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다니지 못하는 경인운하, 10년이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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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다니지 못하는 경인운하, 10년이 흐르고...
  • 인천녹색연합
  • 승인 2024.03.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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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환경운동 30년]
(13) 경인운하 건설 반대운동
경인아라뱃길

 

경인운하는 지금의 ‘경인아라뱃길’, ‘아라천’ 그리고 옛 굴포천방수로이다. 서울시 강서구 개화동 행주대교 인근 아라 한강갑문에서 시작해 김포시, 인천시 계양구, 인천시 서구를 지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경인운하는 본래 민자사업으로 추진되었다가 2008년 공공사업으로 전환된 후 한국수자원공사가 사업 시행자가 되어 2009년 착공됐다. 공사는 2011년에 끝났다.

경인운하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이전에도 운하 건설의 시도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흔적이 원통이고개 설화다. 1970년대에도 운하 건설 구상은 있었지만 경제성이 없어 백지화 됐다.

경인운하 건설 계획이 다시 등장한 건 1980년대 말이다. 1987년에 있었던 홍수가 논의를 촉발시켰다. 1980년대까지 굴포천 유역은 빈번하게 범람해서 주변 지역에 피해를 줬다. 1987년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기존 수준을 뛰어넘는 강풍과 폭우가 내려 곳곳에 피해를 남겼다. 태풍 셀마의 여파였다. 굴포천 역시 집중호우를 버티지 못하고 범람했다. 많은 가옥이 침수되고 이재민이 생겼다.

이후 1989년 6월 26일, 정부는 경인운하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경기도 김포군 계양면을 기점으로 해서 인천시 북구 백석동을 연결하는 16㎞ 직선구간에 전장 21㎞로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너비 100m, 깊이 3m 규모로 조성해 소형 화물선, 바지선, 관광유람선 등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도 확정했다. 그리고 한강에서 굴포천까지 5㎞는 기존 굴포천을 준설해서 연결하기로 했다.

이 계획은 수년간 타당성 논란에 휩싸이다가 1992년 12월 12일, 경인운하 건설의 전단계인 굴포천 방수로 공사가 일단 먼저 착공됐다. 경인운하 건설 결정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방수로 개설 구간은 동양동, 검암동, 백석동에 걸친 15.2㎞ 구간이었다.

굴포천 방수로 공사가 진행되던 중에 건설부는 1994년 12월 20일, 경인운하 건설사업을 민자유치대상사업으로 선정했다. 기본계획안 설명회는 1995년 8월 4일에 있었다. 하지만, 착공은 해를 넘기기를 거듭했다. 1999년 11월 10일, 사업을 주도할 경인운하(주)가 공식 출범했지만 여전히 사업에 속도는 붙지 않았다.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인천녹색연합은 ‘경인운하 건설 저지를 위한 인천환경단체대책위’, ‘경인운하 건설 반대를 위한 인천시민사회대책위’, ‘경인운하 건설 저지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 ‘경인운하백지화 수도권공동대책위원회’ 등 시민사회단체들과 활동을 함께 하며 경인운하 건설 중단을 촉구해 왔다. 경인운하의 주 사업구간이 인천지역이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는 인천시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인천녹색연합은 사업과 관련된 모든 자료의 공개와 정치인들의 건설 공약 철회 등을 요구하며 경인운하 건설 백지화 운동의 강도를 높였다.

마침 2000년 4월 13일은 제16대 국회의원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인천녹색연합은 이 해 23일, ‘경인운하 건설 전면 재검토’ 등이 포함된 16개의 인천지역 환경정책과제를 선정해서 공약에 반영하도록 각 정당과 후보자들에게 발송했다. 이어 공약 채택 여부를 확인해 발표하고, 공약 이행 여부를 매년 평가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인운하 건설사업은 2001년, 방수로 건설을 재개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인천녹색연합은 이것을 편법으로 보았다. 막아야 했다. 2001년 11월 11일 자정,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경인운하 건설 현장에 높이 5m의 철골 구조물을 설치해 그 위에 올라가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 농성은 23일간 계속됐다. 시민단체들은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철저한 평가, 불법적인 건설공사 중지 등을 요구했다.

이듬해인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해양수산부 장관 출신인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해를 넘겨 2003년 1월 24일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경인운하 사업의 중단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굴포천 임시방수로 공사는 적정규모에 대한 판단을 거쳐 사업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경인운하 사업은 일단 백지화 됐다. 하지만 끝난 건 아니었다.

2003년 8월 12일, 국회 건설교통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4명이 수자원공사의 초청으로 경인운하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여기서 공사 재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주민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인천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현장사무소를 찾아가 국회의원들에게 경인운하 사업을 백지화 시킬 것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의견서를 전달했다.

이후 한반도대운하를 공약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인천녹색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의 반대가 끊이지 않았지만 경인운하는 한반도대운하의 또다른 이름인 4대강사업의 전초사업을 2009년 착공되었다.

 

 

마침내 공사를 끝낸 경인운하가 2012년 5월 25일 정식 개통됐다. ‘경인아라뱃길’이란 이름을 갖고 등장했다. 정부가 장담했던 것과 달리 경인아라뱃길에서 배를 보는 건 힘들었다. 인천녹색연합을 비롯한 인천지역 환경단체들은 아라뱃길의 수질을 조사했고 클로로필, 대장균 등 수질은 관리목표치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후 한국수자원공사는 폭기장치를 설치하고 수질관리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인천녹색연합은 2019년 11월 14일, 가톨릭환경연대, 인천환경운동연합과 함께 ‘경인운하 아라뱃길 새로운 기능재정립 모색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정부는 본래 경인운하가 뱃길이라고 했지만 화물과 여객의 운송 기능은 사실상 실패했다. 인천녹색연합은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본래의 기능이었던 ‘주운기능’을 축소하고 수질 개선에 힘써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닫혀 있는 서해갑문을 개방해서 물의 흐름을 회복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도 환경부의 경인아라뱃길의 기능 재정립의 필요성을 인식해 2020년 경인아라뱃길 공론화위원회를 열고 경인아라뱃길의 기능 조정을 고민해 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21년 2월 3일, 주운 기능은 야간에만 운행할 수 있도록 축소시킬 것, 화물수송 실적 모니터링을 통해 주운 기능을 폐지할 것, 아라천 수질을 2등급 수준으로 개선할 것 등을 권고하였다. 정부가 경인운하의 실패와 기능전환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경인운하의 건설 과정이 타당하지 않다고 해서, 그리고 그 기능이 본래의 목적을 벗어났다고 해서, 경인운하를 흙으로 묻어버릴 순 없다. 인천녹색연합은 지금의 경인아라뱃길이 시민의 하천으로 거듭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접근성이 개선되고, 친수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수질로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20여 년 넘게 추진되어 온 경인운하 반대운동은 이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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