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인천 미술교류전에서 이민사박물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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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인천 미술교류전에서 이민사박물관까지
  • 양진채
  • 승인 2022.11.24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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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 40년을 듣는다]
(2) 황흥구 선생 - 행정가에게 듣는 문화기관 설립(하) / 양진채 소설가 대담·집필
인천문화재단이 오는 2024년까지 인천문화예술 40년사(1981~2021)를 편찬한다. 이에 인천in은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인천문화 40년을 이야기하고 증언해줄 인물 12인을 선정,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그 내용을 2023년 상반기까지 차례로 연재한다. 두번째 순서는 황흥구 선생으로 양진채 소설가가 만났다. 하편을 싣는다.

 

 

양진채 : 이민사박물관 건립에도 관여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황흥구 : 이민사박물관 건립에는 당시 하와이 미술협회 고서숙 회장의 공로가 컸어요. 고서숙 회장은 인천 분으로 하와이에 살고 있었는데 제가 계장으로 있던 1998년에 시장님 앞으로 인천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었죠. 하와이 미술협회 회원 중에 인천이 고향인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향에서 전시를 열고 싶으니 인천시에 협조와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였죠. 그리고는 그 이듬해던가 갑자기 인천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는데 사실 전시실 대관은 이미 6개월 전에 마감된 상태였어요. 그때는 종합문화회관 관장할 때라 그래도 이리저리 알아 봐서 대관도 해드리고 전시회 개최에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었지요. 그때부터 매년 하와이 미술협회와 인천 미술협회 간에 교류가 시작되었어요.

그러나 20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한인 이민10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데 그때에 맞춰 인천미술협회를 초청하면서 안상수 시장도 같이 초청한 거예요. 그때는 제가 문화예술과장으로 있을 때인데 안 시장이 당선된 지 6개월밖에 안 된 때이고, 호놀룰루와 자매결연이라도 맺었다면 관례적으로라도 간다지만 별다른 교류가 없었던 때이니 시장의 참석이 어려웠죠. 상급자인 국장이나 관련 부서인 국제협력관실에서도 단체가 한두 군데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초청장이 온 것도 아닌데 하와이 미술협회 회장이 오란다고 그 행사에 시장까지 가야 하느냐며 마땅치 않게 생각했어요. 중간에서 난감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직접 시장님께 보고를 드리면서 설득했죠.

“시장님, 최초로 이민을 떠난 곳이 이곳 인천 제물포항이고, 당시 이민선에 탄 121명 중 인천 사람이 87명이나 됐습니다. 그 이민을 시작으로 지금 700만 해외동포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와이에서 인천미술협회의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하와이 이민 100주년 기념식’과 병행해 개최하는 행사로 나름 의미가 큰 행사입니다.”

결국 미국 어느 자매도시 방문계획과 함께 잠시 하와이 기념식에 들렀다 가는 걸로 얘기가 됐어요. 기념식에만 잠깐 들를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호놀룰루의 큰 아트센터에서 식이 열리는데 대단히 성대한 행사였어요. 우리나라에서 이종찬씨 등 국회의원, 영사관, 외교부 차관급까지 다 와 있더라고요. 고서숙 회장이 큰 행사라고 얘긴 했지만 저도 그런 분들이 오는 건 몰랐거든요. 그런데 여러 거물급 인사들이 있었지만 주최자인 호놀룰루시장의 기념사 다음에 바로 인천시장이 축사를 한 거예요. 이건 인천과 호놀룰루의 관계라고 본 거죠.

뒤이어 우리나라 외교부 등 국내 초청 인사 소개도 하고 하와이에서 성공한 문대양 주 대법원장을 비롯한 한인 2·3세들의 성공담과 이민 초기의 생활상을 영상으로 담아내더라고요.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감동의 물결이 극장 안을 꽉 메우기도 했어요. 식이 끝나고 안시장께서 오길 정말 잘했다고 거듭 말씀하더라고요.

