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애도와 정치
상태바
이태원 참사 애도와 정치
  • 진기환
  • 승인 2022.11.22 09: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년이 설계하는 인천문화]
[인천in] '인현동 참사와 이태원 참사-기억의 부재, 인천교육청의 실패'를 읽고
진기환 / 문학평론가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 마련된 추모 공간(사진=연합뉴스)
20일 오후 용산구 이태원 참사 현장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꽃이 꽂혀있다. (사진=연합뉴스)

11월 15일자 인천in에 실린 <인현동 참사와 이태원 참사-기억의 부재, 인천교육청의 실패>라는 기사를 읽었다. 이 기사는 1999년에 인천 인현동에서 발생한 호프집 화재,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 2022년에 발생한 이태원 참사를 연결 지으며, ‘집단기억’의 부재를 꼬집고 있다. 이 기사를 읽으며 한 편의 소설을 떠올렸는데, 그 소설은 계간 『창작과 비평』 194호에 실린 이주란의 소설 「파주에 있는」이다. 소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으니 소설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그런데 사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그다지 특별한 게 없다. 전남자친구 혹은 전남편으로 추정되는 준호를 여의고 혜화에서 혼자 살던 현경이, 아는 동생 정원의 부탁을 받아 파주에 있는 정원의 아파트에 들어가 살다가, 전남자친구인 재한의 메일을 받고 그와 만나 산책하고 밥을 먹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줄거리만 보면 굵직한 사건 없어 보이는 이 소설을 깊이 읽기 위해선, 주인공 현경의 상태에 깊이 몰입해야 한다.

어떤 음식이든 한그릇을 다 비운 것은 팔개월 만에 처음이었고 현경은 당장 오늘이 며칠인지도 잘 몰랐다. 어제 며칠인지 알았더라도 오늘은 또 까먹는 식이었다. 오늘이 2일이구나. 국숫집 벽에 붙은 새마을금고 달력을 보고 현경은 날짜와 요일을 알았다.

인용한 대목은 현경의 지금 상태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음식을 한 그릇 다 먹은 것도 “팔개월 만에 처음”이고, 오늘 날짜도 모르는 상태, 그것이 지금의 현경이다. 현경의 다소 붕 뜬 것 같고 삶에 의욕이 없어 보이는 태도는 짐작컨대 아마 준호의 죽음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준호의 죽음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다만 남겨진 현경의 슬픔과 공허, 그리고 휘청거리는 삶에 대한 묘사를 통해 준호의 죽음이 현경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암시한다. 정원과 재한이 현경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경은 여전히 울 수밖에 없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안부문자와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뿐이다. 그들은 현경이 준호의 죽음을 잊고 다시 ‘평범한 일상’을 살기를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준호의 죽음을 기억하는 현경 삶을 묵묵히 응원할 뿐이다. 소설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애도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창작과 비평』 194호

애도에 관해 널리 알려진 이론 중 하나는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프로이트는 죽은 사람을 잊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정상적인 슬픔이자 애도로 보았다. 한편 철학자 데리다는 죽은 사람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지우고 하루 빨리 ‘일상’으로 되돌아오려는 이런 프로이트식의 애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애도는 평생 지속되는 것이며, 계속해서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행위다. 이주란 소설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애도는 바로 이 데리다적인 의미의 애도로 읽힌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한 그 곁에 묵묵히 있어 주자는 것, 슬픔을 잊는 일을 강요하지 말자는 것.

기사를 읽으며 이 소설을 떠올린 건 바로 애도에 관한 작가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가 벌써 한 달이 돼간다. 그동안 정부는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합동분향소를 운영했다. 그런데 애도기간 동안 공공기관들에게 근조(謹弔)라는 글자가 없는 리본을 달라는 지시를 내리 것, 영정과 위패가 없는 합동분향소를 차린 것 같은 여러 논란들은 정부가 주도했던 애도가 어쩌면 희생자들을 제대로 기억하고자 했던 행위가 아니라, 그들을 서둘러 잊고 슬픔을 봉합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낳았다. 물론 이러한 의구심이 과도한 추측이지 않느냐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모여 서로 상의하고 치유하는 시간을 갖게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어떠냐는 한 의원의 질의에 대해, 유족 명단과 연락처가 없어 가능하지 않다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거짓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러한 의구심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진정한 애도를 원했다면, 누군가 질의하기 전에 슬픔을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자리를 만들어 줬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국민과 유가족의 애타는 마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지 말라”는 말의 진의를 신뢰하지 않는다. 만약 슬픔을 기억하고 공론화하는 일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정치적’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1999년이, 2014년이, 2022년이 다시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그러한 ‘정치’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식탁 앞에 앉아 느긋하게 점심을 먹으며/사후의 평온보다 일상의 평온이 얼마나 안락한지/충분히 깨달을 수 있”고 “실종된 국가보다/현존하는 가정의 울타리가 얼마나 든든한지”(박일환, 「평온했던 하루」, 『여전히 먼』)알 수 있는 건, 누군가가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부디 그 ‘정치’ 앞에서 앞으로도 더 “머뭇”거릴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