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은 민족의 소금' - 50년 사제 생활의 길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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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은 민족의 소금' - 50년 사제 생활의 길잡이가 되다
  • 유사랑
  • 승인 2024.03.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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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30) 前 인천성모병원장 이학노 몬시뇰 - 유사랑 / 시사만평가, 자유기고가
이학노 몬시뇰

 

“신부란 본래 자신을 감추고 오직 한 분 주님만 드러내는 게 본분인 사람인데, 정색하고 내 개인적인 얘길 하려다 보니 무척 어색하고 할 말도 궁하네요. 지금껏 어디서 내 자신의 얘길 이렇게 길게 해본 적이 없거든요. 모교인 제물포고 총동창회 일이라 막상 거절하기도 어렵고, 저처럼 다 늙은 신부 얘기가 무에 필요할까 싶기도 한데, 또 이렇게 기억하고 일부러 찾아주니 감사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돌아보면 사제생활 50년 동안 주로 행정관리와 기획 쪽 분야를 맡다 보니 정작 사목활동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이 못내 아쉬워요. 신도들과 부대끼며 삶을 나누고 그들의 고민과 인생 짐을 함께 지겠다는 서원과 함께 들어선 사제의 길인데, 그래도 어쩝니까, 모든 게 다 주님의 뜻이고, 교구에서 맡겨준 업무를 자신의 역량껏 해내야 하는 것 역시도 신부의 일인 걸요.”

 

인천중학교 12회, 제물포고등학교 9회 출신인 이학노 신부는 덕망 있는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서임되는 ‘몬시뇰’이다. 평생 인천교구 신부로 힘든 일, 궂은 일 마다않고 종교계는 물론 인천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해 온 노력을 교구가 인정했다는 의미다. 인천성모병원장과 인천가톨릭의료원장을 역임했고, 2010년과 2011년 2년 연속 대한민국 경제리더 대상(지속가능 경영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제는 은퇴해 구월동의 한 아파트에서 조용히 미사와 말씀 묵상으로 소일 중이다.

 

2011. 9. 27._대한민국 경제리더 대상 수상(사진출처 -경인일보)
2011. 9. 27._대한민국 경제리더 대상 수상(사진출처 -경인일보)
이학노 신부의 성경책
이학노 신부의 성경책

 

“강화 불은면에서 태어나 불은초등학교를 다니다, 3학년 때 인천으로 이주해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중학교에 들어갔어요. 고등학교는 내심 공업계로 진학할 생각이었죠. 부친께서 친구분과 하시던 목재 사업이 자금을 모두 날리면서 생활이 어려웠거든요. 하루빨리 취업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중3 때 담임이던 이경남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공고보다는 공과대학을 가는 편이 나중에 취업도 쉽고 대우도 훨씬 좋다며, 거의 반강제로 제고 원서를 써주셨어요. 이경남 선생님은 인중 동문이자 잊을 수 없는 은사로, 후에 대한항공 지점장을 거쳐 캐나다로 이민을 가신 분이죠. 당시 제고는 전국에서도 소문난 명문고로, 그때 정원이 240명이었어요. 인중 정원이 480명이었으니까 절반은 탈락한다는 얘기였죠. 거기다 경기도 전역에서 공부 깨나 한다는 아이들이 죄다 모여들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합격할 수 있었어요.”

 

‘길영희 교장’과 ‘무감독 시험’

이학노 신부는 제고 시절, 지금껏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두 가지 기억으로, 주저 없이 을 꼽는다. 인중 때부터 마주하기 시작한 길영희 교장은 5.16 후 재건복 복장으로 조회 시간이면 강단에 올라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강조하며 사자후를 토하곤 했다. 웃터골이 쩌렁쩌렁 울리던 길 교장의 훈시에 주위 시민들까지 일부러 찾아와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단다.

무감독 시험은 시험 때마다 학생들의 양심에 맡겨두고, 아예 시험 감독을 배치하지 않는 제물포고등학교만의 정체성과 교육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도다. 무감독 시험제도는, 1956년 처음 시행된 이래 현재까지 7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이어지며 제물포고등학교의 품격이자 살아있는 전통으로 교육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이런 두 가지의 명징한 기억은 제고인으로서의 긍지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게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율적인 인격체로 당당히 성장하도록 이끄는 길잡이가 되었다.

