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미술관 - 그 하나로 문화의 향기를 되찾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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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미술관 - 그 하나로 문화의 향기를 되찾은 도시
  • 허회숙 객원기자
  • 승인 2023.01.1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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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 김홍도 콘텐츠전시회를 가다

2022 단원 콘텐츠 교육전시〈소년 김홍도, 노적봉에서 세상을 담다〉가 작년 5월4일부터 안산 김홍도미술관(3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조선시대 안산에 있었던 단원(檀園)이라는 숲과 서호(西湖)를 모티브로 김홍도가 유년시절을 보낸 안산의 옛 풍경을 상상해 보는 전시다.

김홍도미술관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에 위치하고 있다. 김홍도미술관 1관과 2관은 전시공간이고, 3관은 ‘단원콘텐츠관’이며 4관은 ‘상상미술공장’이다.

2022년 11월 29일부터 2023년 1월 29일까지 〈사이의 언어〉라는 시각예술 창작지원 성과발표전이 1,2관에서 열리고 있다.

경기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우수작가들의 최근작을 선보이는 경기도유망작가전 ‘생생화화生生化化’ 전시인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9명의 작가는 개별 공간에 작가의 영역을 구축하고 자신만의 다채로운 예술적 언어로 말을 건넨다.

작가 9인은 평면 및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신작들을 전시하여 작가 저마다의 예술 언어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1,2관을 돌면서 경기도 시각예술의 흐름과 경향을 살펴볼 수 있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 만족스러웠다.

박예나 - 물질의 세계

                                                                                  

조현택 - 마을 벽화

그러나 필자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은 3관 ‘단원콘텐츠관’ 2층이었다.

단원(檀園)김홍도(1745~1806 이후)는 한국인 누구나가 사랑하는 화가다. 교과서에 실린 김홍도의 〈씨름도〉나 〈서당풍경〉을 한국인 대부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김홍도 - 씨름도

                                                                                     

김홍도 - 서당풍경

김홍도가 안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없으나 7~8세부터 약 20세가 될 때까지 안산에서 살았다.

스승인 표암(豹菴) 강세황(1713~1791)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문인서화가로 안산에 거주하는 동안 김홍도가 그의 집에 기거하며 그림과 글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김홍도와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의 평을 써주기도 하면서 ‘나이와 지위를 뛰어넘은 친구’로 여기기도 하였다.

시문집인 『표암유고』에는 김홍도의 소전이라 할 수 있는 『단원기』와 『단원기 우일본』이 있어 김홍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김홍도는 초년 즉 20~30대에 서호(西湖)라는 아호를 사용하였는데 서호는 안산 성포리(현재 안산사 일동, 성포동)에 있었던 앞바다를 일컫는 옛 별칭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물장수’〈행려풍속도병〉, ‘고기잡이’〈단원풍속도첩〉, ‘젓갈 파는 아낙네’〈필 매해파행도〉등 안산 서해 바다로 연상되는 바닷가의 활기찬 풍경을 여러 점 그려 남겼다.

이곳에는 선비들의 안산모임을 그린 강세황의 〈아회도〉와 김홍도의 바닷가 풍경화가 전시되어 있어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안산의 옛 풍경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강세황 - 아회도

                                                                              

김홍도는 강세황의 추천으로 어린 나이에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렸고 1781년에는 정조의 어진을 그렸다.

40세를 지날 무렵부터 그는 단원(檀園)이란 호를 많이 사용하였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일컬어 ‘근대 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홍도는 50세 이전에는 주로 화보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 산수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 원체화적 경향을 보였으나 50세 이후로는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를 즐겨 그렸다.

그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 구도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성으로 표현한 독창적인 풍속화를 많이 그려 조선회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홍도 - 대장간

안산과 김홍도의 인연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안산은 공단과 외국인 노동자로 연상되어 문화의 향기와는 거리가 먼 곳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김홍도미술관을 계기로 안산이 조선 후기의 쟁쟁한 선비들과 김홍도 같은 불세출의 화가가 활약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막연히 부정적이었던 이미지가 어느 순간 향기 그윽한 문화도시의 상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나의 미술관이 한 도시의 이미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들어설 인천시립미술관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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