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 '다크 투어'의 정점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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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 '다크 투어'의 정점에 서서
  • 이상구 시민기자
  • 승인 2023.01.1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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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에서 변신의 계기와 만나다
가래칠기 해변.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이 절경일 이룬다.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등대공원, 평화공원, 조기역사관이 몰려 있다.
연평도 가래칠기 해변.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이 절경일 이룬다.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등대공원, 평화공원, 조기역사관이 몰려 있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란

국내의 한 종편방송사가 제작 방영하는 세계의 다크 투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란 비극적이고 불행한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독특한 관광의 한 유형이다. 수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독일의 아우슈비츠나, 천인공노할 테러의 현장인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등이 대표적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지금도 여전히 극단의 이념적, 군사적 대립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다크 투어리즘 목적지(destination)는 많다. 전쟁으로 뼈대만 남은 노동당사를 중심으로 땅굴과 DMZ 등을 아우르는 철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유명했다.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거제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등도 많이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의 다크 투어 목적지는 대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다. 하지만 그런 비극과 불행이 현재 진행형인 곳도 있다. 북한과 마주보고 있는 인천의 서해5도다. 옹진의 백령과 대소청도, 연평도 그리고 강화의 우도가 이에 속한다. 그 중에도 백령군도와 연평도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외양과 달리 언제 어떤 상황이 터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연평도 해안의 용치. 작함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쇠말뚝이다. 분단과 안보의 상징이다.
연평도 해안의 용치. 작함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쇠말뚝이다. 분단과 안보의 상징이다.

 

연평도의 비극을 따라서

연평도와 북한 땅이 가장 가까이 붙어있는 곳은 불과 10km정도 남짓이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이마 닿을 곳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황해도 땅이었다가 전후 대한민국 부속으로 편입 됐다. 인천서 120km 떨어져 있으며 뱃길로 2시간 정도 가면 닿는다. 배로 5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지만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는 행정구역상 모두 연평면에 속한다.

당섬 선착장에 내려 마을로 들어서면 안보교육장부터 들러야 한다. 지난 20111123일 발생한 북한의 포격도발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해 둔 곳이다. 북한군은 이날 오후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무차별 적으로 수백 발의 포를 쏘아댔다. 민간인 마을에도 상당수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2명이 목숨을 잃었고 많은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안보교육장은 그 한가운데 있다. 포격으로 무너진 민가 몇 채를 당시 상태 그대로 보존한 현장을 지나 입장한다. 무너져 내린 지붕과 붉게 그슬려 나뒹구는 솥단지, 몸체는 다 타고 뼈대만 남은 자전거 따위가 처참하게 널려 있는 풍경에 사람들은 경악한다. 저 지붕 아래 평화롭던 가족들은 어찌 됐을까, 저 작은 세발자전거를 타던 아이는 무사할까, 가슴이 저린다.

 

연평면 176번지 일원. 2011년 북한의 무차별 포격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두었다. 안보교육장의 생생한 교보재다.
연평면 176번지 일원. 2011년 북한의 무차별 포격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두었다. 안보교육장의 생생한 교보재다.

 

교육관을 나와 동쪽 언덕으로 오르면 망향단이 보인다. 실향민들이 명절마다 고향을 향해 차례를 지내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바다를 뚫고 용솟음치는 형상의 망향비 뒤로는 북한 해주 땅이 훤히 보인다. 이 최첨단 문명의 시대에 손에 잡힐 듯한 거리를 오도 가도 못하는 아이러니를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당사자들의 속이야 두 말 할 필요도 없을 터.

다시 산등성이를 타고 섬의 서쪽으로 향한다. 오른편, 그러니까 섬의 북쪽 해변은 온통 군사지역이다. 아예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얼마쯤 가다보면 그 중간에 북쪽을 바라보고 선 검은색 묘비를 만난다. 연평포격 당시 희생된 민간인 2인에 대한 추모비다. 당시 군 부대 막사 신축작업을 하던 분들이었다. 높으신 분들이 놓아둔 묘비 앞 꽃다발은 바짝 시들어 있었다.

그 바로 위엔 서정우 하사의 전몰지가 있다. 그는 해병대 연평부대 중화기부대 병사였다. 사건 당시 그는 휴가 중이었지만 포격사건 소식을 듣고 급거 귀대하던 중 유탄을 맞고 산화하였다. 후임들은 그 주변의 바위에 서 하사의 모표를 새겨 넣었다. 장병들은 그 앞을 지나며 예를 갖추고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새로이 자각한다.

 

서정우 하사의 전물지. 연평포격으로 산화한 서정우 하사의 모표를 바위에 새겨놓앗다. 흐배들은 그앞을 지나며 조국 수호의 각오를 다진다.
서정우 하사의 전물지. 연평포격으로 산화한 서정우 하사의 모표를 바위에 새겨놓았다. 후배들은 그앞을 지나며 조국 수호의 각오를 다진다.

 

서쪽으로 5~6m쯤 가면 높은 언덕 위에 평화전망대가 서 있다. 북녘 땅이 고루고루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1층은 전시관이고 2층은 전망대겸 교육장이다. 3층은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들리는 말로는 관측시설이라고 한다. 굳이 거기까지 오르지 않고 2층 전망대에만 올라 망원경으로 보면 보일 것은 다 보인다. 그냥 봐도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동쪽 해안으로 내려가면 이 세상에서 가장 삼엄한 해수욕장이 나타난다. 얼핏 보면 그곳이 해수욕장인지도 모른다. 두께 1m가 넘는 육중한 콘크리트 옹벽이 해안선을 가로 막고 그 위엔 철조망까지 둘러쳐 놨다. 출입문은 단 하나다. 굵은 자갈밭 너머의 모래사장은 곱기가 밀가루 못지않고 물은 더 없이 맑다. 분단만 아니었다면... 참 안타까웠다.

