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에서 보는 책 이야기 - 〈하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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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보는 책 이야기 - 〈하얀배〉
  • 곽현숙
  • 승인 2023.01.02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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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책방거리에서]
(2) 고 이일훈 건축가 서재를 정리하며

 

얼마 전, 2021년에 작고하신 이일훈 건축가 댁에서 서재를 정리하셨습니다. 박영대 선생이 도움을 청해서 150박스를 정리해 가는데, 책들 중에 곱게 색이 바랜, 까만 글씨의 ‘하얀배’라는 책 제목이 자꾸 눈에 들어와 한쪽으로 얹어 놓습니다.

몇 날을 걸쳐 책정리가 끝난 날, 얹어 놓았던 책을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주황색과 하늘색, 그리고 바다색으로 디자인 된 표지에는 책 제목 ‘하얀배’ 밑에 ‘친기즈 아이뜨마또프’ 지음 ‘김근식’ 옮김.

그리고 그 아래 책 내용을 발췌한 글이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인간에게 어린이의 양심은 눈과 같으니,

눈이 없는 곡식은 자라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나라 사람인데 이런 말을 했을까? 책 날개를 들치니 ‘1928년 중앙아시아 끼르지아 공화국에서 태어나 1958년 중편 ‘자말리아’ 발표 후... 장편 ‘백년보다 더 긴 하루’ 등등... 현재 소련 최고의 작가로 활동...’

몇 년도 책이지? 두 장 뒤에 초판 찍은 날이 나옵니다. 1991년 3월 15일, 펴낸 날 25일. 다시 겉표지 하단 끝에는 ‘문덕사’ 라는 출판사 이름이 책을 고이고 있습니다.

 

 

산림보호 경계지역 ‘싼따슈’ 라는 산골짜기에 세 가정이 사는 마을, 여덟 살 소년 주인공, 자신의 소망인 ‘하얀배’와 만남을 위해 물고기를 꿈꾸는 소년과, 무모한 몸수고를 견디어 내는 소년의 할아버지 마문의 모습에서 작가는 내 안에 어린 나와, 늙은 내가 함께 사는 것을 보게 합니다.

작가가 더 궁금해 옮긴이의 말을 살펴보니, ‘솔제니친을 세계적 문인으로 발굴해낸 월간지 〈신세계〉의 편집장 시인 알랙산드르 뜨바르도프스키에 의해 채택되어 1970년 1월호에 실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금서로 폐지 됨. 그해에 다시 개작해서 책으로 나옴.'

본서는 잡지 원문 번역본’이라 합니다. 옮긴이 말 속에 솔제니친 이름이 매우 반갑습니다. 오래전,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자택 낡은 의자에 앉아 서방세계의 학자들에게 외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당신들의 거짓 학술은 인류사를 아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하나님은 사람 안에 양심이라는 판막을 심어 사람의 질서를 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던 그 모습.

 

다시 ‘하얀배’ 56쪽 11번째 줄부터 끝줄을 발췌해 봅니다.

‘할아버지가 일을 다 끝낸 저녁 때가 되면 옛날 이야기를 해 주시지요. 집 밖에는 아주 깜깜하고 꽁꽁 얼어붙는 밤이 되지요. 바람은 사나운 맹수처럼 불어치고 그런 밤이 오면 거대했던 산들은 기가 죽어 우리 집으로, 불빛이 비치는 창가로 덩어리를 지어 웅크리고 다가 오지요. 그런 산들의 접근에 나는 오싹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지요. 내가 거인이 되어 거인용 털외투를 뒤집어쓰고 방 밖으로 나오는 상상을 해 보며 나는 산들에게 쩌렁쩌렁하게 외쳐요. 나는 ‘겁내지 마라 산들아! 내가 여기 있다. 바람이 때리고, 암흑이 깔리고, 눈보라가 몰아쳐 보라고 해라!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겠다. 너희들도 두려워말고 제자리에서 꿋꿋하게 서 있거라!

그런 다음 나는 눈 더미를 헤치고 강물을 뛰어 넘어 숲으로 가요, 숲속에 나무들은 밤이 되면 새파랗게 공포에 질려있어요. 그 나무들에게는 쓸쓸하게도 누구하나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이 없지요. 혹독한 추위에 벌거벗은 나무들은 얼어붙어 어느 곳에 의지할 바를 몰라요. 그러기에 내가 숲속에 들어가 각 나무마다 다가가 가지를 어루만져 주며 너무 무서워 말라고 하지요.’

다가온 환경에 자연과 하나 되어가는 소년의 통쾌한 상상력과 측은지심이 마음 깊숙이 감겨듭니다.

바람이 너무 거세어 적군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열악한 환경과의 싸움도 벅찬데, ‘하얀배’의 이 작은 숲속 마을에 양심을 잃은 숲 관리 책임자 ‘아로즈꿀’이 등장합니다. 그의 간교한 횡포와 폭력은 뿔 달린 사슴 신화로 소년의 상상력을 고여 주던 할아버지 마문을 질식시킵니다. 그 맘몬은 또 소년의 꿈을 물속에 잠식시켜 죽어가게 합니다.

이 맘몬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지금, 러시아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밟으며 자국 소년들까지도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황과 대비됩니다. 어머니들의 항의에 푸틴은 교통사고로도 수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비유합니다.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려 양심이 화인 맞아 버린 맘몬들이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안전 불감증 사고로 전쟁보다 더 큰 참사가 빚어집니다. 사방에 검은 연기와 불이 만연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볼 수가 없어 뜯어먹을 고기로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수천 권의 책을 정리하면서 한 권을 몇 번씩 만져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책을 소장했던 이일훈 건축가의 독서력을 보게 됩니다. 수 백 권의 소월 시집과 지도책들과 건축, 그리고 양심의 길을 탐색해간 거대한 인문의 숨길을 봅니다. 덩달아 책방지기는 곤한 몸 노동에도 불구하고 가슴 저변 고요로 스며들어 긴 숨길에 젖어 듭니다.

‘하얀배’에서 작가는 자기 독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나는 이제 말 할 수 있게 되었단다.

너의 어린 양심이 타협하기를 거부한 것을 네 자신도 끝끝내 물리치고 말았노라고......

인간에게 어린이의 양심은 눈(萌芽)과 같으니, 눈이 없는 곡식은 자라지 않을 것이다......

너와 마지막 작별을 고하며, 네가 하였던 말을 되풀이해 보겠다. 소년아!

(안녕, 하얀배. 이게나야!)-

 

‘과거에 대한 기억은(Memory)은 바로 양심이다. 그런 기억을 잃어버린 인간은 양심을 잃어버린 자와 같다.’- 옮긴이는 작가의 말을 전합니다.

이렇듯 책 속에 글들은 수천 년의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꿈꾸며 인간 양심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한 면이 어렵다면, 한 줄이라도 읽어가다 보면, 우리 안에 양심에 자양분이 되고, 소년의 상상처럼 글의 힘은 우리 가슴에 거대한 털외투가 되어 가지 않을까, 2023년 새날에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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