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철도와 함께 이어온 다리 - 화평동 구름다리 / 화평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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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철도와 함께 이어온 다리 - 화평동 구름다리 / 화평운교
  • 디비딥 장윤석 블로거(인천in 객원기자)
  • 승인 2015.02.17 09: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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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비딥의 인천이야기] 14.

 

짧은 스포츠머리의 중학교 시절 ...
방학이 되고 보면 그다지 할일이 없어 지루해하던 나날들... 

주머니를 뒤져 오백원이나 어쩌다 천원짜리라도 나오게 되면 어슬렁거리며 홍예문을 넘어 타박타박 걸어 인일여고의 좁은 도로를 따라 인천극장으로 향했다.


지금의 화평동 냉면거리 바로 옆의 인천극장을 찾아갈 때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다리가, 바로 아래 전철이 쉴새없이 지나다니는 구름다리였다.

 

 

우리의 근대화 역사 속에서 편리함의 속도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경인선 개통을 앞두고 있을 1899년 7월 17일자 <독립신문>에는 인천전환국(옛 인천여고 자리) 옆의 산을 파헤치는 작업중 흙더미가 무너져 인부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상하는 기사가 났다.

아마도 그 위치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송월, 화평동으로 넘어가는 위치였을 꺼라 추정한다면 바로 '화평운교'가 이때 즈음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경인철도가 화도동과 평동 일대, 송월동을 가로지르자 통행의 불편으로 언덕에 놓게 되었다는 것...

 

이 다리가 놓이면서 당시 한국인 동네였던 화평, 화수동 주민들은 이 구름다리를 지나 홍예문을 통해 도심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해마다 가을이면 일본인 축제 행렬이 지나갔다고 하는데, 인천신사(지금의 인천여상)에서 출발한 일본인들의 신여 '미꼬시'를 앞세운 소위 왓쇼이가 구름다리를 건너갔는데 인근의 사람들에게는 희한한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송월동 응봉산 중기가 화도진으로 연결되는 이 지점을 <인천석금>의 저자인 고일 선생은 발길이 뜸하여 강도, 살인이 빈발했다고 적고 있다. 아무튼 이곳에 철로가 뚫리면서 육교가 놓이게 되었다. 이를 '구름다리'라 불렀다.


일본인들은 검은다리 즉 흑교라고 불렀는데 자동차 한 대 지나갈 만큼 좁았다고 하는데 나무난간이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자살하는 장소로 유명해지는데 인천경찰서와 동인천서의 관할구역 경계로 서로 책임을 회피해 시신이 오랫동안 방치되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그 후에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확장된 것은 1967년 5월이었다. 그리고 후에 경인철도의 복복선화로 또 한 번 확장되었다.

 

 

전동 지역에서 화평동, 만석동으로 연결되는 일명 화평동 구름다리 확장공사 장면이다. 기계 장비 전혀 없이 지게나 손수레 등으로 일을 하고 있다. 아이들의 방한모나 의복으로 보아 겨울철인 듯하다. 1970년대 이전 풍경으로 보인다.

 

 

양쪽 안벽 공사는 마무리가 되었고, 그 옆의 축대를 보강중인 화평동 육교 확장 공사장면이다. 화도진도서관에 소장 중인 최성연 선생의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주 예전부터 우리에 삶 속에서 요긴하고 중요한 다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지점은 화평동, 인현동, 화수동, 만석동, 전동의 경계지역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

예전에 방범대원들이 저녁이 되면 이곳에 모여 업무 등 조회를 하고 관할 구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인천을 찾는 많은 이들이 화평동 냉면거리와 화도진을 찾아 구경을 하고, 이 다리를 지나 자유공원으로 향할 때 한번쯤은 지난 옛날의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며 건너는 것은 어떨는지...

 

무심코 수없이 지나쳤던 이 다리가 그렇게 오래되었는지 몰랐던 것을 감안한다면... 적어도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한 장과 함께 마음에 담아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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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댓글입니다 2015-05-03 07: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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