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400년 풍파를 함께 한 탱자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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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400년 풍파를 함께 한 탱자나무
  • 김시언
  • 승인 2022.11.2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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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이야기](9) 천연기념물 제79호 사기리 탱자나무
가을 들판에 벼가 익을 무렵 탱자나무.
가을 들판에 벼가 익을 무렵 탱자나무.

해마다 늦가을이 되면 탱자 열매를 두어 됫박 사들인다. 탱자 향과 쌉싸름한 맛을 기억하면서 겨울을 따뜻하게 나고 싶어서다. 올해도 2·7일에 열리는 강화읍 장날에 사다가 현관에 두었다. 늦가을 강화 오일장에 나가면 할머니들이 탱자를 펼쳐놓았다. 할머니들은 마당이나 울타리에서 자라는 탱자나무에서 열매를 따다가 판다.

탱자를 집에 들이면 집 안 전체가 향기롭다. 필자는 지금은 집 안팎의 경계인 현관에 두고 향을 실컷 맡는 중이다. 또 탱자 향을 좋아하는 손님에게 한두 개 집어준다. “차 안에 두면 한동안 탱자 향이 납니다.” 어떤 손님은 차에 두고 타고내릴 때마다 탱자 향을 맡으면서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고 했다. ‘고향 생각이 난다’는 사람들은 대개 남쪽이 고향이다. 탱자 한 알을 손에 쥐고 어릴 때 살던 마을을 기억하고, 발길을 멈추고 어릴 때 살던 집 울타리에 있던 탱자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탱자 한 알에서 옛이야기가 줄줄이 흘러나온다.

지난해 겨울에는 탱자유자청을 잔뜩 담갔다. 탱자에는 씨가 많고 끈끈한 진액이 많아 자르고 담그는 데 힘이 들지만, 한번 담근 청은 겨우내 목감기를 예방했다. 담근 청을 주전자에 넣고 팔팔 끓여 먹으면 추운 겨울을 보내기 든든하다. 게다가 탱자에서 나는 쌉싸름한 맛은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 마시고 싶어진다. 탱자유자청이 줄어들고 다 먹을 즈음에는 들과 산에 봄이 성큼 다가와 있다. 탱자유자청을 담그면서 겨울을 맞이하고 담근 청이 줄어들면서 봄을 맞이한다.

필자는 사실 어렸을 때 탱자나무를 많이 보지 못했다. 탱자는 서울과 인천 쪽에서는 흔한 나무가 아니었다. 부산이 고향인 친구는 탱자나무가 마을에 흔했고, 일상생활에서 이래저래 탱자 가시를 많이 썼다고 한다. 고둥을 까먹을 때도 탱자나무 가시를 똑 잘라 썼고, 상처 난 자리에 고름이 생기면 탱자나무 가시로 터뜨렸다고 했다. 가시를 보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도 남았을 것 같다.

탱자나무 가시는 무척 단단하고 날카롭다. 그래서 위리안치(圍籬安置)라고 해서 중죄인을 가두는 ‘가택연금형’으로 이용했다. 이렇게 탱자나무는 향과 맛, 가시의 유용성으로 다가온 나무였다. 적어도 화도면 사기리 탱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기리 탱자나무4_사기리 탱자나무 표지판.
사기리 탱자나무 표지판.

40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킨 나무

강화도는 주말이 되면 도시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도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강화만큼 좋은 데도 드물다. 필자도 강화에 들어와 살기 전에는 시간이 날 때면 강화에 들어왔다. 평일에는 차가 막히지 않으니 반나절이 짬 나도 무조건 강화로 들어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강화를 방문하는 시간이 빠듯하다 싶으면 주로 길상면과 화도면 쪽으로 다녔다. 인천에서 가까운 초지대교가 생기고는 더 그랬다. 어쨌든 강화의 바다와 산을 보고 나면, 짠내 나는 바닷바람과 맑은 산바람을 쏘이고 나면 도시에서 살아가기가 그나마 수월했다.

그렇게 다닌 길에 사기리 탱자나무가 있었다. 봄에는 하얀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꽃 진 자리에 초록 열매가 달렸고, 가을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배경으로 노란 열매를 맺고 있었다. 겨울에는 겨울나무의 의연함과 꿋꿋함을 보여주었다. 이건창 생가에 주차하고 생가도 둘러보고 길 건너 탱자나무도 만났다.

400살 된 사기리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79호(1962년 12월 3일 지정)다. 높이 3.8미터, 뿌리 근처의 지름은 53센티미터다. 나무는 썩어들어간 자리에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두드러진다. 나무 서쪽이 허허벌판이라 강한 바람을 막아주지 못한 탓에 서쪽 나무가 썩어 수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강화도는 역사적으로 수난을 많이 겪었다. 고려 고종 때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수도로 삼았고, 조선 인조 때에는 왕족이 난을 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강화는 성을 쌓고, 성 밖에는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심어서 적이 쉽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나라에서는 탱자나무를 심을 종자를 보내주고 그 생육상태를 보고받으면서 이 나무의 이용 지역을 조사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사기리 탱자나무와 갑곶리 탱자나무도 그때의 것이 살아남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뿌리가 썩은 부분은 외과수술이 돼 있다.
뿌리가 썩은 부분은 외과수술이 돼 있다.

 

살기 힘든 곳에서 나라를 지키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영조 25년(1749년) 8월 20일자에 ‘강화유수 원경하의 상서’ 형식으로 적은 기록이 있다. ‘강화 지역민들로 하여금 나무를 열심히 심으면 6~7년 안에 200리나 성처럼 쌓을 수 있을 것이다’고 적혀 있다.

강화에는 보(堡), 진(鎭), 돈대(墩臺)가 많아 그곳에 탱자나무를 심으면 흙으로 지은 성의 허술한 점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탱자나무는 강화에서 잘 자라지 못했다.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탱자나무가 강화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조선 왕실은 경상도 지역에서 탱자나무를 가져와 심기로 결정했다. 탱자나무는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나라를 지켜야 했다.

이렇게 강화도로 와서 살게 된 탱자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두 그루만 남았다. 갑곶리 탱자나무와 사기리 탱자나무. 두 나무는 나라를 지킨 나무라는 점과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한계지라는 이유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다. 사기리 탱자나무는 따뜻한 남쪽에서 잘 자라는 나무지만 생육환경이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와서 산다. 화도면 사기리 쪽을 지나거든 탱자나무에 눈길 한번 주면 어떨까.

탱자나무 열매는 향이 오래간다.
탱자나무 열매는 향이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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