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고, 미소띠고... 충동 김장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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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고, 미소띠고... 충동 김장한 날
  • 조영옥
  • 승인 2022.12.0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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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조영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려면 시장을 지나게 된다. 굵은 고춧가루가 필요해서 기름집에 들러 고추 두 근을 빻고 들기름 한 병을 사 들고 지나는데 농협 마당에 김장거리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물건을 이리저리 들었다 놓기도 하고 봉지에 담아 집에 동 호수를 적어놓고 가는 사람들로 어수선하다. 나도 그 틈에 끼어 기웃거린다. 황토에서 자란 굵직한 다발 무, 알이 굵은 총각무, 보라색이 선연한 둥글둥글한 강화 순무, 쪽파, 깐 마늘 등 김장거리가 다 모여있다.

김장은 다음 주에나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쌓여 있는 김치거리들을 보니 애벌 김장을 미리 하면 한결 수월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총각무를 다섯 단, 청각, 마늘 한 봉지, 다발 무, 강화 순무한단, 쪽파, 갓도 샀다. 물건을 주문해서 배달을 시키고 걸어가는데 괜히 샀다는 생각이 든다. 허리가 아프다고 입에 달고 살면서 쪽파는 언제 까려고 샀으며 총각무는 지난번에 해 놓은 것도 있는데 무엇 하러 다섯 단이나 더 샀는지 난감한 생각이 든다. 여러 식구들 먹거리 준비하던 것이 버릇이 되어 덥석 사가지고 와서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기도 했으면서 말이다. 줄여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세 시에 주문을 하고 왔는데 아홉 시가 되어도 배달이 오지 않더니 30분이 지나서야 ‘띵똥’ 소리가 났다. 올해는 그냥 사서 먹고 김장도 하지 말라는 남편이 잠이 든 사이에 와서 다행이다. 끙끙거리며 현관 안으로 끌어들이니 물건이 가득 차 보인다. 천천히 해도 될 것을 누가 쫓아 오는 듯 물건을 산 것부터 후회가 되고 일 생각에 걱정이 앞선다.

이튿날 새벽부터 총각무를 다듬어 절이고 양념거리를 씻어 소쿠리게 건지고 해야 할 일이 많다. 국물을 만들 채수를 끓여 식히고 보리밥, 배, 새우젓, 마늘, 생새우 등을 한 번에 믹서기에 넣고 들들 간다. 벌여 놓은 일거리를 빨리 끝내려고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해가면서 분주히 움직인다.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총각무 김치, 남편이 좋아하는 순무 김치,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라며 군고구마와 함께 한 사발 들이키는 모습이 연상되어 이것저것 사 왔지만 일하는 내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일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꿈지럭거린다.

총각김치 한 통, 순무 김치 작은 통으로 하나 동치미까지 그릇에 담아놓고 나니까 그제서야 힘은 들었지만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말이 쉽지, 연례행사처럼 하는 김장이라 사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아직 까지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지난 해 까지만 해도 남편이 김장 뒷 설것이를 해주어서 한결 수월했는데 이 번에는 거들어 주지를 않고 입으로만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며 핀잔이다. 그도 이제는 이런 것을 만지기가 귀찮아졌나 보다. 일을 끝내고 허리를 의자 등에 잔뜩 기대고 비스듬히 앉았다. 허리가 내 허리가 아니고 팔이 욱신거린다. 세월 따라 살아야 하는데 나이는 깜빡 잊고 언제나 의욕이 앞서는 나에게 몸이 경고를 하고 있다.

“할머니, 고집을 피우더니 힘이 들어요?” 물끄러미 쳐다보며 남편이 내게 약을 올린다. “먹을 사람도 없는데 왜 김치에 욕심을 내요? 이제는 그냥 사 먹읍시다” 나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린다. 언제 나갔다 왔는지 그는 가슴에서 귀한 것이라도 꺼내는 양 제스처를 쓰면서 “이것 먹고 힘내세요. 그리고 한숨 푹 자요” 초콜릿 한 개를 건넨다. “투유, 오리온 초콜릿 한 개”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이다. 순간 눈은 반짝 했지만 안 먹을 것처럼 옆으로 밀어 놓는다.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시선을 내리 깔았지만 ‘사랑을 전할땐, 투유’ 포장지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그도 이 문구를 읽었을까? 맛있게 익은 김치를 먹는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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