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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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
  • 디비딥 장윤석 블로거(인천in 객원기자)
  • 승인 2015.02.24 1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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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비딥의 인천이야기] 15.

 

어릴적 차이나타운 쪽에 있던 해안본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갈 때면 늘 지나치는 곳이 바로 지금의 인천아트플랫폼 위쪽 거리였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발전이 되지 않은 이곳은 낡거나 혹은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대부분이었고, 청관거리도 그렇게 활기차거나 밝지 않았을 때였다.


늘 지나다니던 그 거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있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생각해 보니 인천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들이 많이 있고, 그 이유가 인천의 개항으로 인한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입구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릴적 누구도 이런 작은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어쩌면 생활 속의 작은 역사는 무시하고 지나갔던 당시의 무성의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지금은 중구의 역사적 의미를 재평가하면서... 역사적 의미와 함께 관광의 효과를 함께 고민하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하나둘씩 관심있게 수면에 떠오르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역사의 짜투리일지 모르나, 인천을 이해하고 근대사를 거술러 올라가는 좋은 계기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개항 이후 서양문물과 함께 많은 서양인들이 몰려 들어오고, 그들의 필요성에 의해 생겼을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 대불호텔이 있던 터는 청관의 한 중식당의 주차장이 되어 있다. 


지금은 몰려드는 중국, 일본 관광객들을 위해 최신식 호텔이 저 멀리 자리잡고 있어 사라진 터를 보는 느낌이 남다르다 하겠다.

 










 

인천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들어선 시설들이 많다. 조선 말 이후 인천항이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통로 역할을 한 데다 인적교류 또한 왕성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음식, 제품, 문화, 생활사 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을 인천 시민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인천에는 구미 각국의 외교사절, 선교사, 여행객들이 밀려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목적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인천에 도착하면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철도가 놓이기 전이어서 교통편이라고는 조랑말이나 가마 정도가 고작이었다. 걸어서 가려면 하루 종일 걸렸다. 또 배의 도착시간에 따라 하루를 묵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자 자연스레 숙박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숙박시설의 정결함을 유난히 따지는 서양인들은 주막에 재울 수 없는 일이어서 근대적 숙박시설인 호텔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효시가 1888년 인천시 중국 중앙동에 세워진 '대불호텔'이다.


이 호텔은 1902년 서울시 중구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대불호텔은 일본조계 입구에 벽돌식의 3층 건물로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에 의해 1887년 착공되어 다음해 완공되었다. 당시 일본조계의 첫 집이 호리씨 자택이었고, 두번째가 대불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구라파인이나 미국인을 겨냥해 서양식으로 설계되었다. 대불호텔 건너편 2층 건물에서 중국인 '이타이'라는 사람도 외국인 상대로 장사를 했는데 1층에는 잡화 상점을 차렸고, 2층에는 '스튜워드호텔'을 개업했다.
 

대불 호텔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맞이했으며, 침대가 딸린 객실 수는 11개, 다다미 수는 240개에 달했다. 숙박료는 당시 화폐로 상급 객실 2원 50전, 중급 2원, 하급 1원 50전이었다. 같은 시기 일본인 여관인 '수월루'의 상급 객실 숙박료가 1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2배 이상 비쌌음을 알 수 있다. 호텔 내에서는 외국인들의 입에 맞는 서양요리도 제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불 호텔은 일제시대 때 중국요리집인 '중화루'로 바뀌었다. 중화루는 공화춘, 동흥루 등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3대 중국 요리집으로 명성을 떨쳤다.

 

1885년 4월 아펜젤러 목사가 대불호텔에 묵었을 무렵의 기록으로 보아 서양인들에게 최초로 커피를 제공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나고 보면 아쉬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근대적 역사유물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었을 지난 시간 동안 보호받지 못하고 사라졌을 많은 유산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은 시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역사를 챙기고 있지만... 근대적 거리를 통한 관광의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로 재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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