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는 눈길 위에서도 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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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는 눈길 위에서도 쉬지 않는다
  • 이희인 여행가 겸 작가
  • 승인 2015.01.29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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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세계 책의 수도 인천 기획] 이희인의 <길 위의 책, 길 위의 맛> 2. 겨울 설악 부근




 

나그네는 눈길 위에서도 쉬지 않는다
 
- 찾아간 곳 / 겨울 설악 부근
 
- 읽은 책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영동에 대설주의보가 떨어졌단 소식이 전해지면 일을 할 수가 없다.
 
일이 당최 손에 잡히지 않아 전전긍긍한다. 우리 국토, 아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설경이 거기 펼쳐져 있을 지도 모르는데 어찌 안 그럴 수 있을까? 다른 고장의 폭설 소식과는 유가 다르다. 다른 고장은 뉴스를 따라 가봤자 이미 눈은 그치고 제설작업이 마무리되어 순백의 눈보다는 잿빛 폐허를 보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동의 대설주의보는 다르다. 큰 눈이 하루 이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설경에 관한 한 영동의 대설주의보만큼은 늘 확실했다.
 
물론 그곳 사람들에게는 무척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큰 눈은 그 속에 사는 사람과 이방인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곤 한다. 당장 삽 들고 눈 치우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불청객일 따름이다. 하지만 나는 기꺼이 불청객이 되기로 작정했다. 이제 황량한 도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유년의 하얀 설경을 간절히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눈 치우는 일이라도 거들어 드리고 싶지만 늘 마음뿐이다. 나그네는 그저 무능한 사람이기도 하다.



근래 영동의 눈은 대개 2월말이나 3월초에 집중되었다. 몇 해 관심을 갖고 본 바로는 3월 초에 대개 어마어마한 폭설이 영동을 강타했다. 폭설을 뚫고 인제나 속초 즈음으로 버스를 타고 건너갈 때면 늘 나그네 된 마음이 깊어진다. 눈을 흠뻑 맞게 될 렌즈를 챙긴 헐거운 카메라 외에도, 배낭에는 나그네의 객수(客愁)를 부추겨줄 책 한 권이 담기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이순원의 단편 <은비령>을 넣어 왔고, 언젠가는 하얗게 눈 덮인 내설악 백담의 풍경을 담은 윤대녕의 단편 <대설주의보>를 가져 오기도 했다. 모두 설악 주변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다. 하지만 이 땅을 생각하면, 이제하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첫머리에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설 속의 계절 또한 겨울이다. 소설을 읽으며 영동으로 넘어오면 어쩐지 근사한 여행이 될 것 같다.
 
회사에 휴가를 내어, 오래 전부터 보관한 채 어쩌질 못하고 있던 아내의 유골가루를 뿌리고자 동해바다를 찾은 중년의 사내. 그가 설악동이며 속초, 양양, 인제, 원통 등을 오가며 겪는 며칠간의 기이한 사건과 이야기가 소설의 내용을 이룬다. 곧 폭설로 교통이 두절되리라는 산과 고갯길을 넘나들며 사내는 설악동 여관 촌에서 예기치 않은 화투판에 끼어들거나, 함께 다니는 수상한 간호사와 병색 짙은 노인을 만나기도 한다. 짧은 휴가에 만나게 되는 뜻밖의 사건들은 나그네의 발걸음을 예기치 않은 곳들로 이끈다. 나그네란 그런 것. 갈 곳이 늘 분명하거나 돌아갈 날짜가 명확한 사람에겐 어쩐지 나그네란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을 따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자만이 나그네란 이름을 얻을 수 있을 터다. 나그네란 모름지기 ‘여행자’와도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그네가 길을 떠다니는 형식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방랑에 가까울 것이다. 모든 나그네가 여행자일 수는 있지만 모든 여행자가 나그네 될 수는 없을 듯하다. 어느 길에서도 잠시 편히 쉴 수 없는 게 나그네의 발걸음. 지금은 그 걸음으로 눈길을 헤집고 갈 따름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도 나그네가 있을까? 인간문화재만큼 희귀해진 것은 아닐까?

 

길을 잃고 지친 나그네들에게 차부(터미널)의 아가씨들은 늘 이렇게 매정하고 차갑다.
 
“오늘 차 끝났어요. 약수리까지밖에 못 가요.” 양양 터미널에 내려 들여다본 창구 너머에서 아가씨가 그렇게 말했을 때도 돈을 들이민 채 넋이 빠져 그는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대설주의보 땜에 못 간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요? 곧 시작한대요. 오색리까지라도 끊어드려요?” “서울 표는 있소?” “강릉 가서 고속버스 타셔야죠. 거기두 오후부턴 끊이질 걸요?”
 
