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되고 오염되는 칠레의 만년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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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되고 오염되는 칠레의 만년 빙하
  • 김연식
  • 승인 2016.04.1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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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파도를 거스르는 항해 - 김연식 / 그린피스 항해사

사진1. 남태평양을 항해하는 에스페란자 호. 역풍과 역조에 항해는 힘겨웠다. 선수에 부딪친 파도가 조타실까지 덮쳤다.


# 주로 역풍, 가끔 순풍

-혼잡한 전철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요. 내가 갈 곳은 이들과 반대예요. 아무리 몰려온다한들 돌아설 겁니까? 어떻게든 뚫고 나가야죠. 쉽지 않아요. 어깨에 부딪혀 한 사람을 보내면 다음 사람이 나타나요. 행렬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전체와 싸워야 내 길을 갈 수 있어요. 하지만 가야할 곳이 분명한 사람은 힘들어도 절대로, 절대로 돌아서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인지 모르겠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였는지, 어느 스님의 글이었는지 학창시절 가슴을 붉게 달궜던 메시지다. ‘목적지가 분명한 사람은 세파에 굴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출근길 인파에 치여 본 적도, 부모님과 주변의 반대를 거스르지도, 누군가와 대적해본 적도 없는 풋내기였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심지 곧은 자의 결연한 각오, 그 고단한 발걸음을 말이다.

에스페란자의 대서양 항해는 그런 고난의 연속이었다. 남태평양을 반시계 방향으로 흐르는 해류는 칠레 앞바다에서 북으로 거센 흐름을 만들었다.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연어처럼, 남으로 향하는 배는 북으로 흐르는 해류를 온 몸으로 밀쳐내며 고집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마저 반대. 역조와 역풍 속에서 우리는 칠레를 향해 뱃머리를 고정시켰다. 배는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다. 종종 선수에 부딪힌 파도가 조타실 창문을 때렸다. 항해는 고단했다.

해류를 거스르는 배 위에서 나는 다산 정약용을 생각했다. 짐작할 수 없는 기나긴 유배의 시간, 그 고독과 고난을 추측하려 애썼다.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를 더듬었고, 한용운을 떠올렸다. 한자 한자에 맺혀있는 시인의 고뇌에 감히 근접하려 발버둥쳤다. 그런 밤에 만나는 영웅은 어느 슬픈 인간이었다. 체 게바라와 이순신의 고단한 밤, 슬픈 죽음을 영화와 문장으로 짚을 때 나는 두려웠다. 시대를 거스른 영웅호걸을 생각하며 내 약한 마음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언론학을 전공해 신문사에 다니다 사표를 쓰고, 엉뚱하게 상선 선원이 되어 때로는 홀대받고 차별받고 배제당하고, 그러다 어찌어찌 자리 잡는다 싶더니 5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그린피스 항해사가 되기까지. 매번 새로운 삶의 항로로 나아갈 때마다 나는 많은 이들의 어깨에 부딪혔다. 소떼처럼 한 방향에서 달려드는 그들과 맞서야했다. 가진 것을 내려놓아야 했고, 반대를 무릅써야 했고, 쯧쯧 혀 차는 소리와 손가락질을 가벼이 넘겨야 했다.

종종 그게 슬프고 외롭고 불안할 때마다 나는 그랬다. 나와 깜이 다른 영웅들을 끄집어내었다. 어쩌면 그들 앞에서 내 존재는 태양 아래 꼬마전구에 불과했다. 꼬마전구는 태양전지를 달고 위태롭게 껌뻑였다.

어쩌면 삶은 역풍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아가려하면 역풍을 맞는다. 바람이 없어도 앞에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진역풍이다. 등 뒤에서 내 속도만큼 바람이 불지 않는 이상 늘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삶은 대부분 역풍, 아주 가끔 순풍이 아닌가 싶다.


# 칠레 제1항. 발파라이소

사진2  칠레 발파라이소 항에 도착한 에스페란자 호.