기념식이 끝나고 한인 동포들과 간담회를 열었는데 하와이에서는 이렇게 잊지 않고 기념식을 하는데 정작 이민 최초의 출발지인 인천에서는 아무런 행사도 없어 서운하다며 인천에서도 최소한 기념식을 갖던지 이민을 기념할 기념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건의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와이에 다녀온 후 시장님께 인천에 기념관을 건립하여 역사교육 목적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고 건의하면서 월미도에 이민사박물관을 짓게 된 거죠. 그 뒤로 하와이 호놀룰루시와 자매결연은 물론 나중에 시 의회와도 결연을 맺었죠. 그리고 호놀룰루대학에 인천시 공무원이 매년 해외연수도 가는 등 갑자기 교류의 물꼬를 튼 계기가 되었지요.

20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미주한인 이민100주년 기념' 하와이·인천 미술교류전

양진채 : 하와이에서 열린 기념식이 자매결연으로 이어지고 이민사박물관까지 건립되었군요. 특히 고서숙 화가의 역할이 큰 줄 몰랐네요. 인천아시아아트쇼나 여러 행사에서 고서숙 화가의 이름을 들었는데 그런 역할을 하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민자로서의 삶도 쉽지 않은데 대단한 분이시네요.

중구 차이나타운과 관련해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어요. 중국인의 날이나 짜장면축제에 관해서도 말씀해주셔요,

황흥구 : 안상수 시장이 2002년 6월에 당선되고 얼마 안 되었는데 저를 부르는 거예요. 누가 건의를 한 것인지 시장님이 북성동과 자유공원 일대에서 ‘중국의 날’ 행사를 해보라는 거예요.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북성동 일대가 과거 청관거리로 아직도 이색문화를 즐길 것도 많고 중국음식점도 즐비해 축제를 통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하자는 것이구나 생각했죠. 인천은 중국 산둥반도하고도 가까워 인천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기도 하고 서로 투자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지요, 그래서 ‘중국의 날’을 기획했는데 인천시와 자매결연 맺은 도시에 공문을 보내 중국의 날에 예술단을 초청하니 참석해 달라고 했죠. 반응이 좋았어요. 그때는 중국이 한국과 교류하고 싶어 서로 오려고 했어요. 이색적인 사자춤이나 용춤, 경극 등을 보여주고, 중국인거리부터 자유공원까지 행사를 펼쳤죠. 못 보던 이색적인 행사를 하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죠. 색다른 체험도 즐기고 짜장면도 먹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매년 성대하게 치렀어요.

그러다 2005년에 중구 부구청장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때가 짜장면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어요, 짜장면 요리를 처음 만든 공화춘도 그곳에 있었구요, 그래서 ‘짜장면 100주년 축제’를 기획하게 된 거예요. 이미 중국의 날 축제가 있었으니 이때 같이 개최하면 더 풍성해 지겠더라고요.

시청 문화예술과장을 해봤기 때문에 짜장면 역사를 잘 알고 있었거든요. 개항기 부두노동자들이 얼른 먹고 일하려고 만든 음식이 짜장면이었고, 공화춘이라는 중국집에서 1905년 처음 만들었죠.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요란한 사자춤과 용춤, 변검술, 경극 등으로 왁자지껄 거리를 누비며 짜장면 할인행사까지 열리니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들었어요, 거리가 인파로 꽉 메워져 다닐 수조차 없었어요. 그 이후로 차이나타운이 번성하기 시작했죠. 지금은 음식점마다 줄서서 기다려야 먹을 정도가 됐잖아요. 공직생활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습니다.