눈이 온다면 얼마나 오겠다기에 이러는 건가 ... 여기서 길이 끊어지면 사방이 다 막히는 셈이 된다.
 
                                           (이제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서)
  
서너 해 전 설악의 폭설을 뚫고 들어갔을 땐 푸짐한 폭설 사이에 난 좁은 외길을 따라 깊숙한 안쪽의 비선대 입구까지 갈 수 있었다. 지난해엔 눈이 더 막심해 신흥사에서 그만 길이 끊겼다. 그전에 비선대의 눈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주저앉아 먹었던 팔각정 휴게소의 파전과 겨울 동치미가 간절히 그리웠다. 아, 이 겨울엔 청운정의 동치미를 못 먹게 됐구나! 하고. 대신 속초로 돌아와 게스트하우스에 빈방을 하나 얻은 뒤 속초항 앞의 생선조림 가게로 나왔다.
 
생선회를 좋아한다. 이제는 눈을 감고 회를 먹어도 대략 무슨 회인지 알아맞출 자신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겨울엔 회가 아니다. 동해안으로 넘어가 동해안 물고기인 도루묵이나 양미리, 곰치, 가재미 따위를 먹는 게 겨울 식도락의 즐거움이다. 뻘이 발달한 서해안 바다 맛이 화려하고 짭조름하며 다양한 식감의 먹거리들을 선사하다면 동해안의 물고기들은 어쩐지 가난하고 소박한 느낌, 그리고 한 겨울에 더 따뜻하고 얼큰한 느낌을 전해준다. 겨울 동해안을 가득 채웠던 국민 생선 명태는 이제 그 바다를 떠났다고 한다. 그러니 영동에 폭설이 내렸다고 하면 무조건 거기로 넘어가 동해안 물고기 조림들을 먹어야 한다.

  

속초항 부근에는 생선조림, 생선탕 가게들이 몇 나란히 늘어서 있다. 오래 전 묵었던 숙소 주인이 추천해준 뒤로 속초에 올 때마다 자주 곳들인데 아무 데나 들어가도 후회하지 않을 맛집들이다. 거기서 엊그제 찾아가 먹은 음식은 도치알탕이다. 곰치, 장치 등과 더불어 동해의 못난이 3인방으로 불리는 도치는 못 생긴 외모에다가 가슴에는 흡반이 있어 바위 위에 붙어사는 좀 해괴한 녀석이다. 녀석의 가슴과 배 속에 가득 든 알들을 뽑아내 탕으로 끓여 내는데 이것이 또한 겨울의 별미다. 송글송글 나그네의 온몸에 땀이 맺는 건 좁은 해변식당을 후끈하게 달구고 있는 나무 난로 때문이기도 하고, 이것, 도치알탕 때문이기도 하다. 눈길에서도 쉬지 못했던 나그네의 발걸음이 이런 한 그릇의 탕 앞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으리라. 술 한 잔에 불콰해진 몸으로 해변 음식점 밖을 나서면 그새 또 두꺼워진 눈송이와 바닷 바람이 발길을 막아선다.



 

소설 말미에 ‘나그네’가 서울로 귀경하기 위해 택한 길은 원통 쪽에서 춘천으로 이어지는 소양호 뱃길이다. 8, 90년대까지만 해도 꽤 널리 이용된 길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널리 이용되는 ‘미시령’이란 지명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소설에서, 옛 길과 지금의 길을 비교하는 일도 흥미롭다. 그렇게 어떤 길은 세상의 지도 위에 새로 그려지고, 어떤 길은 사람들 기억으로부터 멀리 잊히고 하얀 폭설에도 지워져 간다. 미시령과 진부령 사이, 오래 전 보부상들이 즐겨 넘나들던 새이령도 망각의 길을 걸은 지 오래다. 앞으로 또 어떤 길이 새로 뚫리고 또 잊힐까? 소설이란 어쩌면, 새로 뚫린 빠르기만 하고 온기라곤 없는 부박한 길들에 절망하는 일. 구불구불 더디게 흐르다 아무데나 쉬어 가게 만드는 사라져간 옛길들에 잔뜩 연민을 보내는 쓸쓸한 연가에 다름 아닐 터. 미시령 간신히 넘어 또 고단하면 용대리 마을 덕장에 겨우내 눈과 바람 다 맞은 황태 한 그릇을 비우고 가도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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