역풍과 역조 탓에 속도가 평소의 7할로 떨어졌다. 예정보다 닷새를 더 항해한 끝에 우리는 멀리 안데스 산맥의 능선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배가 도착한 곳은 칠레 중부 항구도시 발파라이소(Valparaiso). 서울 옆 인천항처럼 칠레 수도 산티아고(Santiago)에 접한 이 나라 최대 항구다.

항구 앞바다에 닻을 놓고 접안 일정을 기다렸다. 우리가 도착하자 볼거리가 생긴 모양이다. 주변에서 카약을 타고 놀던 사람들과 관광객을 태운 보트가 에스페란자에 다가왔다. 손을 흔들며 반겼다. 가장 먼저 배에 오른 건 세관과 출입국, 검역관리들. 배의 입항도 공항의 그것처럼 출입국에 해당하므로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 배가 도착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현지 공무원이다. 공무원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그 나라 분위기를 점친다. 칠레 사람들은 밝고 활기차면서도 무뚝뚝한 면이 보였다.

기타 줄을 튕기며 신나게 춤추는 남미 사람들에게 무뚝뚝하다니, 누가 들으면 퍽 섭섭한 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건 그날 승선한 검사관 때문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에 항만국 검사관이 승선하다니. 그러니까 이 말은 첫째, 불타는 금요일을 맞은, 둘째, 남미 사람의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흥분되게 좋은 일은 아닌 게 확실했다. 나는 이 나라 말과 문화를 모르지만 검사관을 맞을 때 한쪽 손을 높이 늘고 하이파이브를 하면 안 되겠다는 정도는 직감했다.

항만국 통제(Port State Control)라는 것은 ‘네 위험한 배가 우리 소중한 항구에 들어와도 괜찮은지, 어디 고장 난 곳이 있어 사고를 내지 않을지, 기름은 흘리지 않는지 항구 주인이 좀 검사하자’며 팔을 걷어붙이고 이곳저곳 둘러보는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런데 배라는 것이 작게는 수십 미터에서 길에는 수백 미터, 에스페란자도 길이 72미터에 높이만 6층에 달한다. 먼지를 털자면 나흘 밤낮을 해도 (너그러운 검사관이라는 가정 하에) 이제 한 개 층을 겨우 마칠 수 있고, 그렇게 턴 먼지만 모아도 방 하나를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니 이 검사라는 것은 사실 엿장수 마음대로 식이다. 나는 어쩌면 이 검사관과 불타는 금요일을, 아니, 금요일을 꼬박 불태울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사진3  에스페란자에 접근해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발파라이소 관광객들.


사진4  카느를 즐기는 발파라이소 시민들이 에스페란자에 접근해 인사하고 있다.


# 수중구부양자(水中口浮揚者)

잠깐 떠올려보자. 여태까지 만났던 가장 수다스러운 사람. 찜질방에 모인 아줌마들도 좋고, 수학여행 가는 여고생 버스도 좋고, 예전 유명했던 코미디 프로그램의 ‘수다맨’도 좋다. 무얼 상상했든 그것의 딱 다섯 배. 아니다. 정확히 7.36배 수다스러운 사람. 그날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났다. 예순에 가까워 보이는 검사관은 정확히 그런 사람이었다. 남자는 배에 오르기 전부터 뭐라고 말을 쏟아내는데, 입술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던지, 사다리를 내려주지 않아도 입술로 기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자를 보면서 우리 조상님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수중구부양자(水中口浮揚者)라."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둥둥 뜰 놈이라는 말이다.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뜻하지 않게 그런 사람을 만났다.

말은 많은데 무뚝뚝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사무적인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잠깐이라도 친밀감을 쌓을 틈이 없다는 정도가 좋겠다. 남자는 사무실에 앉더니 미국인 선장과 뭐라고 뭐라고 떠들어댔다. 옆에 앉아만 있어도 영어실력이 쑥쑥 늘 것 같았다.

-선장, 스페인어 좀 합니까.
-네, 10년쯤 배웠습니다.