 

“무감독 시험은 일종의 에덴동산의 선악과 같은 거예요. 처음 인간 아담은 유혹에 넘어가 언약을 깨고 낙원을 잃었지만, 제고인들은 스스로 마음 속 유혹을 견디고 양심을 지키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이어간 거죠.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희 땐 복도에 해답지를 일부러 붙여두기도 했어요. 잠깐 화장실 가는 사이 슬쩍 봐도 누가 알겠어요? 놀라운 건 낙제를 할지언정, 아무도 그걸 보려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혹시라도 옆자리 짝꿍의 시험 답안지가 자신도 모르게 눈에 들어올세라, 아예 고개를 처박고 시험을 보기까지 했죠. 선생님들도 낙제 학생들을 야단치는 대신, 괜찮다고 장하다고 양심을 지킨 것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도록, 오히려 어깨를 두드려 주셨어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어린 그 시절 나도 모르는 사이 정립된 정직과 양심이라는 기제가 평생 저를 이끌었다고 생각해요. 온전히 자기 실력이 아닌, 반칙을 통해 얻은 성과는 결국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값진 경험이 된 거죠. 물론 제 동창 중에는 그때 버릇으로 굳어진 정직성 때문에 사회생활이 불편했노라고 우스갯소리도 하곤 해요.”

 

이학노 몬시뇰과 내성외왕(內聖外王 - 안으로는 성인,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춤(학식과 덕행을 아울러 지닌 사람)). 

 

이작도 MT에서 싹튼 신부의 길

이학노 신부는 제고 시절 답동성당 YCS(천주교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고2 여름방학 때 남녀 학생 70명을 이끌고 이작도로 MT를 다녀왔다가, 인솔자로 따라온 선로벨도 보좌신부와 수녀들이 주교로부터 크게 질책을 받는 일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성당에서 남녀 구별이 엄격해 좌석조차 따로 앉던 시절이라, 남녀 학생이 며칠씩 섬에서 함께 합숙했다는 보고에, 혹시라도 이상한 소문이 성당에 퍼질 것을 우려해 주교가 격노했던 것이다.

 

“학생회장인 제가 프로그램을 계획했고 진행했으며, 여학생들은 이작도의 공소 건물에서 지내고 남학생들은 가져간 텐트에서 생활했다는 제 해명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보좌신부님과 수녀님들께 주교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근데 이상하죠? 그런 사건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즐겁게 다녀온 그 이작도 MT 기간 동안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도 신부가 되고 싶다’라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 거예요. 특별히 성령의 감화나 어떤 영적 각성 같은 것도 없었는데 말이죠. 점점 뚜렷해지는 제 내면의 소리 때문에 여름방학 내내 고민하다가, 결국 선로벨도 보좌신부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어요. 이제 고3이 되면 문과나 이과를 선택해야 하는데 공대를 가야 할지 신학대를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는 제 말에, 보좌신부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토요일까지 서로 기도해보고, 토요일 오후에 다시 이야기해 보자 시더군요.”

 

그렇게 토요일 오후 다시 만난 선로벨도 보좌신부는 외국인인데다 사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대뜸 ‘화투나 치자’시더니 화투 중간중간 ‘사제생활의 어려움과 외로움’, ‘내려놓아야 할 많은 것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내면은 날마다 가시덤불을 걸어야’ 하는 사제생활의 고충에 대해 적나라한 설명을 조목조목 이어 갔다. 그러고는 이걸 기꺼이 견딜 용의가 있다면, 사람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사제의 길을 걷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도 드물 거라고 조언해주었다.

 

“지금도 그 보좌신부님의 솔직한 조언에 감사하는 마음이 커요.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가족들의 동의를 얻는 일이었죠. 모친께서는 한국전쟁 이후 가톨릭 신자로 성당에 다니셨지만, 3형제 중 막내였던 부친께서는, 과거 가톨릭 신자들은 집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알고 계셔서 천주교를 탐탁지 않아 하셨거든요. 그런데 제 결심이 확고하다는 걸 아시고는 의외로 순순히 허락해주셨어요. 당시 군복무 중이던 형님도 ‘집안걱정 말고 네 인생이니 네가 결정하라’고 흔쾌히 응원해 주었고요. 그렇게 1965년 혜화동 서울가톨릭대학에 입학했어요. 신학을 공부하려면 라틴어가 필수라, 1년간 휴학 후 라틴어 공부에만 전념하고, 철학을 배우는 예과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죠. 원래는 강원도 원주의 1군사령부 행정요원으로 배치가 되었는데, 갑자기 행정요원 감축 지시가 내려오면서, 춘천의 1108 야전공병단 소속으로 소양강댐 이설도로 건설에 투입되었어요. 공사 도중, 흙더미를 폭파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전우들이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죠. 그때 하느님의 섭리와 그림자 같은 생의 덧없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대 후에는 다시 본과 신학과정에 복학해, 7년의 공부를 마치고 10년 만에 신부 서품을 받았어요. 서품받기 1년 전에는 전동의 화수동성당에서 부제 자격으로, 제 부친께 제가 직접 세례를 베푸는 감격도 맛봤죠. 제가 신학교를 가게 되면서 이미 부친께서는 아무도 몰래 성당에 나가고 계셨어요. 부제가 되면 독신 서약을 하고, 세례를 주는 게 가능하거든요. 물론 먼저 본당신부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요.”

