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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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자!
  • 이설야
  • 승인 2016.04.0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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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쓴 인천(4) - 김해자의 시

2014년 4월 16일 침몰을 앞둔 배, 세월호는 인천항을 떠났다. 우리의 눈동자 속으로 아이들을 태운 커다란 배는 허공만 남긴 채 점점 가라앉았다. 누구나 안다. 구조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무언가 타는 냄새, 무언가 감춘 검붉은 연기는 바다의 지옥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의 비명은 살아남은 엄마들의 통곡이 되었다. 꽃이 피어도 꽃 같지 않은 4월. 만약 이 세상에 슬픔을 잴 수 있는 저울이 있다면, 그 무게는 얼마나 될까? ‘피에타’, ‘아우슈비츠’, 그리고 ‘세월호’, 그 고통의 무덤들 앞에서 감히 슬픔의 무게를 잴 수 있을까?
 
촛불을 든 시민들은 죄인이 되었고,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슬픔도 딱딱하게 굳었다. 지상에서 아이들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증언할 입과 눈도 막아버렸다. 엄마들은 통곡으로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김해자 시인의 시 ‘피에타’를 읽는 일은 그 고통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다보면,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1867~1945)의 <피에타>가 환영처럼 지나간다. 그 위로 다시 그녀의 작품 <통곡>과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 <이별> 등의 작품이 겹쳐진다. 아이들의 머리카락, 물에 불은 얼굴과 이름표, 별들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부질없는 책가방들이 떠나단다. “구조된 것은 이름, 이름들뿐”(‘피에타’)이다.

 

케테 콜비츠 <피에타>  케테 콜비츠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을 지닌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통칭한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 이후 수많은 작품이 나왔지만,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는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가 자신의 얼굴이기에 더욱 강렬하고 슬프다. 그러나 세월호 유가족들의 품에는 죽은 예수(아이)가 없다. 엄마들은 돌아오지 않는 아이 대신에 허공을 부여잡고 통곡한다. 인천항을 떠난 아이들의 ‘몸’이 아직 다 ‘집’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김해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집에 가자>(삶창, 2015)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지친 영혼들에게 바치는 한 편의 긴 시처럼 읽힌다. 1984년 겨울, 눈보라 치는 길을 뚫고 인천의 작은 공장에 문을 두드리던 손. 심지 위에 시를 쓰다가, 노동자들과 시를 쓰고 또 쓰다가 14년 후에 시인이 된 손. 그 손으로 소외된 자들의 눈물과 땀을 받아쓰는 것이 운명이 된 시인. 갈산동, 청천동 쪽방에서, 혹은 거리에서 시의 지도를 만들어 갔던 김해자 시인. 그녀의 세 번째 시집 <집에 가자>는 야만이 더욱 구체화된 세계 도처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목소리들로 빼곡하다.

<집에 가자>는 시집에는 없는 시 제목이다. 시 ‘피에타’의 마지막 구절에서 가져왔다. 이 시집은 진정한 의미의 ‘집’을 상실한 우리에게, ‘집’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집’은 ‘몸’을 담는 장소이자, 순환과 유기적인 세계를 습득해가는 장소이다. 우리는 ‘몸’을 살리기 위해 ‘밥’을 먹는다. 죽어서도 기일에는 돌아와 밥을 먹는다고 믿는다. 이 ‘몸’을 담는 최초의 장소는 ‘옷’이다. 그런 의미에서 ‘옷’은 작은 ‘집’이기도 하다. ‘집’은 생명을 기르고, 죽음을 예비한다. 현대 문명의 폭력과 야만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집’을 모두 잃어버렸다. 오래전 자연과 맺은 대칭적인 관계는 허물어졌고, 비대칭적 관계가 우리를 점점 더 깊은 재앙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간다. 결국 이 야만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예언과 주술의 힘을 가진 언어, 시적인 언어이다. 우리는 “물에 문신된 텅 빈 문장”(‘비대칭’)을 함께 써나가야 한다.
 
아이들을 가슴에 품지 못하는 엄마들의 통곡 소리가 멈추지 않는 4월. 그림자를 잃은 아이들아, 이제 “집에 가자!”, ‘물에 찍힌 마지막 말’과 함께 모든 엄마들이 기다리는 “집에 가자!”
 

피에타
                      김해자


인천항에서 낯선 이 포구까지
오는 데 수십 일이 걸린 데다
그 사이 몸은 다 식고
손톱도 다 닳아졌으니
삼도천이나 건넜을까 몰라
구조된 것은 이름, 이름들뿐
네 누운 이곳에
네 목소리는 없구나
집에 가자 이제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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