럽고 아름답다.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의 편린들을 추적해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공산성은 장방형의 성곽 길이가 총 2660m로 걸어서 40분 정도 걸린다.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다. 사실상 출입구인 금서루(錦西樓)는 서문이다.

서문 주차장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먼저 줄지어 선 비석군을 만난다. 총 47기의 이 비석들은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이곳에 모아놓았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됐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



공산성 입구에 있는 비석군을 보면서 지그재그 길로 오르면 금서루다. 지난 1993년에 새롭게 복원됐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이다. 공산성의 대표적인 명소로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가 찾은 날은 주말이라 여행객을 위한 행사도 많아 백제의 향기를 만끽할 구경거리가 넘쳐났다.

■ 웅진의 지명 유래 :
공주(公州)의 옛 지명 웅진(熊津)에는 여러 설화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하나를 소개해 본다.

공산성 금서루에서 강 건너 멀리 보이는 연미산(燕尾山)에 백제시대 한 청년이 나무하러 갔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길을 헤맸다. 마침내 동굴을 발견해 찾아가니 아리따운 여인이 그를 맞았다. 나뭇꾼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두 남녀가 하룻밤을 보내게 됐고 이틀밤이 됐으며 마침내 두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됐다.

금서루에서 본 연미산. 멀리 가운데 뾰족한 산이 웅진 지명의 모태가 되는 연미산이다. 몇 해가 지난 어느날, 여인이 동굴문을 잠그지 않고 외출을 하자 평소 이상한 느낌을 가졌던 나뭇꾼이 뒤를 밟았다. 앞서 가던 아내가 사슴을 보고 급히 곰으로 변신해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나뭇꾼은 놀라 금강을 헤엄쳐 달아났다.

이를 본 아내는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지만 오지 않차 두 아이와 함께 강물에 빠져 죽는다. 그 일 이후 가뭄이 심하게 들고 강에선 배가 전복되는 일이 잦아 사람들은 고마나루에 곰신당을 세우고 원혼을 달래주자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이름이 곰나루, 고마나루 즉 웅진이 됐다고 한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 웅주로 불렸고 고려 태조 왕건 때 지금의 이름인 공주로 불려져 내려오고 있다.

현종은 고려 제 8대 왕(재위 1009~1031년)으로 고구려 옛 영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펼쳤다. 때문에 거란족과 전쟁을 두 차례 겪었다. 거란족의 제2차 침입(1010년)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공주와 나주로 몽진했다. 3차 침입(1018년) 때는 연승을 거뒀으며 퇴각하던 거란족을 강감찬 장군이 구주(龜州)에서 전멸시켰다.

이후 약 2세기 동안 우호관계를 이어갔다. 현종 2년(1011년)에 개판한 대장경인 초판고본(初版古本)을 간행한 업적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공산성은 공주에서 내려오는 시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찌기 남쪽에 공주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선경(仙境)의 영롱함이 길이길이 그치지 않도다"

이처럼 마음 즐거운 곳에서
군신(群臣)이 함께 모여 일천 시름 놓아 본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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