검사관은 영어가 답답한지 스페인어 수다를 뽐내기 시작했다. 외딴 섬의 감옥에 10년쯤 갇혀 있다가 드디어 사람을 만난 느낌이랄까. 무슨 대화가 정신없이 오가는데 그 말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선장의 스페인어 실력에 의심이 들었는지 통역을 요구했다. 쉬고 있던 스페인 출신 1등항해사 에밀리가 불려왔다. 에밀리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나는 스페인어를 배우지 않은 것에, 고교시절 학교 제2외국어 과정이 독일어와 일본어뿐이었음에, 스페인어를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칠레 정부가 우리에게 검사관을 보낸 건 중대한 메시지가 분명했다. 가장 환경 친화적인 환경감시선에 검사관을 보낸 것은 그만큼 정부가 에스페란자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며, 정부는 너희가 생각지도 못한 기상천외한 (수다왕 파견과 같은) 방법으로 보복할 수도 있다는 경고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니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면 상대가 고통스러울 수 있으니 칠레에서 너무 많은 일을 벌이지 말아달라는 우회적 신호일 수도 있다. 가장 가능성이 낮은 것은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이런 수다쟁이 때문에 고통 받는데 너희들까지 문제를 일으키지는 말아 달라, 그런 의미에서 잠시 이 친구를 너희가 감당해달라’는 읍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수다왕은 3시간에 걸친 검사 끝에 돌아갔고, 에스페란자에는 월요일 저녁만큼 조용한 금요일 밤이 찾아왔다.


사진5  자원을 채취하느라 훼손되고 있는 칠레의 빙하. 푸른 빙하가 깍여나가는 게 선명히 보인다 (그린피스 칠레사무소 제공).


# 칠레의 빙하를 지켜주세요

묘하게도 산티아고와 발파라이소,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과 같은 위도에 있다. 여기까지가 다른 대륙의 남단이다. 이남은 남극과 가까운 고위도 지역으로 춥고 습하다. 이 지역을 국경과 상관없이 파타고니아(Patagonia)지역이라 부른다. 남극 가까이 걸쳐놓은 사다리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칠레 중부 고산지대와 이곳 파타고니아에는 만년빙하가 있다. 아기공룡 둘리가 타고 온 ‘빙산’이 아니라 빙하기 이래 산골짜기에 박혀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다. 칠레에는 2만3천㎢(제주도 면적의 12.5배)에 달하는 빙하가 분포해 있는데, 이는 남미 대륙 전체 빙하의 80%에 달한다. 산악지대의 빙하는 냉장고 역할을 한다. 내린 비가 빙하 덕분에 얼었다가 덥고 건조한 계절에 녹아 흘러내린다. 그 덕에 칠레의 강이 마르지 않는다. 안데스 산맥 서쪽에 있어 건조한데다 여름철 강수량마저 적은 칠레에서 포도를 키울 수 있는 비결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칠레 와인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최근 무분별하게 자원을 채취하고 도로를 놓으면서 빙하가 훼손되거나 오염되고 있다. 이로 인해 칠레의 급수난도 가중된다는 게 그린피스 칠레 사무소의 주장이다. 기후변화와 자원개발로 인해 빙하는 지금도 꾸준히 녹아내리고 있다. 빙하 주변에 도로를 건설하고 석탄을 채굴하는 바람에 검게 오염되기도 했다. 이는 칠레 수질 오염으로 이어진다. 칠레의 빙하 문제는 전 세계 환경문제와 직결된다. 그린피스 칠레 사무소는 전체 빙하의 8%에 해당하는 3천420㎢가 녹거나 파괴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모든 게 기후변화의 결과이며, 이는 다시 해수면 상승, 남미 대륙의 사막화 등 연쇄적인 부작용으로 이어질 것이다.

에스페란자는 두 달 가까이 칠레에 머물 예정이다. 이 기간 그린피스 칠레 사무소를 도와 빙하 보호에 앞장선다. 현지 과학자와 활동가를 태우고 파타고니아 지역 구석구석에 있는 빙하를 탐사한다. 항구에서 들러서는 시민들을 배로 초청해 쟁점을 설명하고 지지서명을 받는다. 빙하 보호관련 법안 공청회와 가두시위를 주도하기도 한다. 기나긴 일정이 우리를 기다렸다.
 
-4편에 계속 

사진6  첫 항해 경로 지도.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파타고니아 지역이 아프리카보다 남쪽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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