양진채 : 네에, 저도 어느 시기에 갑자기 차이나타운이 뜨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숨은 노력이 있었네요. 선생님은 논현도서관 건립에도 힘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황흥구 : 논현도서관 건립 얘기를 하기 전에 당시 도서관 얘기를 좀 할게요. 제가 문화예술 과장으로 있을 때만 해도 인천이 전국에서 제일 도서관이 적다고 언론의 단골 메뉴였어요. 인천이 공공도서관의 수가 전국에서 꼴찌라는 불명예를 달고 다녔습니다. 그때만 해도 겨우 시립도서관인 율목도서관이 하나 있었죠. 그리고 화도진 도서관이 있었고, 부평도서관, 북구도서관이 있었고, 중앙도서관, 주안도서관 정도가 있었죠. 공공도서관이 겨우 구 단위에 하나 정도도 채 못 되게 있었던 거예요. 민간 도서관도 몇 군데 없었고요. 문화관광부의 도서관 건립 기준이 인구 5만 명 당 하나가 기준인데 훨씬 못 미치는 거죠. 제가 문화과장으로 오면서 공공도서관 건립 10개년 계획을 수립했어요. 도서관건립은 법령에 의해 국비와 시비가 지원됐어요. 시장님한테 결재를 맡았죠. 시나 각 구에서 구유지든 시유지든 도서관 부지를 제공하면 도서관을 지어주겠다는 거였어요. 그 다음엔 택지 개발사업을 하게 되면 의무적으로 택지 개발 내에 무조건 도서관 짓게 하겠다는 방침도 세웠죠. 지금 소래도서관, 서창도서관, 검단도서관 등이 다 기부채납을 받아 세운 거죠. 어쨌든 도서관 건립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나니 우선 시부터 모범을 보여야겠더라고요. 이 계획에 의해 가장 획기적인 일은 도화동 수봉공원 자락에 당시 5층짜리 10개 동 506세대의 노후된 AID아파트를 허물고 그 자리에 수봉도서관을 건립한 것이에요. 도서관 하나 짓기 위해 5백 세대의 아파트와 맞바꾼 셈이었죠, 이건 정말 상상도 못할 획기적인 일이었어요.

그리고 구월동에 대표도서관인 미추홀시립도서관 건립, 영종, 연수, 계양도서관이 문화예술과장 재임 4년 동안 설계 또는 완공되었습니다. 현재는 60여 개의 공공도서관이 있어 지금은 언론에서 인천에 도서관 적다는 소리는 안 나오더라고요.
논현도서관 건립은 제가 시의원 할 때인 2014년부터 추진하여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제 지역구가 논현,고잔동으로 인구가 11만 여명이 되는데 한화에서 기부채납 받은 소래도서관 하나뿐이었어요, 문화관광부의 공공도서관 건립기준이 인구 5만 명 당 한 곳인데 많이 미달되었어요, 그래서 한 곳을 더 건립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제가 2010년 남동구 부구청장 할 때 논현동 택지개발본부로 사용했던 건물 위치가 공원 부지였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공공시설 건립이 가능한 그곳을 용도 변경해서 담당 부서인 시청 문화예술과와 구청장을 설득했죠. 건립비용은 시비와 국비를 들여 짓겠으니 관리운영은 구청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진행해 결국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구청이나 시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제가 부지를 알아내고 건립비용까지 챙겨서 짓게 되어 지금도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

양진채 : 행정가로 문화예술 쪽에 많은 일을 해오셨네요. 시의원으로 계실 때 원로예술인에 대한 지위 향상과 예술단체의 지원을 위한 ‘문화예술인 복지증진에 관한 조례’를 발의하셨더라고요.

공직에 있을 때 문화예술 관련 업무를 봐왔기 때문에 예술인에 대한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원로예술인들이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받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고 심사를 받는다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연령이나 경력 등으로 봐서 원로예술인은 문화예술진흥기금을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고 봤고요, 그래서 시의원으로 있을 때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예우와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고 조례로 정한 것이에요. 그 이후로 원로예술가들이 초대작가전이나 문학작품 발표 등이 쉬워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양진채 : 문화예술 관련 기관 설립뿐만 아니라 예술인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애쓰셨네요. 여러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과 보람 있었던 일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황흥구 : 사실 어려운 일을 해결하고 풀어나갈 때가 가장 보람 있기도 합니다. 일상 하는 일은 전임자가 했던 대로 하면 되지만 시민을 위한 꼭 필요한 사업을 벌일 때는 항상 예산 문제가 따르고 사업에 대한 생소함으로 저항을 가져오게 마련이거든요. ‘공무원사회에서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일을 벌이지 마라’는 우스개소리가 있습니다. 저는 일을 벌이면서 어려움도 따랐지만 보람도 많아 즐겁게 일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아트플랫폼 사업 추진이 그랬고 짜장면 100주년 축제를 기획하여 지금의 차이나타운 활성화에 기여한 것이나 논현도서관 건립은 현직에 있을 때의 경험이 도서관을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런 일들은 부서 간 협력뿐만 아니라 직원의 협조, 또 민간 예술인과의 소통 등 많은 도움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얘기했던 아트플랫폼 설립 당시에도 문화예술과만으로는 어림없는 사업이었고요, 이렇게 멋진 공간으로 재탄생한 데에는 당시 건축 관련 부서와 총괄 기획을 맡은 황순우 건축가의 공이 컸습니다. 적극적이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죠. 상대적으로 문화예술과는 건립 이후 운영을 주로 고민했고요.

