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한 고씨의 인생 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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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산한 고씨의 인생 유전
  • 이세기
  • 승인 2022.09.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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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의 손바닥소설 - 북창서굴]
(15) 고씨 평전
굴막집
굴막집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다.

일이 끝났는데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자 다들 집에 가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우리 일행은 늦지 않은 시간에 홍예문이 가까운 술집에 자리했다.

황석어 매운탕이 끓고, 두부전과 장대 모둠구이가 나온 성찬의 안주가 올려진 원탁 앞에 둘러싸 앉았다. 술 몇 순배가 돌자 동석 중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화수동에서 굴막집을 하는 고씨 성을 가진 이모가 한 분 있는데 사연이 기구했다.

수문통에서 성장하여 간질을 얻은 그녀가 영등포 방직공장 등 대처를 떠돌며 생고생을 하다가, 죽더라도 제 태어난 땅이나 밟고 죽는 편이 나으리라 하고, 수문통으로 돌아와 병에 시달렸다.

그 무렵 목을 매 죽은 사람이 있었다. 일없이 떠도는 호색가 남편의 시달림에 그의 아내는 평소에 죽고 싶다,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말이 씨앗이 되었는지 집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죽었다.

그런데 목매 죽은 자의 밧줄은 간질을 앓는 자에게는 특효약이었던 모양이었다. 죽음의 끝자락 앞에 사람은 지푸라기도 잡으려고 하지 않는가.

죽은 자는 애처롭지만 산 자는 살아야겠으니 원망하지 말라며 원혼을 달래주고, 시체의 목에서 밧줄을 벗겨서 그 즉시 밧줄을 끓여 먹었는데 효험이 있었던지 그 후론 간질이 없어졌다고 한다.

말이란 얼마나 영통한 신기를 가졌는가! 좋다 좋다, 하면 좋아지고, 나쁘다 나쁘다, 하면 나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죽은 자의 말이 살고 싶은 자에게는 생약이 된 것이다.

효험을 본 고씨는 죽은 자의 몫까지 살겠다며 그 일이 있었던 후부터 인생 2막이 펼쳐졌다. 부둣가 항구도시에서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이 뻔한 일이라서 마침 그의 어머니가 하던 묵새기 일을 물려받았다.

배에서 며칠씩 자면서 굴을 따는 묵새기 일은 고되기만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꾼들과 비좁은 선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찬밥을 더운물에 말아먹으며 지냈다. 집채만 한 산더미 파도와 멀미를 견뎌야 했다. 악천후를 만나 용궁 황천길로 갈 뻔한 일에도 용케 살아났다.

혹독한 겨울 북풍과 눈보라를 맞으며 이 섬 저 섬에서 굴을 따는 고된 갯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체 죽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토로한 적 없이 이겨냈다.

굴봉을 까는 모습
굴봉을 까는 모습

거칠어진 손은 마디마다 옹이가 져 날짐승의 발가락같이 흉물스럽고, 허리와 팔다리 몸의 모든 관절이 으스러지듯 통증이 와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마음속에 발 디딜 땅조차 두지 않고 살았다니 그저 신통할 따름이었다.

물려받은 번번한 재물 하나 없이 오로지 몸 하나만으로 견뎌야만 하는 자야말로 죽고자 해도 죽을 수 없다. 산목숨을 이어가는 간절함을 이길 수 없는 노릇이다.

놀라운 사실은 목을 매 죽은 이가 다름 아닌 고씨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것이다. 고씨는 그의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고자 했으나, 아침 일찍 일어나 먹이를 찾아 날아야 하는 날짐승의 발가락을 닮은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씨의 신산한 인생 유전을 듣고 집에 들어와 자리에 누워 천장의 어둠과 마주하자니 불현 「사복불언(蛇福不言)」에서 원효의 게송이 떠올랐다.

태어나지 말아라, 죽음이 괴롭다. 죽지 말아라, 태어남이 괴롭다(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

급기야 죽은 이의 밧줄이 어른거렸다. 고씨의 옹이 밴 갈퀴손이 황량한 바닷가 갯벌을 헤집으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도요새의 발가락이 되어 어둠을 할퀴는 환영이 날갯짓했다.

잠을 설치자 아내가 물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끝도 없는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달빛을 응시했다.

그믐의 환한 달빛만이 나의 맨손 사이로 음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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