 

2016. 2. 11._세계병자의 날 특별미사(사진출처 - 헬스경향)
2016. 2. 11. 세계병자의 날 특별미사(사진출처 - 헬스경향)

 

부평1동성당 보좌신부로 사목활동 시작 

처음 인천교구 산하 부평1동성당(현재는 4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해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정확히 신부 서품 2년 뒤 또다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반사병이 아니라, 대위 계급장을 달고 군종장교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연유를 설명하자면, 국방부가 인천교구에 부족한 군종장교 지원을 요청하게 되면서, 아직 신참이랄 수 있는 젊은 이학노 신부에게 그 직무가 맡겨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총 16개 교구(군종교구1 제외)로 구성되는데, 인사권은 각 교구장에게 있지만, 전체 참사회의 모든 의결권은 주교님께 있어요. 다양한 의견들은 참고만 할 뿐이죠. 신부는 순명, 청빈, 순결 등 몇 가지 사전서약을 목숨처럼 지켜야 할 뿐 아니라, 군인처럼 교구장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곳이 어디든 가야 해요. 주님의 십자가 군병이잖아요? 경기도 포천의 6군단에서 군종신부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훈련을 광주상무대에서, 22분의 개신교 목사와 8분의 신부, 4분의 법사, 그리고 20여 분의 간호의정장교와 X레이 기사(소위) 등과 함께 받았어요.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유익한 기회였죠.”

 

4년간의 군종신부 임기를 마치고는 인천간석성당 본당신부를 시작으로, 2년 뒤에는 교구청 사목국장으로 주교의 복음사목계획 실행을 3년간 담당했다. 그 뒤 몇몇 본당신부와 학교, 병원 등을 거쳐 90년에는 총대리신부를 맡았다. 주교의 권한대행자로 인사권만 없을 뿐이어서 ‘주교님의 그림자’로 불리는 직책이다. 다시 주안3동성당 본당신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처음 천주신앙의 탯줄을 자른 영혼의 고향과도 같은 답동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답동성당 재임 때 신부로서 영예로운 경칭인 ‘몬시뇰’을 서임 받았다.

 

2003. 9. 26._몬시뇰 서임 축하 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출처 -가톨릭신문)
2003. 9. 26. 몬시뇰 서임 축하 미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진출처 -가톨릭신문)

 

“1997년 강화에 짓고 있던 ‘인천가톨릭대 사무처장 및 건설본부장에 임명되었을 때는 아무한테도 말은 못 했지만,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어요. 우리 인천교구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인천지역의 대표적 신학대학을 짓는데, 성당 주임신부나 하던 제가 건축에 대해 뭘 얼마나 알았겠어요? 걱정이 태산일 수밖에요. 틈만 나면 전문 서적을 뒤적이고, 여기저기 묻고, 발이 부르터라 현장을 찾아다녔죠. 그렇게 건축 전반에 관해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던 시기예요. 그래봤자 수박 겉핥기로 치부될지도 모르지만, 건축공법에서부터 인허가 문제며 건축행정 전반에 걸쳐 나름대로 눈이 뜨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자부해요.”

 

인천가톨릭대 사무처장 및 건설본부장을 마치고는 잠시 인천교구 총대리를 재역임했다. 2007년 2월, 가톨릭대인천성모병원장으로 부임해서는, 2014년 1월부터 인천가톨릭의료원장까지 겸임하게 됐다. 그리고 2017년 12월 25일을 끝으로 퇴임하고, 은퇴했다. 은퇴를 했지만 사실 사제에게 은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평생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며 사는 게 사제의 본분인 것을. 한번 사제로 부르심을 받은 사제는 주 앞에 가는 그날까지 오직 사제로 살아갈 뿐이다.

이학노 신부의 세례명은 ‘요셉(Joseph)’이다. ‘하느님께서 더하신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계보를 잇는 인물로,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고, 신약에서는 예수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이름이다. 제고인의 정신을 평생 지금껏 품고 살아온 이학노 신부의 남은 생이 요셉이라는 이름처럼 더욱더 풍성해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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