양진채 : 많은 예술가, 문화활동가를 만나보셨을 듯한데요, 기억에 남는 예술가는 어떤 분이 계실까요?

황흥구 : 먼저 시인이셨던 랑승만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이랄까 욕구가 대단했습니다. 제가 계장으로 있을 때부터 매년 시집을 발간하겠다고 불편한 몸으로 자주 사무실에 찾아오셨습니다. 생활이 어렵기도 했고, 장애가 있는 아드님이 있어 어렵게 사셨죠. 그런데 그 분 시집은 보통 소설책처럼 두꺼웠어요. 책이 나오면 꼭 들고 찾아오시기도 했고요. 50대에 쓰러진 후 반신불수로 돌아가실 때까지 가난과 병, 외로움을 친구 삼아 시를 쓰신 분이에요. 시 속에 불교사상, 민족과 애국, 그리움, 가난과 병고, 순수한 서정의 세계가 잘 드러나 있었죠.

화가였던 황병식 화백님하고도 아주 가깝게 지냈습니다. 꼬장꼬장한 성격이지만 같은 종씨 때문인지 낮은 목소리로 살갑게 대해주시고 사무실에 자주 찾아와 미술계 또는 인천 문화예술계의 현실을 자주 얘기하곤 했습니다. 말년 병석에 있을 때 찾아뵈었더니 소장 작품이 꽤나 있다는 것을 알고도 시에서 매입하지 못하고 제자인 하와이의 고서숙 회장이 운영하는 고송문화재단에 물려줬다는 얘기를 나중에 알게 되어 많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제막식 때 그날 대공연장에서 기념음악회를 개최했을 때 ‘그리운 금강산’ 노래 지휘를 부탁했더니 오랜만에 지휘해 본다며 감격해 마지않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양진채 : 오랫동안 많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예술행정을 담당하였고 예술인으로도 활동하셨는데요, 인천의 문화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황흥구 : 공직사회에서 근무처가 자주 바뀌는 것은 일장일단이 있는데 보통 1, 2년 되면 다른 부서로 옮기게 돼요. 부서를 자주 옮기면 새로운 일을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발령 나서 가버리니까 길게 사업을 내다보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저는 8년 연속 문화예술 쪽의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인천 문화예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분야 예산이 확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올해 예산 기준 문화예술예산은 1,560여억 원으로 총예산의 1,67% 정도인데 다행히 민선 8기 시정부에서 4년 내 3%까지 끌어 올리겠다니 기대해 볼만합니다.

또 공연장이나 전시장도 확충되어야 하지만 예술인들의 창작공간이나 예술인들의 모일 만한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봐요. 인천은 서울이 가까워 타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많은데 멀리 가지 않고 먹고 자면서 활동할 수 있는 레지던시 공간이 활성화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예술인의 집 또는 회관을 건립해 서로 소통하며 예술인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이번에 시장 공약사항으로 예술인들의 공간을 조성하겠다고 하니 다행이긴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 동구 일대를 인천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민선 8기 공약 중 ‘제물포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통한 원도심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고 하는데 서울 삼청동처럼 인천의 옛 모습과 개항역사를 가진 중, 동구 일대를 잘 보존하고 활용해서 지역 활성화 함께 역사의 공간으로 남겨 두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양진채 : 장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한 사람의 문화행정가의 열정이 인천의 문화예술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잘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인터뷰가 많은 사람들, 특히 관계기관 공무원들에게 인천의 문화예술을 더 잘 이해하고 애정을 갖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중구청 앞 옛 벽돌창고가 아트플랫폼과 한국근대문학관 등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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