 

조기와 연평

구리동을 뒤로하고 다시 가파른 해안가 언덕 위로 오르면 제1,2차 연평해전의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5인의 용사를 의미하는 용치 조형물 주위를 둘러싼 벽에는 장병들의 명패와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연평포격사건 당시 희생된 두 명의 장병을 기리는 위령탑이 말없이 서 있다. 병사들의 얼굴이 아직 앳돼 보여 더 아팠다.

평화공원을 지나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하얀 색 외벽의 등대가 보인다. 1960년 처음 불을 밝혔으나 군사적 긴장감이 고조되던 1974년 불을 내렸다. 등대지만 등대가 아닌 채로 거의 반세기를 지내야 했다. 지난 2019년에야 가까스로 제 일을 되찾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등대는 등대 자체가 아니라 그가 지나온 역사로 분단의 현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등대 뒤로 넘어가면 아찔한 절벽이 길을 가로 막는다. 후세들은 그 끄트머리에 조기역사관을 세웠다. 그 주변의 전망이야 절경이긴 하지만 그 높은 곳에 전시관이 있어야 하는 지는 의아했다. 그런데 그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조난어업자 위령비를 보면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1934년에 있었던 초유의 폭풍우에 희생된 조기잡이 배의 선원들을 기리는 묘비다.

 

가시나무 낚시. 임경업 장군이 연평도 주민들에게 전수해 준 낚시 비방이다.
가시나무 낚시. 임경업 장군이 연평도 주민들에게 전수해 준 낚시 비방이다.

 

연평도는 한반도 최고, 최대의 조기 산지였다. 임경업 장군이 가시나무 낚시비법 전수 이후 3백여 년 동안 그 지위가 이어져 왔다. 하지만 일제의 안강망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그 즈음에 불어닥친 가공할 폭풍우는 그런 인간의 탐욕에 대한 명백한 경고였다. 물론 이미 눈이 먼 인간들은 그걸 귀담아 듣질 않았고 그 이후 연평 바다에선 저주처럼 조기의 씨가 말라버렸다.

조기가 가져다 준 과거의 영화를 추억하는 전시관과 조기 잡다 목숨을 잃은 어부들의 비는 그렇게 부조리하게 같은 공간에 서 있다. 사람들은 그곳을 영화 제목을 따 빠삐용 절벽이라 부른다. 왜일까, 연평면이 만든 관광안내 책자의 해석이 흥미롭다. 그 끝에 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영화 빠삐옹의 주제곡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가 떠오른다는.

지하터널이나 참수리정이 전시된 함상공원 등도 그렇지만 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방공호와 산꼭대기의 거대한 안테나 따위는 함부로 잊고 지내던 전쟁의 공포와 경각심을 일깨운다. 마을 주민들에겐 그게 참 고역이겠으나 돌아서면 까먹는 철없는 뭍사람들은 그런 것으로나마 새삼 배우고 깨우친다. 그게 다크 투어리즘의 핵심 기능이자 덕목이다.

 

시인 기형도의 고향

안보교육장을 나와 동쪽으로 가다보면 지도엔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해변이 나온다, 여긴 해안선 따라 철조망을 둘러 친 대신 뭍 가까이에 용치가 즐비하다. 적함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철 말뚝 말이다. 그 살풍경의 해변에 가면 빠삐용 절벽과 조기역사관처럼 그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문제적 인물, 기형도를 만날 수 있다.

 

시인 기형도의 추모비. 연평에서 태어난 시인 기형도를 기리는 상징물이다. 그런데 너무 작다.
시인 기형도의 추모비. 연평에서 태어난 시인 기형도를 기리는 상징물이다. 그런데 너무 작다.

그의 짧은 생애만큼 강렬한 언어를 남기고 떠난 그 젊은 시인 말이다. 그는 황해도 실향민의 후손으로 1960년 이 곳 연평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찍이 부모를 따라 뭍으로 나가 살아 경기도 광명 사람인 줄 알았다. 한 때 흠모하던 시인이 실은 동향의 벗이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다. 그를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목판 기념비를 세우고 시 다섯 편을 전시해 두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공간은 그의 후광에 비하면 너무 작고 초라했다. 정말 보잘 것 없었다. 주의해 보지 않으면 그게 거기 있는 지조차 모를 정도다. 거길 조금 더 키우면 어떨까, 아예 그가 태어난 춘삼월을 전후해 잔치를 열 구상도 해보자. “기형도 시 축제” 같은 거 말이다. 낭송회도 하고 백일장, 아니 시 베틀도 붙는 거다. 음을 붙어 노래를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다. 이곳의 봄 벚꽃이 또 그렇게 유명하지 않다던가.
꽃피는 춘삼월에 그렇게 거나하게 판을 벌이면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는 전국의 시인 지망생들이 몰려들 터다. 그렇게 잔뜩 심각한 젊음들이 모여 고뇌에 찬 시를 읊는 진귀한 광경을 보기 위해 그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 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한적한 연평이 더 북적이고 유명해지기를. 빛바랜 흑백 사진속의 기형도가 더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기형도는 연평이 그저 전쟁과 분단의 아픔 간직한 비극의 땅이 아니라 시를 잉태한 문학과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한 번 해 보자. 언제까지 분단, 안보에 기대 살 것은 아니잖은가. 관이 도와주면 신나서 할, 이미 준비된 인력은 차고 넘친다. 일단 아직 이름 없는 기형도 추모공간의 앞바다를 ‘기형도 해변’으로 부르는 것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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